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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참모총장의 위험한 선택…헌법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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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참모총장의 위험한 선택…헌법은 죽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45> 5.16쿠데타, 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5.16쿠데타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4월혁명, 여섯 번째 마당] 국민 죽이고 '야당 탓' 대통령, 미국도 안 지켜줬다

[4월혁명, 일곱 번째 마당] '참변은 너희 탓' 떠넘긴 대통령, 결국 쫓겨났다

[4월혁명, 여덟 번째 마당] '일본과 일전불사' 대통령, 속셈은 따로 있었다

[4월혁명, 아홉 번째 마당] 제자들의 의로운 죽음, 선생도 나라도 바꿨다

[4월혁명, 열 번째 마당] 결정적 순간, 야당 지도부는 비겁했다

[5.16쿠데타, 첫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연재는 왜 그 신문에서 사라졌나

[5.16쿠데타, 두 번째 마당] 오랜 꿈 이룬 '박통'…대한민국은 짓밟혔다

[5.16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는 왜 한국인의 '노예근성'을 주목했나

프레시안 : 5.16쿠데타 세력은 여러모로 허술했는데도 정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서중석 : 쿠데타가 성공한 건 쿠데타 세력이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짜고 군 동원을 잘해서가 아니다. 그걸 막아야 할 세력들이 막을 태세를 제대로 못 갖췄거나 막지 않으려 했거나 또는 양다리를 걸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쿠데타 세력이 미약했는데도 성공했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운이 무지무지하게 좋았다고 얘기할 수 있다.

우선 1960년 8월 민주당 정부가 출범한 후 국방부 장관이 내내 민간인이었다. 초기에 현석호가 맡았다가 권중돈이 맡고, 다시 현석호가 국방부 장관을 했다. 국방부 장관에 민간인을 앉히는 건 박정희 정권 이후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 때도 이미 있었다. 신성모, 이기붕, 김용우 다 민간인이었다. 특히 신성모나 이기붕은 군인들이 그 앞에서 설설 긴다고 얘기할 정도로 장관으로서 대단한 힘을 가지고 군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게 된 건 군 장성들이 너무 나이가 어렸던 것과도 관련 있다. 심지어 '국회 국방위원들이 장군들 앞에서 위세가 당당하다. 장군들을 아이들 다루듯이 대한다', 이런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군인 출신이 아니라고 해도 국방부 장관이 될 수 있었던 건 꼭 민간인 우위가 성립돼서라고 볼 수만은 없다. 군 수뇌부의 나이가 어리고 서로 다퉈서, 또 진급하기 위해 아부라고 할까 하는 것도 있으니까 민간인 장관들이 강력한 힘을 가질 수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장면이 현석호를 비롯한 민간인을 국방부 장관에 임명한 건 명백히 잘못한 일이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난 후 과도 정부를 이끈 허정은 이종찬을 국방부 장관에 임명했다. 그렇게 한 제일 큰 이유는 당연히 쿠데타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장면이 총리로 선출될 때 허정이 도와준 걸로 자료에 나와 있다. 영향력이 있지 않았나. 그런 허정이 과도 정부 수반에서 물러날 때 장면한테 '당신에게 어떤 부탁도 하고 싶지 않다. 딱 한 가지만 하겠다. 이종찬을 국방부 장관에 유임하라'고 이야기한 걸로 허정 회고록에 나온다. 장면은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자신과 가까운 현석호를 국방부 장관에 임명했다.

그럼 현석호가 군을 잘 알았느냐. 이 사람 자신이 이야기하듯이 군을 몰랐다. 동생(현석주, 박정희·김재규와 육사 2기 동기였다. <편집자>)이 군인이었는데 4.19 나고 준장에 진급했다. 그 동생을 통해 좀 얘기를 들은 것 빼고는 군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사실 장면 정권엔 군 경력이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장면이 어떻게 이렇게 군에 소홀할 수가 있느냐, 60만 대군을 너무 가볍게 본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또 많은 사람이 그 이유는 설명하고 있다. 장면은 미국을 너무나도 철저히 믿었다. 쿠데타가 일어나면 그쪽에서 처리해줄 걸로 믿었다. 결과적으로 아주 잘못된 생각이었다.

장면이 사무실을 주한 미국 대사관 바로 앞에 있는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에 마련한 걸 보면 쿠데타를 전혀 예감하지 않은 건 아니지 않느냐 하는 반문을 할 수도 있다. 미국한테 보호를 받으려고 그 앞에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장면이 현석호를 국방부 장관에 임명한 건 잘못된 것이다. 장면 정부는 군을 잘 모르기 때문에도, 군에 영향력이 있는 이종찬 같은 사람을 국방부 장관에 앉혔어야 하는 거다.

미국을 너무 믿은 장면의 결정적 패착, 장도영 참모총장 임명

프레시안 : 국방부 장관 문제와 더불어 많이 거론되는 것이 육군 참모총장에 부적절한 인사를 앉혔다는 점이다.

서중석 : 장면의 최대 실책은 육군 참모총장에 장도영을 앉힌 것이다. 왜 최경록을 갈아치우고 장도영을 앉혔느냐. 최경록을 유임했으면 쿠데타가 절대로 안 일어났을 것으로 본다. 아주 강직하고, 군은 정치에 초연해야 한다고 항상 주장한 사람이다. 이종찬하고 그 점에서 똑같다. 그런 최경록을 육군 참모총장에 앉힌 건 정말 잘한 것이다. 다만 최경록이 미국하고 충돌했기 때문에, 약체 정권이기에 미국한테는 항상 잘 보이려 했던 장면 정부는 최경록을 갈아치운 것이다.

이한림이나 김종오가 그 후임이 될 수도 있었다. 이 사람들만 앉혔어도 괜찮았을 것이라고, 쿠데타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한림은 무엇보다 장면과 마찬가지로 천주교 신자였다. 그런데 가장 잘못된 인사를 했다. 장도영을 앉힌 거다.

프레시안 : 장도영은 어떻게 육군 참모총장이 될 수 있었던 건가.

서중석 : 이것에 대해 설이 구구한데, 현석호의 증언이 명료하게 잘 이야기하고 있다고 본다. 장면은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하게 한다고 그랬는지 몰라도 '국방부 장관이 참모총장을 인선하라'고 하면서 '주한 미군 사령관하고 상의해서 하라'고 현석호에게 지시한 것 같다. 이승만 정권 때부터 주한 미군 사령관하고 상의해서 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임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최경록을 장면 정권이 교체하려 하던 1961년 2월, 현석호가 매그루더 주한 미군 사령관을 만났다. 현석호는 '난 우리 군 장성의 능력과 성분을 잘 모르니 사령관이 추천하는 대로 쓰겠습니다', 이런 태도를 취했다. 그러면서 김종오, 이한림, 장도영 등을 거론했다. 그러자 매그루더가 '장도영이 어떠냐', 이렇게 딱 얘기했다. 매그루더는 그전에도 장도영을 두둔했다. 그런데 장도영은 평이 아주 나빴다.

프레시안 : 왜 그렇게 평판이 나빴나.

서중석 : 이승만 정권, 특히 이기붕하고 너무나 밀착돼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장도영 부인이 이화여대를 나왔는데, 이기붕 부인인 박마리아 제자다. 하여튼 이기붕 집을 드나든 명단을 보면 송요찬은 꼭 아침 일찍 드나들었다고 한다. 몰래 드나든 것처럼 나오더라. 장도영은 부인하고 자주 들락거린 것으로 나온다. 이기붕한테 딱 달라붙은 것이다. '이기붕 양자'라는 얘기까지 들었다. 그래서 4.19 후 제일 먼저 숙청돼야 할 정군 대상에 장도영이 들어가 있었다.

이런 장도영을 매그루더가 추천한 것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장도영은 물론 그 부인도 영어를 잘했고 이게 미 8군 내에서 인기가 아주 좋았던 점이 작용했다. 그리고 장도영이 매끄럽게 생기지 않았나. 부부 모두 처신을 잘하고 사교성도 있었다. 그래서 매그루더가 추천했는데, 현석호가 '좋다'고 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국무회의에서 정일형 외무부 장관이 아주 강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임명하는 데 세 시간이나 끌었다고 한다. 장면은 현석호 의견대로, 그러니까 매그루더가 얘기한 사람으로 하려고 한 것이다.

장면의 최대 실수는 직접 참모총장을 골라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도 않았고, 현석호를 시켜 매그루더의 말을 듣고 장도영을 임명한 것이다. 누구나 그 얘기를 하지 않나.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쿠데타 막아야 할 참모총장, 양다리 걸치며 박정희 방패막이

프레시안 : 장면 총리와 현석호 국방부 장관은 쿠데타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이를 막지 못했다.

서중석 : 장면은 쿠데타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쿠데타가 나기 일주일 전이라고 하는데, 이때는 아주 구체적으로 들었다. 현석호는 그보다 더, 그러니까 10일 전이라고 현석호는 얘기하는데 그때 구체적인 정보를 들었다. 국방부 조사대 대장이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는데 장 총장도 알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고 보고한 것이다. 현석호 장관은 바로 장도영 총장을 불렀다. 장도영은 '그럴 리 없다. 박 장군에 대한 모략이다', 이렇게 나왔다. 민간인 장관이니까 더 이상 어떻게 하지를 못하고 '그 후엔 의심만 갔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고 있다.

이것과 똑같이 장면도 1주일 전에 아주 구체적으로 '누구누구가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장면은 회고록에서 이게 쿠데타가 일어난다는 네 번째 정보라고 얘기했다. 그래서 장도영한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장도영은 똑같은 대답을 했다. '알아는 보겠다. 그런데 그럴 리가 없다.' 장면이 몇 번이고 다그쳐 물어보니까 장도영은 '모략이다'라는 식으로 대답한 걸로 나와 있다. 장면이건 현석호건 쿠데타를 막기에는 너무나도 적임자가 아니었다. 당시 위기 내각이라고 불렸는데, 위기 내각치고는 정말 군을 모르는 사람들이 총리하고 국방부 장관을 맡고 있었다.

프레시안 : 쿠데타 소식을 들은 직후 장면 총리는 몸을 피했다.

서중석 : 쿠데타 당일 오전 2시쯤 장도영이 장면에게 '쿠데타가 일어났다. 빨리 피신하라'고 했다. 장면 이 양반이 어디로 갔느냐 하면,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자기 사무실 앞에 있는 주한 미국 대사관으로 갔다. 나중에 미국 문화원이 되는 자리다. 그런데 철벽처럼 닫혀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면이 왔는데 그랬다는 건 조금 이상하긴 하다. 그다음엔 미국 대사가 거처하던 한국일보 앞쪽으로 달려갔다. 지금은 미국 대사관의 특수 시설이 있는 것으로 돼 있고, 박정희 정권 말기에는 청와대를 도청하고 있다고 해서 말썽이 된 바로 그 지점이다. 여기 가서 문을 두드리고 '내가 장면이다. 장면이다' 했을 것 아닌가. 그런데 역시 어떤 엄명이 내려졌는지, 장면이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수위가 얼굴을 쳐다봤으면 누군지 알았을 것 아닌가.

장면은 자기가 제일 잘 아는 곳이 혜화동 일대니까 거기에 있는 '칼멜 수도원'(가르멜 수도원)이라는 곳에 갔다. 남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지만 국가 원수급만은 받아준 곳이었는데, 내각 책임제에서 총리니까 국가 원수급이라고 해서 장면을 받아줬다고 한다. 장면은 수도원에서 전화를 했다. 그러나 미국 쪽에선 장면이 보기에 성의 있게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장면이 군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능했고 큰 실책을 저지른 건 틀림없다.

프레시안 : 장도영 참모총장은 왜 양다리를 걸친 건가.

서중석 : 장도영이 양다리를 걸친 건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재미난 게 많다. 장면이 군에 대해 무능했다고 하는 건 사실 장도영 임명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군의 쿠데타를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참모총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참모총장이 막을 생각이 없으면 장면이 유능해도 쉽게 막을 수 없었다. 어디서나 그렇다. 다른 나라를 보면 대개 쿠데타를 참모총장하고 결탁해서 하거나 참모총장이 직접 일으킨다. 그만큼 쿠데타에서는 참모총장의 위치가 아주 중요하다.

많은 사람이 쿠데타 성공과 관련해 장면도 얘기하지만 장도영에 대해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있다. 장도영이 쿠데타를 막아야 할 위치에 있었는데 양다리를 걸친 것 아니냐고 얘기한다. 그런데 장도영은 박정희하고 아주 특별한 관계, 어떤 군인보다도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장도영으로 하여금 양다리를 걸치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왼쪽)과 박정희 소장. ⓒ연합뉴스

박정희에게 은혜 베푼 장도영…그러나 박정희를 몰랐다

프레시안 : 장도영 참모총장과 박정희 소장은 어떤 관계였나.

서중석 : 두 사람은 잘 아는 사이였다. 장도영 회고록 <망향>에 따르면 해방 공간에서 태릉사관학교(조선경비사관학교), 이게 지금 육군사관학교인데 장도영이 소령으로 생도대 제2중대장을 할 때 박정희가 중위로 생도대 제1중대 구대장을 했다. 그때부터 알고 있었는데, 장도영이 1949년 가을 대령으로서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발령을 받아 가보니 거기에 박정희가 문관으로 있었다. 침울한 표정으로 불쌍하게 있었다고 한다.

여순사건 후 숙군 때 박정희는 자신이 알던 남로당 프락치 비밀 조직망을 전부 조사관한테 보고했다. 그 보고에 의해 군내 '적색분자'가 일망타진됐다. 그래서 형이 감면, 면제됐지만 군복은 벗어야 했다. 그런 박정희를 백선엽 정보국장이 문관으로 채용했다. 직제에도 없는 자리에 정보국장이 그냥 앉힌 것이다. 급료도 없었다고 한다. (공식 급여가 없는 대신 정보국 기밀비에서 얼마씩 지급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편집자>) 박정희는 항상 사복 차림으로 의기소침했고, 장도영은 그런 박정희를 퍽 가엽게 생각했다더라.

그래서 장도영이 정일권 참모총장한테 '박정희를 현역 복직시키자'고 직접 얘기했다. 답변이 없자 이번엔 '박 문관을 현역 소령으로 복직시키자'고 정식으로 상신했다고 한다. 정일권도 동의해서 직접 신성모 국방부 장관한테 갔는데, 장관이 흔쾌히 승낙했다고 한다. (박정희가 육사 및 육군본부 정보국 시절 맺은 인연은 5.16쿠데타와도 이어진다. 생도를 훈육하던 시절 만난 육사 5기는 쿠데타 때 군대를 주로 동원했고, 정보국에서 만난 육사 8기는 쿠데타를 기획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숙군에서 현역 복귀 때까지는 박정희의 인생에서 암흑기였다는 평가도 있다. 박정희는 일제 말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에서 4년 교육을 받은 끝에 장교가 됐지만, 1년 후 일본이 패망했다. 해방 후 다시 교육을 받고 한국군 장교가 됐지만, 숙군으로 예편됐을 뿐만 아니라 동거하던 여성도 그 무렵 박정희를 떠났다. 좌절에 빠졌을 박정희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현역으로 복귀하고 1950년 12월 육영수와 재혼하면서 다시 인생길을 열어갈 수 있었다. 그 계기를 만들어준 장도영은 박정희에게 큰 은혜를 베푼 셈이다. 박정희는 그 후에도 계속 장도영의 덕을 본다.

서중석 : 박정희가 현역 소령으로 복직한 건 장도영의 공로라고 볼 수 있다. 정말 박정희를 살려준 것이다. 장도영은 1950년 9.28 수복 후 9사단장이 됐을 때는 박 중령을 참모장으로 발탁했다. (1950년 7월 31일 자로 현역 복귀한 박정희 소령은 그해 9월 15일 중령으로 진급했다. <편집자>) 1954년 초 제2군단장으로 있을 때는 박정희를 군단 포병 사령관으로 썼다. 그때는 박정희가 준장이었는데 이건 송요찬의 힘이 작용했다고도 한다.

장도영은 1959년 초에 제2군 사령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4월혁명 후 장도영은 최경록 참모총장한테 예편 신청을 했다. 장도영도 눈치코치가 있으니까, '최경록이 참모총장이 됐으니 이건 안 되겠다' 싶었던 것이다. 사실 그전에도 예편하려 했다고 돼 있다. 어쨌건 1960년 9월 17일에 신청했는데 이게 반려됐다.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 반려됐느냐 하면 매그루더 장군이 개입했다고 한다. '왜 장도영 같은 유능한 사람을 예편하게 하려고 하느냐. 유임하라'는 요청을 하니까 한국 정부가 그 말을 따른 것이다.

나중에야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는데, 어쨌건 매그루더가 이렇게 계속 관심을 갖고 장도영을 돌봐줬다는 걸 알 수가 있다. 이런 매그루더 덕택에 나중에 박정희도 살아나고 쿠데타도 성공하게 되는 기묘한 인연이 만들어진다.

프레시안 : 어떤 사연인가.

서중석 : 뭐냐 하면, 박정희는 당시 육군 작전참모부장에서 물러났다. '좌익 성향이 있으니 예편하게 해야 한다'고 해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좌익 색채가 있는 장군으로 오해를 받아 그렇게 된 것이다. 이때 장도영이 직접 육군본부에 연락했다. '나한테 보내달라.' 그렇게 해서 박정희가 제2군 부사령관이 된 것이다. 제2군 부사령관이 되지 않고 예편됐으면 박정희 인생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매그루더가 장도영을 유임하도록 했고, 그렇게 유임된 장도영이 예편될 박정희를 구해줬다. 박정희는 이 점에선 장도영한테 정말 고마워해야 할 처지였다. 그러면서 쿠데타에 전념해 성공시킬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다.

그러니까 장도영이 양다리를 걸친 데는 '박정희가 날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게 강하게 작용했다고 누구나 추측한다. 그런데 장도영은 박정희를 잘 몰랐다. 남로당 프락치 조직을 수사관한테 알려준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 프락치 중 아무도 없다. 이건 무서운 것이다. 그런 무서운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필요하다면 장도영도 바로 걷어찰 수 있는 것이었다. 장도영이 이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아니겠느냐고 볼 수 있다.

CIA 쪽에서든 미 8군 쪽에서든, 또 한국군 정보 계통에서든 여러 곳에서 장도영한테 '박정희가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정보가 들어왔다. 장도영은 그걸 다 차단했다. 국방부 장관이 불러도 '염려할 것 없다'고 했고, 총리가 뭐라고 하는데도 '걱정할 것 없다. 박정희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했다. 상급에서 박정희를 치려고 하는 것도 못하게 막아버렸고, 박정희의 쿠데타에 양다리를 걸쳤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데 장도영이 한국 쪽에서는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한 것 아닌가. 그와 함께 중요한 인물이 윤보선인데 윤보선과 장도영은 반반일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장도영 참모총장만큼이나 쿠데타 성공에 기여한 윤보선 대통령

프레시안 :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를 용인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장면 정부가 무너지면 자신이 권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많다.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라기보다는 특정 정파(민주당 구파)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움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서중석 : 쿠데타 세력이 정말 운이 좋다고 한 데에는 윤보선의 역할이 아주 컸다. 윤보선은 쿠데타를 막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장면이 피신한 상황에서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보선하고 장면은 여러 가지로 사이가 나빴다. 1950년대 후반기에 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대립이 보통 심한 게 아니었다. 구파의 영수는 조병옥이고 신파는 장면인데, 4.19만 안 났어도 구파는 자유당 온건파하고 합작해 신당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이 꽤 있다. 그만큼 구파와 신파는 서로 미워했다.

윤보선 이 양반은 내각 책임제에서 대통령이기 때문에 명목상의 대통령 위치를 잘 지켜나가는 게 중요했다. 우리나라는 그런 게 잘 안돼서 내각 책임제를 못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하여튼 윤보선은 장면 총리가 하는 일에 간섭을 많이 했다. 장면이 쓴 것을 보면, 심지어 1961년 윤보선은 '지금 당신이 제대로 하고 있느냐'라는 식으로 여러 사람이 있는 데에서 장면을 힐난했다. '난 헌법에 따라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다', 장면이 이런 식으로 대답할 정도로 둘 사이가 아주 험악했다. 감정적으로도 나빴던 것이다. (1961년 3월 23일 청와대 요인 회담에서 두 사람은 "총리가 지금까지의 실정을 솔직하게 시인하지 않고 또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윤보선), "내가 그만두면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있겠느냐"(장면)며 맞섰다. 그 후 신문에 '대통령이 총리에게 정권을 내놓으라고 했다'는 식으로 크게 보도되면서 양측의 갈등은 더 커졌다. <편집자>)

신민당(구파 일부가 민주당에서 갈라져 나가 만든 정당)도 계속 장면 정부를 공격하고 있었지만, 윤 대통령도 장면 정부가 무너지기를 바라지 않았느냐고 여러 사람이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미묘한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대통령의 권한에 대해 헌법에는 '군 통수권을 대통령이 갖는다', 이렇게 명시돼 있었다. 그런데 국방부 장관은 말할 것도 없고 참모총장 등 군 인사권을 가진 건 총리였다. 그래서 군 통수권이 어디 있느냐에 대해 장면 집권 내내 논쟁이 벌어졌다. 양쪽이 서로 자기 쪽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전문가들도 의견을 달리했다. 한쪽에선 '헌법 조문에 있는 대로 대통령한테 있다'고 봤다. 그러나 다른 쪽에선 '실질적으로 군 인사권을 총리가 갖고 있고, 대통령의 군 통수권은 명목상의 것일 뿐이다. 대통령은 명목상 국가 원수 아니냐. 그것과 비슷한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직접 군을 순시하고 다녔다. '내가 통수권자다', 이걸 그런 식으로 주장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5.16쿠데타를 맞이한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장면 정부는 이승만 정부와는 달라서, 민간인 정부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일정하게 해보려 하는 정부였다. 따라서 '윤 대통령도 쿠데타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했어야 한다. 그러면 쿠데타는 진압됐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보고 있다. 그런데 윤 대통령 태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 윤보선과 박정희. 사진은 1961년 11월 27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 방문 결과 보고 및 귀국 인사차 윤보선 대통령을 예방한 모습. ⓒ연합뉴스

진압 막은 윤보선…'박통 18년'의 길이 열리다

프레시안 : "올 것이 왔다"(혹은 "온다던 것이 왔구나")는 윤보선 대통령의 말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서중석 : 박정희 소장하고 유원식 대령, 그리고 현석호 국방부 장관 등이 쿠데타 당일 청와대에 갔다. (독재의 상징이던 이승만 대통령이 쫓겨난 후 경무대는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1989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윤보선 회고에 따르면, 박정희 소장과 유원식 대령 등은 오전 9시 무렵 청와대에 와서 오전 9시 30분경 떠났다. <편집자>) 현 장관은 군에 잡혀 끌려간 것 같다. 윤보선은 거기서 "올 것이 왔다"고 하면서 장면 정부를 비판했다. 이 "올 것이 왔다"를 가지고 윤보선하고 다른 쪽하고 해석을 달리하는데, 대부분은 이걸 쿠데타를 인정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어쨌건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를 막기 위한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이것과 관련해 또 오랫동안 논쟁이 된 것이 있다. 유원식이 자기 회고록 등을 통해 '내가 이미 윤 대통령과 내통하고 있었다'고 한 대목이다. 사실 유원식 대령이 아무리 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공로자라고 하더라도 박정희와 함께 청와대에 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유원식은 아나키스트이자 임시정부 국무위원이던 유림의 아들이다. 유림은 아들이 일본 군인(만주군)이라고 해서, 귀국한 후 한 번도 자식을 안 본 걸로 돼 있다. 성격도 참 대단한 양반이다. 그러나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은 유원식을 알고 지낸 걸로 돼 있다. 그 유원식이 '윤보선으로부터 거사 자금까지 받으려고 했다'고 하는 식으로 윤보선과 맺은 관계를 많이 써 놨다. 물론 윤보선은 전면 부인했다.

현석호는 그날 그 청와대 자리에서 두 사람 사이가 이상한 것 같다고 써 놨다. 아마 윤보선도 쿠데타의 낌새 정도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유원식이 얘기하는 것처럼 그런 거래까지 있었다는 건 믿을 수 없다고 본다.

프레시안 :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 진압을 막았다. 이는 쿠데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과 마찬가지로 윤 대통령은 쿠데타 세력의 헌정 파괴, '헌법 죽이기'에 힘을 실어줬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서중석 : 윤보선은 (박정희와 유원식을 만난 후) 매그루더 미 8군 사령관하고 마샬 그린 대리 대사를 만났다. 존 F. 케네디 정부가 주한 미국 대사를 새로 임명했는데 아직 부임하지 않아 그린이 대리 대사로 있었다. 매그루더와 그린이 찾아가서 '쿠데타군 숫자가 3600명밖에 안 되니까 철수하게 해야겠다'고 했다. (쿠데타군의 10배를 동원해 서울을 포위하면 쿠데타 세력이 항복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편집자>) 윤보선이 '그렇게 하라'고 얘기했으면, 쿠데타 세력의 정권 장악을 막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 군끼리 유혈 사태가 일어나서 되겠는가', 이렇게 나왔다. 이건 간단하다. 쿠데타를 막기 위한 조처를 취할 수는 없다는 건데, 그건 지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군 일부, 특히 이한림 제1군 사령관 등이 이 쿠데타를 진압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1961년 5월 17일 이한림 장군은 통고문을 받았다. 윤보선 대통령이 비서관들을 군 사령부 및 각 군단 사령부에 파견했다. 군 일부에서 쿠데타군을 진압하려고 막 출동하려던 때였는데, 윤보선이 보낸 공한(公翰)의 내용은 간단하다. '국군끼리 충돌과 출혈을 하지 말라.' 장면이 없으니 군이 지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윤보선인데, 윤보선이 이렇게 나오니 어떻게 하겠나. 출동하려다 주춤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17일 그날 이한림은 만주군관학교 동기 동창인 박정희한테 두 손 들어버렸다. 쿠데타를 묵인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오후 7시쯤인데, 그때는 쿠데타가 성공한 것이다. '군에서 더 이상 큰 저항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이다. (이한림은 그다음 날인 18일 이른 오전 체포돼 서울로 끌려갔다. <편집자>)

군에서 저항을 못 하게 만든 또 하나의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윤보선이었다. 그 점에서, 아무리 나중에 변명을 많이 하더라도 박정희의 쿠데타가 성공하는 데 윤보선이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마흔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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