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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경의 '업무상 과실치사'와 '미필적 고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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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해경의 '업무상 과실치사'와 '미필적 고의' 사이 [편집국에서] 공권력의 책임회피 능력 과소평가 말라
지난 2008년부터 일부 형사사건에 국민참여재판이 도입됐다. 국민참여재판은 일반시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재판이다. 한 고위법관이 사석에서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배심원들이 아직도 구분하기 어려워하는 몇 가지 개념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과실과 미필적 고의다. 피의자가 피해자의 복부를 찔러 살해했는데, 피의자가 피해자와 다투다가 엉겁결에 찌르게 됐는데 죽었다고 말하면, 그냥 과실치사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복부를 한 번 찌른 게 아니고 세차례 찔렀다고 하자. 그러면 이건 미필적 고의로 봐야 한다. 우발적으로 찔렀는데, 같은 부위를 반복해서 찌른 것은 과실로 보기 어렵다. 죽이려고 했거나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재판에 임한 배심원도 이렇게 구분하기 어려워 하는 개념을 이제 온국민이 살펴야 할 일이 생겨버렸다. 세월호 참사 탓이다.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검경합동수사본부가 승객을 버려두고 탈출한 선장 등 선박직 직원들에 대해 살인죄를 적용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검찰이 선원들의 행위에 대해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를 적용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는 승객들이 숨질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상황에서 마땅히 해야할 조치를 취하지 않은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본다는 것이다.

수사본부는 사고가 난 지난 4월 16일 오전 8시 48분부터 이준석 선장이 탈출한 9시 46분까지 선원들이 방송이나 비상벨, 무전기 같은 여러 수단을 통해 탈출 명령을 내릴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고 어떻게 할지를 묻는 객실 승무원들의 무전에도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선원들에 대해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를 적용할 수 있다는 판단에 대해 별다른 반론은 없어보인다.

문제는 해경이다. 검찰은 해경이 세월호 침몰 사고 현장에 처음 도착한 지난 4월 16일 오전 9시 30분 경부터 선박 내에서 한 학생이 마지막 카톡 메시지를 발신했던 오전 10시 17분까지 최소 47분 동안 해경이 선내에 들어가 승객들에게 탈출하라고 지시하거나 안내만 했어도 대부분의 승객을 구조할 수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검찰청디지털포렌식센터(DFC)가 구조 당시 현장을 담은 동영상을 분석해보니, 세월호 침몰 직전 경사도를 고려할 때 해경이 선내에 진입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있었다는 과학수사에 따른 결론이다.

검찰은 해경의 구조활동을 검토한 결과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형법 122조 "공무원이 정당한 이유 없이 그 직무수행을 거부하거나 그 직무를 유기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는 규정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지난 10일 5대종단 시국공동행동 등이 세월호 추모 및 정부 부실대응 규탄기도회와 촛불집회가 끝난 뒤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검찰이 해경의 책임을 엄중히 묻는다고? 정말?

문제는 해경의 직무유기를 고위급까지 적용할 수 있느냐, 그리고 해경의 직무유기로 '업무상 과실치사'까지 초래했다고 볼 수 있느냐다. 그런데 해경의 구조활동에 대해 국민 감정은 극도로 악화돼있다. '업무상 과실치사' 정도가 아니라 '미필적 고의'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검찰 스스로도 "전원 구조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해경이 직무유기를 저질렀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지 않은가.

그러나 검찰 수사로 해경 관계자들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는커녕 '업무상 과실치사'로 기소될 가능성도 기대하기 힘들다. 사건의 피의자가 될 수 있는 해경이 합동수사본부의 한 축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13일 합동수사본부에 따르면 해경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검찰 수사는 세모그룹 유병언 일가에 초점을 맞춰지고 있다. 해경이 업무상 과실치사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으로 기소된다면 그것은 곧바로 정부가 살인 사건의 책임자가 된다는 것으로, 검찰이 정권이 붕괴될 상황으로 몰아가게 사건을 처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전례를 보아도 그렇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경천동지할 인재 사고가 여러 차레 벌어졌지만, 고위 관료가 책임지고 엄한 처벌을 받았다는 얘기 들어봤는가? 업자에 속하는 일부 개인들을 '죽을 죄'를 진 것으로 몰아가고 이들을 처벌하는 선에서 그쳤다. 공무원이 처벌받았다면, 현장에 가까운 하급 공무원들이 직무태만 정도로 징계를 받거나 집행유예 등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20년 전의 '세월호 참사'에 해당하는 1993년 서해 훼리호 사건을 돌이켜보자. 292명이 사망한 이 참사와 관련해 당시 안전점검일지를 허위로 작성했던 군산해운항만청 공무원 4명은 전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1994년 32명이 숨진 성수대교 붕괴 사고에서 실형이 선고된 3명 중 공무원은 1명이었다. 보고서 조작으로 '업무상 과실치사죄'가 인정된 서울동부건설사업소장 한 명이 금고 1년6월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502명의 사망자가 발생해 공무원 12명이 기소됐지만, 직접 뇌물을 받은 이충우 전 서초구청장 등 2명만 실형이 선고됐다.

법조계에서는 공무원들에 대해 법원이 봐주기 판결을 한 것이 아니라, 사법체계 자체가 공무원 처벌이 어렵게 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구체적으로 공무원이 어떤 행위의 작위, 부작위로 인해 사건을 일으켰다는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는 한 '책임'을 지워 중벌을 부과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두 달 전 경주 마우나리조트 체육관 붕괴사고에서도 15명이 기소됐으나 공무원은 한 명도 없겠는가.

공무원에게 권한은 있고, 책임은 묻기 어려운 관료시스템과 사법시스템이 버티고 있는 한 '세월호 참사'로 인한 희생자 가족들의 원통함은 해소되기 어려운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희생자 가족들 입에서 "이제야 정의가 실현됐다"거나 "우리의 희생으로서 우리 사회에 다시는 세월호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기대되는 변화가 이뤄졌다"는 회한어린 소감이라도 들을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재난 뒤에 '정의가 실현된' 성공사례로 다시금 회자되고 있는 영국의 '힐즈버러 참사'를 봐도 착잡하다. 경찰 등 공권력의 책임회피가 얼마나 집요한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1989년 힐즈버러 축구장에서 관중 96명이 숨진 참사는 2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희생자 가족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재판'이 겨우 시작됐다.
이 사건은 가해자와 피해자 자체가 경찰에 의해 뒤바뀐 점에서 충격적이다. 리버풀 원정응원단이 셰필드 힐즈버러 구장을 찾았다가 압사 참사를 일으킨 주범으로 몰렸다. 관중관리를 잘못한 경찰은 모든 증언과 조사를 경찰에게 불리한 것은 조작하고, 리버풀 응원단의 일부 취객 탓으로 돌리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심지어 영국 경찰은 사고발생 직후 신속한 인명구조가 절실한 순간에 응원단끼리의 충돌을 우려해 구급차 진입도 최대한 막아 인명 구조 최우선 원칙도 어겼다. 진상조사위원회는 경찰이 현장에서 적절한 응급조치만 취했어도 희생자의 절반에 가까운 41명을 살릴 수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개탄스러운 것은 모든 것이 조작됐다는 것을 밝히는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지는 데만도 무려 20년이 걸렸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희생자 가족과 시민사회가 '힐즈버러 그룹'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20년간 줄기차게 투쟁한 끝에 이뤄낸 것이다.

'힐즈버러 참사'는 아무리 '매뉴얼 사회'가 된다고 해도, 공권력은 매뉴얼 뒤에 숨어 책임회피를 조직적으로 자행할 수 있다는 교훈으로 읽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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