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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재산 헌납' 삼성 약속은 왜 물거품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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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재산 헌납' 삼성 약속은 왜 물거품이 됐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0> 5.16쿠데타, 아홉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5.16쿠데타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5.16쿠데타, 첫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연재는 왜 그 신문에서 사라졌나

[5.16쿠데타, 두 번째 마당] 오랜 꿈 이룬 '박통'…대한민국은 짓밟혔다

[5.16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는 왜 한국인의 '노예근성'을 주목했나

[5.16쿠데타, 네 번째 마당] 청와대·참모총장의 위험한 선택…헌법은 죽었다

[5.16쿠데타, 다섯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 미국이 개의치 않은 이유

[5.16쿠데타, 여섯 번째 마당] 정치 깡패 이정재는 진정 죽어 마땅했나

[5.16쿠데타, 일곱 번째 마당] 나라 구한 박정희? 장준하는 왜 그리 판단했나

[5.16쿠데타, 여덟 번째 마당] 청와대 '부정 선거' 앞잡이, 정보부…어쩌다?

프레시안 : 5.16쿠데타 세력은 악습을 타파하겠다며 재건 국민 운동을 전개했다.

서중석 : 최고회의를 최고 통치 기관으로 한 군사 정권에서 첫 번째 중요 활동으로 내건 것이 재건 국민 운동이다. 그건 이들의 정치 이념으로도 볼 수 있고, 5.16쿠데타를 왜 일으켰느냐에 대해 '우리가 이런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재건국민운동본부도 최고회의의 6개 직속 기관 중 하나였다. 1961년 6월 10일 중앙정보부법을 공포하면서, 유진오를 본부장으로 해서 재건국민운동본부도 바로 만들어냈다. 그러니까 굉장히 빨리, 쿠데타 정권이 '우리는 이렇게 하겠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기구가 이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재건 국민 운동에 관한 법률을 보면, 이 운동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잘 드러나 있다. "전 국민이 청신한 기풍을 배양하고 신생활 체제를 견지하며 반공 이념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이렇게 돼 있다. 그 첫 번째로 용공 중립 사상의 배격을, 두 번째로 내핍 생활을 들고 있다. 국민 체위 향상도 마지막 번에 들어 있다. 그런 다각도 활동을 하는데 그야말로 국민 운동을 벌이겠다는 걸로 이야기할 수 있다.

재건 국민 운동과 관련해 논란이 좀 됐다. 우리가 중학교 때 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 하라고 한 재건 체조를 열심히 했는데, 한 신문이 사설에서 이건 일제 말기의 라디오 보건 체조를 그대로 본뜬 것이 아니냐고 꼬집었다. 신생활복(재건복)은 일제 말의 국민복을 그대로 본뜬 것이고, <재건순보(再建旬報)>라는 건 일제 말의 <주보>를 연상하게 하고, 국민 가요는 말 그대로 일제 말의 국민 가요를 연상케 한다면서 이 신문은 '너무 창의성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만큼 이 사람들이 아는 게 일제 말의 그런 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여성에게 신생활복을 입게 했는데, 이건 일종의 '몸뻬'라고 볼 수 있다. '몸뻬'라는 말을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고 세상에 이런 옷을 입느냐고 하겠지만, 그 당시 여성 신생활복 사진을 한 번 봐라. 사실은 ‘일류 여고’라고 불리던 아무개 여고의 교복도 다 '몸뻬' 스타일이었다. 저 '몸뻬' 스타일이 언제, 어떻게 생긴 건지, 그때 서울에 와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난 참 궁금하게 여겼다. 이건 일본 에도 시대(도쿠가와 바쿠후 시대, 1603∼1867. <편집자>)에 농촌 노동복이었는데, 일제 말 전시 체제에서 근로 동원에 편리한 활동복으로 입게 했다. 노동을 시키는 데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방공 연습용 비상복으로도 이게 좋다고 해서 이런 옷을 입게 했다.

프레시안 : 이 시기 사진을 보면 쿠데타 세력이 여배우들을 동원해 거리에서 재건 국민 운동을 홍보하는 모습도 나온다. 그만큼 집중적으로, 그리고 대대적으로 펼친 건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서중석 : 그렇다. 재건국민운동본부 조직이 1961년 6월 발표될 때 서울특별시와 각 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구, 군, 시, 읍, 면, 동, 통, 반에도 지구(地區)재건운동촉진회 등 각 기관을 둔다고 돼 있었다. 그러니 얼마나 방대한 것을 꿈꾸고 있었던 건가. 일제 말 조선방공협회와 비슷하게 규모가 엄청난 거대 기구였던 것이다. 이것 자체가 전체주의 냄새가 나는 것 아니냐, 군인들이니까 이런 짓을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듣고 그랬다.

(1962년에는) 50만 명이나 되는 요원이 있고 360만 명이나 되는 청년·부녀회원을 가지고 있다고 돼 있었다. 이승만 정권 초기에 국민회를 비롯한 여러 조직을 만들면서 이승만이 총재를 하고 그러지 않았나. 파시즘적인 두령 조직이라고 내가 책에서 썼는데, 그것과 비슷한 새로운 조직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걸 액면 그대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정치 조직으로 이용하려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다. 그 당시 군정 하에서는 정치 활동이 전부 금지돼 정치 단체도 있을 수가 없지 않았나. (1961년 5월 22일, 최고회의는 23일을 기해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를 해체한다고 발표했다. <편집자>) 그러나 민주공화당은 이미 중앙정보부 밀실에서 사전 조직되고 있었다. 이렇게 방대한 재건국민운동본부와 그 지부도 정치 조직으로 바뀔 것이라고 본 것이다,

특히 유달영 서울대 농대 교수가 1961년 9월 새 본부장으로 취임하면서 중앙위원회 위원들을 임명하는데, '중앙위원의 3분의 1 정도를 구(舊)정치인 중에서 선정할 것이다'라고 한때 보도됐다. 그래서 '이건 뭐냐', 이런 비난을 아주 많이 들었다. 나중에 자유당 구정치인 상당수가 공화당으로 가게 되는데, 하여튼 이것이 정치 조직화할 것이라는 우려를 계속 낳고 있었다.

당시 정치 활동을 1963년 정초부터 허용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걸 반년 넘게 앞두고 있던 1962년 5월 초에 최고회의는 이미 360만 명을 확보하고 있는 청년회, 부녀회를 배가하라는 지시 각서를 재건국민운동본부에 냈다. 뭣 때문에 이러느냐 해서 이런 것도 정치 세력화 문제 또는 정치 조직화에 이용당하는 것과 관련 있다는 비판을 계속해서 받았다. 재건운동국민본부는 나중에 김종필하고 대립하던 오월동지회라는 다른 정치 조직에 잠식된다. 하여튼 이렇게 군인들이 생각한 건 권력이었다.

▲ 1961년 6월 19일, 재건 국민 운동 부산 시민 대회에 참석한 박정희 소장. ⓒ연합뉴스

일제 말 전시 체제 떠오르게 만든 재건 국민 운동

프레시안 : 쿠데타 세력이 스스로 내세운 '혁명 공약'을 잘 이행했는지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중 하나가 경제 문제다.

서중석 : 쿠데타 세력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한다는 걸 '혁명 공약'의 하나로 내세우지 않았나. 그런 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쿠데타 세력의 대표적인 경제 정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농어촌 고리채 정리라는 것이다. 그만큼 빨랐다. 1961년 5월 25일에 이미 농어촌 고리채 정리령을 발표했다. 적어도 김종필 같은 쿠데타 주동자들이 '쿠데타에 성공하면 뭘 할 것인가'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재건 국민 운동 같은 것하고 농어촌 고리채 정리를 하자는 것 아니었겠나.

당시 빈농들은 봄만 되면 춘궁기에 굉장히 어렵게 살았다. 사채 금리가 100퍼센트를 넘을 정도로 높았다. 이건 5.16쿠데타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니다. 1950년대 전쟁기 때부터 이미 있었던 현상이다. 그래서 조봉암의 진보당도 '집권하면 농어촌 고리채 정리를 하겠다'는 것을 중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자유당 역시 '우리도 농어촌 고리채 정리를 어떤 식으로든 하겠다'는 걸 여러 번 내걸기는 한다. 그러나 제대로 시행하려는 의지를 자유당이 보이지는 않았다. 민주당 정부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5.16쿠데타 정권은 5월 25일에 바로 정리령을 냈으니까 굉장히 의욕적으로 이 문제에 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리채 정리령의 핵심은 연 이율 2할(20퍼센트)을 초과하는 채무에 대한 채권 행사를 다 정지한 것이다. 이건 그 당시 채무의 거의 전부라도 해도 좋다. 특별한 경우를 빼놓고는 연 2할 이하는 없던 때였다. 그런 다음에 고리채를 농어민들이 신고하면 관계 기관에서 심사해 일정한 기간 동안 변제 정리를 하게 하는 방식으로 처리하겠다는 것이었다. (1961년 6월 10일 공포된 농어촌 고리채 정리법에서는 고리채의 기준이 연 이율 20퍼센트에서 12퍼센트로 낮아진다. <편집자>) 그러나 고리채 정리 사업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도 이야기한 것처럼, 의욕은 대단히 강했으나 제대로 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프레시안 : 왜 그렇게 됐나.

서중석 : 고리채를 얻어 쓰지 않으면 안 되는 농촌 현실을 외면한 채 고리채 정리 사업을 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건 농업 정책이라든가 금융 정책을 개혁하면서 고리채를 신고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농업 정책이나 금융 정책으로 뒷받침하지는 않으면서 '우선 고리채를 신고해라. 빚 갚는 부담을 덜어주겠다', 이렇게 한 것이었다.

빚을 얻어 쓴 농민들로선 당장은 좋았다. 그렇지만 조금 지나자 문제가 생겼다. 정부가 농민을 위한 어떤 금융 정책을 쓴 것도, 새로운 곡가 정책을 쓴 것도 아니어서 농민은 아주 빈곤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빚을 얻어 써야 하는데 빚을 내기가 어려웠다. 이제는 빚을 안 주는 것이다. 그러면 농민들은 굶어 죽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건데, 그런 상태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빚을 다시 얻어 쓸 수밖에 없는 역효과를 크게 낳은 건 물론이고 농촌 사회를 아주 불신 사회로 만드는 식이 돼버렸다.

군사 정부가 농민에게 융자해줄 의도나 능력이 없으면서 갑자기 고리채 정리령을 내린 것이다. 외국 농산물 수입이라든가 저곡가 정책을 전반적으로 전환하고 새로운 중농 정책을 써야만 고리채 정리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다. 농촌이 변하는 건 저곡가 정책이 이중 곡가제로 바뀌어 정착하는 1970년대에 가서다. 그전엔 농촌 사회가 참 힘들었다. (이중 곡가제는 정부가 쌀을 비롯한 곡식을 시장 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수매한 다음 시중에는 그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한 제도다. 이는 1970년대 농촌 소득 증대에 도움이 됐다. 그러나 1970년대 농촌에서는 소득보다 빚이 더 빠르게 늘었다. 1970년부터 1980년까지 호당 농가 소득은 약 10.5배로 늘었지만, 빚은 약 21배로 증가했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 낳은 고리채 정리 사업

프레시안 : 의도와 달리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온 셈이다.

서중석 : 그렇다. 결과적으로 안 하느니만 못한 꼴이 되지 않았느냐, 농촌을 불신 사회로 만들어 빚을 얻어 쓰기가 더 어렵게 만든 것 아니냐는 비판을 1961년, 1962년에 무수히 들었다. 당국자들도 이걸 시인하고 그랬다.

또 하나의 경제 정책이자 정치 문제이기도 했던 것이 바로 부정 축재자 처리 문제였다. 4월혁명이 성공하면서 이 문제가 강하게 제기됐다. 장면 정부가 다른 '혁명 입법'에도 소홀했고 부정 선거 원흉 처단 같은 것도 철저하게 했다고 볼 수가 없지만, 이 부정 축재자 처리에는 사실 힘을 제대로 못 썼다.

그런데 쿠데타 정권은 '우리는 부정 축재자 처리를 잘해보겠다'고 아주 강하게 주장했다. 1961년 5월 28일 최고회의는 부정 축재 처리 대상이 누구다 하는 명단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그 대상자들을 구속했다. 최고 재벌이라고 하던 이병철(당시 삼성물산 사장)은 일본에 있다가 그해 6월 26일 귀국하게 된다. 이병철은 '국가에 전 재산을 바치겠다'는 각서를 박정희 의장에게 보냈다. 삼호 재벌 총수 정재호를 비롯해 부정 축재자로 구속된 다른 재벌 총수들도 거기에 따라서 했다. 전 재산을 헌납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병철은 귀국 직후 호텔에 연금됐다. 6월 27일 박정희 의장을 만난 이병철은 기업주 중 1등부터 12등까지를 부정 축재자로 추려 그들만 구속한 건 잘못이라고 말했다. 노력했기 때문에 12등 안에 든 것이며, 잡아가려면 기업인을 모두 잡아가야 공평한 일이라는 주장이었다. 세금을 내는 기업인을 다 처벌하면 경제를 할 사람이 없어진다는 이야기도 했다. 이병철의 호텔 연금은 4일 만에 풀렸고, 감옥에 있던 다른 부정 축재 기업주들도 석방됐다. 힘으로 권력을 잡은 쿠데타 세력이 부정 축재를 한 기업주들을 엄벌하는 대신, 권력 유지와 경제 성장을 위해 재벌과 결탁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풀려난 부정 축재 기업주들은 7월 17일 경제재건촉진회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8월 16일 한국경제인협회로 이름을 바꾼 이 단체가 오늘날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초대 회장 이병철)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장면 정권과 마찬가지로 쿠데타 세력도 부정 축재자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다. 전 재산 헌납 약속도 물론 이행되지 않았다.

서중석 : 이것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다. 부정 축재 처리 위원회는 6월 30일, 재산 헌납 각서와 그 재산 목록을 제출하면 즉시 구속을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8월 2일에는 일반 기업주 부정 축재자 58명에 대한 심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병철 240억 환, 정재호 100억 환, 이런 식으로 해서 총 831억2400만 환의 부정 축재액을 대상자들에게 통보했다. 이게 좀 많다고 생각했는지 그 후 반절 정도로 줄였다. 8월 13일, 부정 축재 처리 위원회는 일반 기업주 부정 축재자 27명의 부정 축재액을 477억1000만 환으로 확정했다고 발표했다. 이 중 이병철의 몫은 103억400만 환으로 줄어들었다. (1961년 12월 31일 <동아일보>는 이병철에게 통고된 부정 축재 최종 확정 금액이 80억 환으로 줄었다고 보도했다. <편집자>)

부정 축재 처리 문제는 10월에 들어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최고회의 공보실에서 '부정 축재 처리 위원회에 문제가 있어서 관계자들을 상당수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이유는 뭐냐 하면, 설경동(대한방직)이라든가 이양구(동양시멘트) 같은 사람들을 이 위원회에서 봐줬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걸 함경도계와 영남계의 권력 싸움으로 해석했다. 당시 월남한 사람들이 재계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많이 있었다. 최고회의 내에도 함경도파라고 불리던 함경도 출신이 많았다. 함경도 재벌과 함께 영남 재벌이 당시 기업계를 좌지우지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때 구속된 부정 축재 처리 위원회 조사단원들은 함경도 쪽이었다. 이 조치를 계기로 한국 기업은 영남 기업 중심으로 편성된다고 보고 있다.

1961년 10월 26일에는 부정 축재 처리법 중 개정 법률이라는 것을 공포하게 되는데 이게 실질적으로 부정 축재 처리의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대상자들이 공장을 건설해 그 주식을 납부하면 부정 축재 통고액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건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정부가 보증해가지고 차관을 도입해 공장을 건설하게 해서 그 주식으로 납부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1950년대식 재벌들이 새로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이것이 하나의 전기를 이루고 기폭제가 됐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수입 무역상에 지나지 않던 기업인들이 세계 산업 자본들과 거래를 안 할 수가 없게 됐고, 직접적인 플랜트 거래도 하게 되는 것이다. 국내 어떤 다른 기업들보다 새로운 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여건을 마련해준 것이다.

물론 1950년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재벌은 탈락했다. 그러나 이걸 전기로 영남 재벌 중심으로 새로운 재벌들이 생겨나게 된다. 이 재벌들은, 그전에도 그랬지만 정경유착이 아주 심하고 문어발식 경영, 족벌 경영을 하는 특색을 점차 갖게 된다. 부정 축재자 처리 문제가 이러한 새로운 재벌 탄생의 계기가 됐다고들 이야기한다.

▲ 2013년 초 공연 장소 문제 등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연극 '한강의 기적 - 박정희와 이병철, 정주영'은 박근혜 대통령의 모교인 서강대로 장소를 옮겨 상연됐다. 사진은 2013년 2월 19일, 서강대 캠퍼스에 걸린 연극 현수막 앞으로 학생들이 지나가는 모습. ⓒ연합뉴스

용두사미로 끝난 부정 축재자 처리, 재벌 지형도를 바꾸다

프레시안 : 이 시기 경제를 뒤흔든 또 하나의 사건이 바로 화폐 개혁이다.

서중석 : 고리채 정리, 부정 축재자 처리와 함께 5.16쿠데타 세력의 대표적인 경제 정책이 화폐 개혁이다. 일제 때는 조선은행에서 엔화를 찍어냈다. 그 엔 화폐가 해방 직후 몇 년간 통용됐다. 당장 새로운 걸 만들어낼 여건이 안 됐던가 보더라. 그러다가 우리 화폐로 바뀌지만 이름 자체는 엔하고 똑같은 한문을 쓰는 원(圓)이었다. 이 원을 1953년 2월 100분의 1로 평가 절하를 했다(100원->1환). 그래서 우리 꼬맹이 때는 환이라는 말을 더 많이 들었고 더 정답다. 100환짜리가 빨강색이었는데 좋았다. 그건 우리한테는 정말 큰돈이었다. 10환짜리도 있었다.

그것을 1962년 6월 9일 최고회의에서 10분의 1로 평가 절하를 해서 다시 원화, 이제는 한글로 쓰는 원,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쓰는 돈으로 화폐 개혁을 한 것이다(10환->1원). 최고회의에서 6월 9일 심야에 갑자기 '10일부터 환화 유통에 의한 거래를 금지하고 새 원화로 교환해준다', 이렇게 얘기했다. 그러면서 일정한 액수 이상은, 예금이 대부분 여기 포함될 텐데, 교환해주지 않고 동결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게 유명한 1962년 6월의 화폐 개혁이다.

이 화폐 개혁은 경제를 요동치게 하고 혼란에 빠지게 하는 데 대단히 큰 역할을 했다. 이게 아주 중요하다. 장면 정권은 경제 정책에서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없다. 거듭 강조하지만 장면 정부만 해도 조금은 경제를 알고 있었는데, 군인들은 경제가 어떤 것인지를 잘 몰랐다. 군인 식으로만 사고한 것이다.

화폐 개혁 발표가 나오자 상점은 물론 술집도 문을 닫아 하루벌이로 사는 사람은 쌀을 살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경제 혼란이 극심했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그랬다. 중소기업도 죽을 맛이었다. 예컨대 산하에 1만7000개의 잡다한 공장이 있던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는 화폐 개혁을 발표한 6월 9일의 가동을 100으로 한다면 19일에는 가동률이 45퍼센트밖에 안 된다고 했다. 교환 쪽에만 큰 혼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제조 쪽에도 엄청난 축소를 가져온 것이다. 무역협회에서는 수출입 업자의 자금 동결 해제 또는 봉쇄 자금을 담보로 전액 융자하는 등의 정책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하고 나왔다.

프레시안 : 화폐 개혁 직후인 1961년 6월 13일 <동아일보>에 실린 '통화 개혁은 이렇게 꾸며졌다'라는 기사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6.10 경제 혁명은 그 기밀이 완전히 보장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5.16 군사 혁명보다도 몇 갑절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는 구절이다. 정보가 샌 5.16쿠데타와 달리 화폐 개혁은 보안이 철저했다는 이야기인데, 그 과정을 살피면 이를 긍정적으로만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주먹구구식 화폐 개혁이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서중석 : 화폐 개혁을 할 때 군인들이 얼마만큼 철통같은 보안을 유지했느냐 하면 경제기획원 장관도, 한국은행 총재도 모르게 진행했고 미국에도 48시간 전에야 통고한 걸로 돼 있다. 문제는 이것이다. 보안이 철저한 것이 중요할지 모르지만 도대체 경제기획원 장관, 한은 총재도 모르는 화폐 개혁을 했다면 사실상 군인들 몇 사람이 한 것 아닌가. 박정희, 그리고 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으로서 박정희와 함께 이걸 주도한 유원식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경제에 어두웠는가, 경제에 대해 초보적 수준의 이해에 머물렀는가를 화폐 개혁을 통해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미국은 크게 실망하면서 박 정권이 경제 정책에 아주 무능하다고 봤다.

(쿠데타 세력은 화폐 개혁도 군대식으로 밀어붙였다. 자신들이 원하는 밑그림부터 그린 다음 일부 전문가들에게 그 밑그림에 맞는 방안을 은밀히 만들게 했다. 발표 직전에야 통화 개혁 사실을 들은 한국은행 총재는 "통화 개혁의 각종 발표문이 한국은행 총재 이름으로 나가야 할 텐데 나 자신이 이번 통화 개혁에 있어서 일언반구 사전 통고조차 받지 못했으니 나는 허수아비 총재가 아니냐"고 항의했다. <편집자>)

결국 화폐 개혁을 한 지 불과 33일 만인 7월 13일, 예금 동결을 사실상 해제해버렸다. 화폐 개혁을 하나 마나 한 꼴이 된 건데, 한 신문에서는 이렇게 썼다. "이른바 경제통이니 하여, '통'으로 자처하는 그런 자들의 신중치 못한 태도가 나라의 대사를 그릇 이끄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렇게 일침을 가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귀가 더 널리 트여야겠다", 이렇게 얘기했다.

군인들 몇몇이 경제기획원 장관도, 한국은행 총재도 모르게 자기들끼리 해버린 건데 그건 좋게 해석하면 산업화를 위해 내자(內資)를 동원하고자 그런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게 안 되니까 외자(外資) 동원 쪽으로 방향을 바꿔 차관을 들여오는 데 더 집중하게 됐다고들 이야기한다.

내자 동원의 구체적인 목표가 중국인, 그러니까 화교라는 소문이 그 당시에 돌았다. 화교는 지독하게 사람들을 믿지 않아 한국의 은행에는 저금을 안 한다, 마누라도 모르게 베개 밑에 돈을 숨겨놓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 '화교들이 집 안 깊숙이 숨겨둔 환화를 꺼내놓게 하는 길은 바로 화폐 개혁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군인들이 아주 손쉬운 착상을 한 것이다.

▲ 1962년 6월 10일, 전격적으로 단행된 화폐 개혁에 따라 줄을 서서 화폐를 교환하는 시민들. ⓒ연합뉴스

한은 총재도, 경제기획원 장관도 몰랐던 화폐 개혁

프레시안 : 화교는 한국에서 적잖은 시련을 겪었다.

서중석 : 근래 나온 어떤 글을 보니 중국인이 한국에 와서 3번 크게 당했다고 한다. 전 세계에서 중국인이 쫓겨나다시피 한 지역은 한국을 빼놓고는 아주 드물다고 하고, 유대인도 못 들어와 사는 데는 한국밖에 없다고들 하지 않나. 그만큼 한국인의 배타성이 강하다고들 한다. 첫 번째 크게 당한 것은 1930년대 초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 평양, 인천, 서울 등에서 화교들이 많이 습격당한 것이다. 이때 많이 죽었다. 일본인의 이간 작전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다고 어떤 논문에서 지적하고 있지만, 어쨌건 한국인들이 순식간에 이런 난동을 피운 것이다. 배타적인 짓을 화교들한테 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많은 한국인이 농토를 잃고 만주로 이주했다. 일본은 이러한 한국인 농민들과 현지 농민들의 갈등을 부추겨 이를 중국 침략의 빌미로 삼으려 했다. 중국은 한국인 농민들을 일본 침략의 앞잡이로 여기며 경계했다. 그러던 중, 1931년 7월 중국 만주 만보산 일대에서 한국인 농민들과 중국인 농민들이 충돌했다. 일본은 만보산 사건에 관한 허위 과장 정보를 한국인 기자에게 흘렸다. 이것이 <조선일보> 호외 등에 실리면서 곳곳에서 반중국인 폭동이 일어났다. <편집자>)

두 번째가 이 화폐 개혁 때 중국인들이 당했다고 한다. 세 번째가 1970년대에 화교들이 우리나라를 많이 떠나는데, 그때도 많이 당했다고 한다. 과세를 많이 당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화교들은 1990년대 중후반 무렵부터 다시 돌아오게 된다. 사람은 자기가 태어난 땅을 잊지 못하는 법이다. 화교들도 압박 때문에 한국을 떠나야 했지만, 그 압박이 이제는 없다 싶으니까 다시 한국에 돌아와 사업을 하고 그런 것이다. (이승만 집권기도 화교들에겐 만만찮은 시절이었다. 1953년 화폐 개혁, 그리고 중국 음식점에 불리한 세율을 적용한 조치 등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들어서는 1962년 화폐 개혁과 함께 1961년 시행된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법이 화교를 옥죈 대표적인 조치로 꼽힌다. <편집자>)

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미국이 방해해 화폐 개혁이 실패했다고 보기도 한다.

서중석 : 그런 것이 없지 않아 있다. 미국은 엄청나게 화를 냈다. 그러면서 한국의 경제 정책에 상당 기간 잘 협조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이 더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 (통화 개혁 직후 유원식은 주한 미국 대사가 "그 시기가 가장 적절했다"며 통화 개혁에 찬성하는 뜻을 표명했다고 밝혔다.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자 주한 미국 대사관은 10일 바로 반박 성명을 냈다. "미국 정부는 통화 개혁에 관해 7일 오후 박정희 의장이 대사에게 알려줬을 때 처음 알았다", "대사는 찬성이나 반대를 한 바가 없고 그 시기에 관해서도 논평한 바 없다"는 것이다. <편집자>)

사실 박정희 정권이 화폐 개혁을 한 이유 중 하나는 통화 남발로 통화 발행고가 너무 높아 그걸 흡수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그런데 화폐 정책에 미국이 협조하지 않으면서 외환 보유액이 급속히 줄어들게 된다고들 이야기하지 않나. 화폐 개혁 이후 미국의 협조를 잘 얻지 못해 경제에 어려움이 쌓인 건 틀림없다.

프레시안 : 미국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만, 화폐 개혁의 경우 쿠데타 세력이 경제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밀어붙인 게 큰 문제로 보인다.

서중석 : 그렇다. 그게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경제 자체가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을 모르고 군인 식으로 사고한 것이다. '베개 밑에 있다는 중국인 돈도 끌어내고 은행에 있는 자금도 동결해 산업 자금으로 가게 하면 될 것 아니냐. 그러면 통화 증발도 막을 수 있고, 그러면서 산업 자본화해 경제를 발전시킬 것이다', 이렇게 했는데 당장 거래가 다 끊겨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과거에 50환을 받고 팔던 물건을 똑같이 50원을 받고 팔려고 했다. 10분의 1로 평가 절하를 했는데도 그랬다. 인플레이션도 막 일어나고, 공장도 아주 힘들어졌다. 워낙 돈 사정이 좋지 않아 중소기업 중에는 하루 벌어 하루 경영하던 곳도 많던 때인데, 그런 데는 다 죽는 것이었다. 돈이 안 돌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제에서 장면 정권보다 훨씬 죽을 쒔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쉰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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