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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댕 요강과 1986년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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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댕 요강과 1986년을 기억한다" [철학자의 서재] 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5>

우연한 기회에 <사당동 더하기 25>(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라는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나타내듯, 사회학자인 저자가 바라본 25년 가난의 기록들을 그림을 그리듯 잘 표현했습니다. 서평을 쓸 생각에 책을 읽다가 계획을 바꿨습니다. 사당동 사람들은 저자의 연구 대상이기 이전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제 자신에 대한 기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서평은 서평이 아닙니다. 그저 어린 시절의 지독한 가난을 기억하는 한 젊은이의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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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랑 아빠는 진짜 힘들게 살았다. 너희 두 남매만 집에 남겨두고 일하러 갈 적엔 마음이 정말 ……." 사당동 시절을 떠올리던 엄마는 눈물부터 흘린다. 이제는 아줌마보다 할머니에 가까워진 이 여인의 눈물 앞에 나는 말을 잃고 말았다. 애당초 인터뷰를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사당동'은 한숨과 눈물의 다른 이름일 테니까.

사당동 더하기 요강

▲ <사당동 더하기 25>(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 ⓒ또하나의문화
부모님은 내가 네댓 먹었을 때 서울로 상경했다. 첫 번째 도박이었다. 농사를 지어 먹고 살던 시골에서 위로 형과 누이를 셋이나 두었고, 아래로 동생 둘을 두었던 아빠. 여기에 엄마와 자식 둘까지 거두어 먹이려면 농사일만으로는 답이 안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서울행, 원래 잃을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 중대한 선택을 쉽게 하는 법이다. 그런 선택이란 사실 강요되는 것이니까.

사당동을 생각하면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첫 번째 물건은 '요강'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요강을 '방에 두고 오줌을 누는 그릇'이라고 정의하는데, 실제로는 똥도 눈다. 멀쩡한 화장실을 놔두고 왜 요강을 방에 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소리다. 요강을 방에 두고 쓰는 것은 화장실이 없어서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는 사실. 우리 집은, 아니 우리 방은 (어차피 단칸방이었으니까) 반지하로 주인집을 떠받치고 있었는데 화장실은 그 주인집 마당에 있었다. '쾅'하고 대문 여닫는 소리가 주인집을 거슬리게 할까봐 해질녘이면 요강이 등장했다. 마치 해가 지면 나타나는 달과 같았던 은빛 스댕의 요강.

'아이들을 방 안에 둔 채 문을 잠가 두고 일 나가는 경우도 흔했다.'(132쪽) 정말 그랬다. 맞벌이가 아니면 버티는 것조차 까마득하게 먼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시던 엄마가 잘 놀고 있으라고 손을 흔들며 문을 닫으면, 이내 '철컥'하고 자물통 잠기는 소리가 났다. 밤이 되어 다시 그 자물통 소리가 날 때까지, 잠긴 방 안에 남겨진 (둘의 나이를 합쳐도 겨우 열 살 남짓이던) 남매가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일은 단 두 가지다. 아직 중천에 이르지도 않은 해가 어서 빨리 서녘으로 지기만을 바라는 일, 그리고 남겨진 밥상을 비우고 텅 빈 요강을 채우는 일이었다. 넘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당동 더하기 산동네

아빠는 사당동 대부분의 아저씨들처럼 '노가다'를 다녔다. 내게는 '목수'라는 전문직에 종사했었다고 포장했지만 사실 건설 현장의 일용직 노동자였던 셈이다. 여러분이 한 번은 가 보았을 '예술의 전당'이나 '동작대교'를 짓는 일에 참여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은 이처럼 사당동 아저씨들의 덕을 한번쯤은 본 셈이다. 나중에는 둔촌동에 있는 시장에서 경비 일을 했다. 경비라는 직업도 사당동 아저씨들이 많이 하는 일이었다. 어쨌든, 아버지의 망치질은 여전히 경이로운 수준이라 환갑이 넘은 지금도 망치질은 손수 한다. 나는 장성한 아들이지만 나서지 않는다. 핀잔 섞인 눈총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작은 효라고 믿기 때문이다.

"일터 옮기는 일은 이들의 자의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자의처럼 보일 뿐 타의일 때가 더 많다. 이들의 직장은 거의 영세 업체들이어서 수시로 주인이 바뀌거나 부도가 나서 문을 닫는다. 또한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직장이기 때문에 월급이 조금이라도 많거나 노동 조건이 좋은 곳이 나오면 주저 없이 옮긴다."(153~154쪽)

엄마는 사당동 대부분의 아줌마들처럼 다양한 일을 했다. 남성시장 어귀에서 양말 장사도 했었고, 겨울이면 산동네를 돌아다니며 찹쌀떡이나 메밀묵을 팔았다. 당시 엄마의 나이는 20대 후반이다. "찹쌀떡~ 메밀묵~"을 외치며 산동네의 인적 드문 밤길을 홀로 다녔을 엄마다. 떡과 묵이 잔뜩 담긴 나무통의 무게보다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삶의 무게가 더 했을 그때, 그녀를 지탱해준 것은 나와 동생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이후 엄마는 가발공장엘 나가 미싱사로 일했다. 남성시장에서 아빠랑 같이 포장마차도 했었단다.

동작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이 돼서야 우리 남매는 감금에서 해방되었다.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기에 알아서 문도 잠그고 학교에도 갈 수 있었다. 당시 사당동의 인구밀도는 상상을 초월해서 2부제 수업은 기본이었다. 오후반 수업을 받을 때, 한번은 집에서 놀다가 학교 갈 시간을 놓쳤다. 1학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내 울다가 어떤 삼촌이 학교에 데려다 주었다. 사실 지각을 한 것인데 사정을 들은 담임선생님이 없던 일로 해주었다. 그 덕에 나는 초중고 12년 동안 결석은 물론이거니와 지각도 없다.

▲ 이 책의 토대가 된 사당동의 한 가정에 대한 긴 관찰을 영상으로 풀어낸 다큐멘터리 <사당동 더하기 22>(조은, 박경태 감독)의 한 장면. 철거촌의 현장. ⓒmovie.naver.com

사당동 더하기 교통사고

'86 아시안 게임'이 한창이던 그 때, 사당동의 하늘에도 색색의 애드벌룬이 둥둥 떠 있었다. (<사당동 더하기 25>의 저자가 연구를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때다.) 바람에 날리는 그 풍선을 따라가다 나는 생애 최악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리뼈가 종아리를 뚫고 삐져나온 상황이었다고 들었다. 사고를 낸 아저씨는 이미 의식을 잃은 나를 안고 가까운 병원으로 뛰었다. 사당동 아이들은 늘 이런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시유지에 아무렇게나 지은 집들이나 축대는 언제 무너질지 아슬아슬했고, 구불구불 좁은 길에는 사각지대가 많아서 차 사고도 빈번했다. 가해자 아저씨는 적어도 양심적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두 군데 병원에서 '다리를 절단해야만 한다'는 진단을 받았음에도 애써 나를 세 번째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 세 번째 병원이 고석주 정형외과다. (자리는 옮겼지만 지금도 이수역 근처에 있다.) 당시 원장선생님은 다른 곳과 달리 일단 수술을 해보겠다고 했단다. 만약 실패를 한다면야 어쩔 수 없겠지만 7살 아이의 다리를 어떻게 쉽게 자르겠냐며. 휴대폰도 없던 시절, 길가에 뿌려진 아들의 핏자국을 따라 정신없이 당도한 병원에서 부모님의 하늘은 무너졌을 것이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20년 뒤에 나는 42.195킬로미터 마라톤 풀코스를 5시간 15분 만에 완주했다.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컸던 모양이다. 석 달 넘게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내게 아빠는 컬러텔레비전을 선물했다. 그렇게라도 미안함을 표현하고 싶었으리라. 생애 첫 텔레비전을 나는 보물처럼 아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우리 살림에 텔레비전이란, 상상도 못할 물건이었다. 그 신통방통한 텔레비전을 통해 '86 아시안 게임'을 실컷 볼 수 있었는데, 내가 교통사고 당시를 정확하게 1986년으로 기억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 텔레비전은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 집에 있었다. 100일을 넘기고서야 나는 퇴원을 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큰 사고를 당하고 석 달 열흘 만에 나오는 것은 무리였을 테지만,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시골에 살던 아주 어린 시절, 나는 감기로 오랫동안 앓았던 경험이 있다. 피를 토할 정도였으니 감기보다 더 심한 병이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그저 나는 감기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병원비가 모자라 엄마는 하나뿐인 결혼 패물이던 금가락지를 내다 팔았다고 한다. 더 이상 내다팔 물건이 없는 가난한 자들에게 병원은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텔레비전을 되팔 수는 없었을 테니까.

사당동을 떠나다.

철거를 앞두고 부모님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대부분의 사당동 사람들이 같은 고민에 놓였다. 또 다른 사당동으로 옮기거나 근처 위성도시로 떠나야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또 철거를 당할 바에야 근처 지방으로 옮기는 게 나을 듯 했다. '안양, 시흥 등 서울 근처 위성도시로 빠져나간 경우도 상당했다.'(147쪽) 우리는 안양을 선택했다. 두 번째 도박이었다. 모은 돈을 모두 털어 철물점을 차렸지만 장사가 잘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비록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만 했지만 아빠에겐 '내 사업'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작은 방 하나가 딸린 가게로 이사했다. 역시 단칸방이었고 화장실도 밖에 있었지만 적어도 주인집의 눈치를 보지 않고 화장실에 갈 수 있었다.

나는 이 시절을 행복으로 기억한다. 안양 호계동으로 이사한 뒤로는 늘 가게(집)엔 아빠와 엄마가 있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었고, "학교 다녀왔습니다."라고 할 수 있었다. 가난은 마치 그림자처럼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어서, 그 뒤로도 엄마는 꽤 오랫동안 하나뿐인 그 방에서 이런 저런 부업을 했다. 미싱을 돌려 가발을 만들기도 했고, 어떤 때는 전자부품을 끼우는 일도 했다. 전자부품 끼우는 일은 나도 참 열심히 했었는데, 파란색 플라스틱 가루가 많이 날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일을 하고나면 꼭 그 고약한 가루들이 밥 위로 올라와서 밥을 먹다가도 몇 번씩은 집어내야 했다. 귀찮아서 그냥 씹어 넘긴 일도 많았지만. 4학년이 되던 첫 날, 그러니까 1990년 3월 2일에 호계동으로 이사했는데, 그해 2학기에 나는 부반장으로 당선되었다. 부반장이 되고 얼마 뒤가 내 생일이었는데 나는 무턱대고 우리 반 아이들을 죄다 초대했다. 심지어 담임선생님까지. 네 식구 편히 눕기도 어려웠던 단칸방에 그 많은 아이들과 선생님을 초대할 발상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없는 살림에 무슨 음식으로 생일상을 차리겠는가? 1990년 그 해 생일에 30명이 넘는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왔다. 물론 천사 같았던 담임 홍금숙 선생님도 오셨다. 그날 엄마와 아빠는 열 마리가 넘는 통닭 값을 대야 했지만 나는 그날 받은 생일 선물(주로 노트나 연필)을 중학교 다닐 때까지 썼다.

당시 친구들을 적어도 내가 단칸방에 산다는 이유로 놀리지는 않았었다. 생일 초대에 응해준 친구들 중에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와 잘 어울렸다. 찻길 하나만 건너면 논밭이 펼쳐졌기에 개구리도 잡고 흙장난도 많이 했다. 이후 그곳은 수도권 신도시를 대표하는 '평촌'이 되었고, 나는 그곳에 새로 들어선 범계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가난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뒤에 '부끄럽진 않아도 내세울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라고 고쳐 생각하게 되었다. 으리으리한 68평대의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서 생일파티를 하고 나오면서였다. 단칸방으로 돌아온 그날 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 <사당동 더하기 22>의 한 장면. ⓒmovie.naver.com

다시 사당동으로

이듬해, 철물점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은 부모님은 의왕시 변두리에 21평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물론 융자를 많이 끼고 샀으며 오래도록 갚아야 했다. 어쨌든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처음으로 단칸방을 벗어났다. 그러나 여유도 잠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자본은 밑바닥 경제까지 잠식해나갔다. 철물점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형마트에 밀려 점차 손님이 줄었고 대신 부모님의 한숨이 늘어갔다. 내가 안양시청에서 공익근무요원을 하던 때, 우리는 충남 공주로 내려와 떡방앗간을 시작했다. 세 번째 도박이었다. 또 다시 제로에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다시 또 10년이 넘게 흘렀고, 떡방앗간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목수였던 아빠의 빈틈없는 철저함과 악착같이 살아서 얻은 엄마의 넉넉한 마음이 근원이었다. 공주로 내려올 당시, 집안이 어려워 내놓았지만 팔리지 않았던 탓에 우리의 첫 '내 집'은 그대로 남았다. 나는 지금 부모님의 눈물과 피땀으로 얻은 그 집에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가난의 냄새는 무어라고 표현하기 어렵다. 그 냄새는 어쩌면 찌든 때처럼 그들 삶 깊숙이 박혀 있어 좀처럼 씻어 내기 힘들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303쪽)

그렇다. 가난이란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운 굴레다. 지금 우리 가족이 이만큼이나 살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세 번의 도박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빠가 (비록 오른쪽 집게손가락 한 마디를 잃었지만) 건설현장에서 크게 다치지 않아서이고, 엄마가 (비록 미싱일 덕에 지금은 양쪽 눈이 성치 못하지만) 집을 나갔다거나 일수놀이에 돈을 떼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며, 우리 남매가 (비록 교통사고의 흉터를 훈장으로 남겼지만) 죽거나 큰 병에 걸리지 않아서이다. 억세게 운이 좋은 경우이기에 예외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예외는 예외일 뿐. 어떻게 우리 사회의 빈곤을 끊을 수 있을까?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되고 게으른 사람은 가난해 진다'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거짓이라는 것쯤은 이제 부연이 필요 없는 명제가 되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 양극화는 가속화되고 있으며, 생활고를 이유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웃들은 늘어만 간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우리 사회는 아직도 분배보다는 성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공자 이래로 2500년 동안 우리는 늘 분배보다는 성장을 꿈꾸었고, 그래서 늘 부족하다고 여겼으며, 더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흙에 묻혔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적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게 (분배)되지 못함을 걱정하며,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않고 편안치 않을 것을 걱정한다.'고 들었다. 고르게 (분배)되면 가난함이 없어지고, 조화를 이루면 부족함이 없어지고, 편안하게 되면 (마음을) 기울일 일이 없어지는 법이다."(孔子曰, … 丘也聞有國有一家者,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蓋均無貧, 和無寡, 安無傾.)" (<논어>, '계씨')

나는 내일도 모교 강의를 하러 가기 위해 사당동을 지날 것이다. 인연은 인연인가보다. 지독한 가난의 냄새도, 은빛 스댕 요강의 기억도 이제는 가물거리는 추억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이웃의 가난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때마침 지방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거짓말로 현혹하는 사람들을 걸러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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