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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거듭 구한 은인, 제대로 뒤통수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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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정희 거듭 구한 은인, 제대로 뒤통수 맞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1> 5.16쿠데타, 열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5.16쿠데타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5.16쿠데타, 첫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연재는 왜 그 신문에서 사라졌나

[5.16쿠데타, 두 번째 마당] 오랜 꿈 이룬 '박통'…대한민국은 짓밟혔다

[5.16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는 왜 한국인의 '노예근성'을 주목했나

[5.16쿠데타, 네 번째 마당] 청와대·참모총장의 위험한 선택…헌법은 죽었다

[5.16쿠데타, 다섯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 미국이 개의치 않은 이유

[5.16쿠데타, 여섯 번째 마당] 정치 깡패 이정재는 진정 죽어 마땅했나

[5.16쿠데타, 일곱 번째 마당] 나라 구한 박정희? 장준하는 왜 그리 판단했나

[5.16쿠데타, 여덟 번째 마당] 청와대 '부정 선거' 앞잡이, 정보부…어쩌다?

[5.16쿠데타, 아홉 번째 마당] '전 재산 헌납' 삼성 약속은 왜 물거품이 됐나

프레시안 : 5.16쿠데타 세력은 4월혁명 후 활발하게 전개되던 통일 운동,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운동, 노동 운동 등에 철퇴를 가했다.

서중석 : 쿠데타 정권의 정책 실패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경제 정책이라고 본다면, 쿠데타 정권의 반혁명적 성격을 제일 잘 보여주는 것이 반혁명 사건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반혁명 사건은 5.16쿠데타의 존재 이유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 좌익 혐의를 받는 사람들을 검거했다. 쿠데타가 난 지 일주일도 안 돼 2014명을 검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3500명이 되고 하는 식으로 그 숫자가 더 늘어난다. '앞으로 반혁명적인 큰 사건이 일어나면 비판적인 세력은 조심해야 한다', 이게 이런 일 때문에 생긴 것이다. 여차하면 잡혀 들어가서 되게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61년 6월 22일, 최고회의는 특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라는 걸 소급 입법했다. 이 특별법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조항이 바로 제6조다. 제6조는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가 반국가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는 행위를 하면 사형, 무기 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그걸 가지고 혁신계, 한국전쟁 전후 피학살자 유족회 등을 잡아들이고 중형을 선고했다. 반국가 단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는 행위로 몰아붙여서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를 처형한 것이다. (이 특별법은 3년 6개월까지 소급 적용하도록 규정돼 있었다. 5.16쿠데타 세력은 같은 해 7월 3일 반공법도 만들었다. 박정희 정권은 눈에 거슬리는 이들을 탄압할 때 국가보안법과 함께 반공법을 애용했다. <편집자>)

이런 것을 가지고 '혁명 재판부'는 <민족일보> 사건에서 사장인 조용수와 송지영, 안신규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상두에게는 징역 15년형, 양수정과 이건호에게는 구형량보다 많은 징역 10년형을 부과했다. (이날 법정의 풍경을 1961년 8월 28일 자 <경향신문>은 이렇게 전했다. "법정 안은 온통 울부짖음에 싸여 재판장의 주문이 들리지 않았다." 그 후 송지영과 안신규는 무기 징역으로 감형됐다. <편집자>) 통일사회당으로는 윤길중에게 15년형을 내리는 것을 비롯해 김성숙, 이동화, 정화암 등에게도 중형을 내렸다. 혁신당에 대해서는 79세 장건상한테 5년형을 내리고, 사회대중당의 김달호에게도 15년형을 내렸다. 교원 노조 간부들에게도 중형을 선고했다. 이수병과 류근일이 15년형을 받는 등 학생들에게도 중형이 선고됐다.

프레시안 : '5.16은 4.19의 계승'이라는 주장을 다시 한 번 무색하게 하는 대목이다.

서중석 : 5.16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나 김종필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민족주의자라고 주장했다. 혁신계의 이른바 '특수 반국가 행위'에 대한 처벌 같은 것을 보면, 과연 그렇게 볼 수 있나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든다. 분단국가에서 제일 중요한 민족주의 활동은 통일 운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통일 운동 세력을 아주 철저히 처단한 것이 바로 이 '혁명 재판소'다. 그 가운데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독립 운동을 했던 분들도 여러 명 포함돼 있다. 장건상과 김성숙, 이분들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다. 이런 혁신계, 진보적인 학생들, 노동 운동을 한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교원 노조에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들여 중형을 내린 것은 5.16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더 기가 막힌 건 특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으로 처벌한 죄목이 크게 6개인데 밀수, 부정 선거, 조직 폭력 등도 여기에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통일 운동, 학살 진상 규명 운동 등을 특수 반국가 행위로 처벌한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그런 운동들을 부정 선거, 밀수 등과 같이 취급한다는 것도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독립 운동을 하고 통일 운동을 한 사람들에게 특수 반국가 행위자라는 딱지를 붙인 건, 정말 국가라는 게 뭐냐 하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독립과 분단 해소에 헌신한 이들을 범죄자 취급한 나라

프레시안 : 부정 선거를 일삼고 국민을 학살한 이들보다 통일 운동, 학살 진상 규명 운동, 노동 운동 등을 한 사람들을 훨씬 가혹하게 처벌한 것도 문제다.

서중석 : 몇 가지를 통해 5.16쿠데타 세력의 성격을 더 확연하게 이야기할 수가 있다. 소위 '혁명 재판'으로 처단된 사람들에는 부정 선거 원흉이라든가 1960년 4월 19일 경무대 앞 학살 관련자 등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혁명 검찰부'에서 수리한 사건을 보면 특수 반국가 행위 사건은 225건, 608명이다. 주로 혁신계와 유족회를 겨냥한 건데, '혁명 검찰부'에서 수리한 사건의 전체 인원 1474명의 41.3퍼센트나 차지하고 있다. 반면 3.15 부정 선거 원흉들은 163건, 363명으로 그 수가 훨씬 적은 것을 볼 수 있다. 또 '혁명 재판소'에서 처리한 것을 보더라도 부정 선거 원흉은 69명이 유기 징역을 받았고 4명이 무기 징역, 6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특수 반국가 행위자로 지목된 이들은 통일 운동을 했다는 등의 죄목으로 125명이 유기 징역을 받았다. 69명의 거의 두 배다. 그리고 3명이 무기 징역, 5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문제는 이렇게 형을 받은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후 이 사람들을 처리한 것을 보면, 부정 선거 원흉이나 경무대 앞 발포 사건 관련자 등은 석방이 빨랐는데 혁신 세력은 석방이 거의 안 됐다.

예컨대 1962년 12월 24일에 자유당에서 이기붕 다음 가는 간부였던 이재학(전 국회 부의장)이라든가 신현확 전 장관 등이 가석방된다. 1963년 5.16 특사로 자유당 중요 간부이던 임철호나 송인상 장관도 석방되고 그 뒤에 홍진기 내무부 장관도 석방된다. 이런 식으로 자유당 관련자들은 부정 선거 원흉이건 발포 사건 핵심 인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이건 거의 다 석방된다. 이와 달리 혁신계 대다수는, 학생들을 빼놓고는, 거의 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 (특수 반국가 행위 사건에 엮인 이들 중 상당수는 1968년에 가서야 풀려났다. <편집자>) 학생들은 15년형을 받은 이수병과 류근일, 이 두 사람을 빼놓고는 자유당 간부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장관들이 석방될 때 대개 풀려났다.

프레시안 : 이수병과 류근일은 그 후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이수병은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엮여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두 개의 대법원 판결'을 이야기해 큰 논란을 일으켰던 바로 그 사건이다. 이와 달리 1961년 서울대 민통련 대의원 총회 의장을 맡았던 류근일은 7년여의 수감 생활 후 <조선일보>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살아갔다.

서중석 : 맞다. 이수병 이 양반은 1975년에 처형을 당했다. 류근일도 그런 경력 때문에 민청학련 사건에 다시 걸리기도 했는데, 억울하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그런 생각이 들 만했다. (류근일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구속됐다. <편집자>) 사실 군사 정권은 꼭 몇 사람을 희생양으로 죽이거나 남겨놓고는 했다. 혁신계 중 많은 사람이 1968년 또는 그 이후까지 감옥소에 있고 그랬다. 학생 같은 경우 이수병하고 류근일이 중형을 받고 감옥소에 남았는데,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군사 정권은 본보기로 사형에 처하기도 했지만, 또 본보기로 일부를 감옥소에 남겨두기도 했다.

프레시안 : 쿠데타 세력이 처형한 이들의 면면에서도 형평성 문제가 드러난다.

서중석 : 군사 정권이 '혁명 재판' 같은 걸로 죽인 사람 중 이야기가 많이 되는 게 조용수, 최백근, 최인규,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 이렇게 6명이라고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여기서 끈 떨어지고 힘없는 처지가 된 세 사람, 즉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를 빼면 조용수, 최백근, 최인규 셋이 남는다. 혁신계로 두 명이나 처형을 당한 것이다.

최인규는 혁신계를 두 명이나 희생양으로 처형하는 마당에 자유당 간부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장관들 중 부정 선거 또는 발포 명령을 비롯한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최소한 한 명은 처형한다는 것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본다. 최인규의 경우도 과연 이게 법치주의에 맞게 처형된 것인가, 그렇지 않고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처리된 건가 하는 부분을 생각해봐야 한다.

왜 그러냐 하면, 조용수라든가 수많은 혁신계 인사를 보면 나중에 재심을 청구해 다시 재판을 받은 경우 다 무죄 판결을 받는 걸 볼 수 있다. 예컨대 사형당한 조용수, 이 사람은 2008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특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은 소급효 금지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고 또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라는 이유로 처벌하는 것은 차별 금지 원칙에 위배되며 반국가 단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했다고 볼 수 없어 무죄다'라고 판결했다. 이것 말고도 법원에서 수많은 재심 판결을 했는데, 다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제6조와 관련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전부 정치적인 재판이었다는 게 2000년대 들어 법원에 의해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 이 사람들의 경우 재심 청구를 했다는 이야기를 지금까지도 못 들었다.

▲ 학살 문제는 극우 반공 세력의 아킬레스건이다. 그들은 학살의 진실이 드러나는 걸 원치 않았다. 5.16쿠데타 이후 '제2의 학살'이 벌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집단 학살이 자행됐던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에서 발굴된 두개골. 대부분의 두개골에 구멍이 나 있다. ⓒ연합뉴스

쿠데타 세력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제2의 학살

프레시안 : 5.16쿠데타 후 민간인 학살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일까지 일어났다.

서중석 : 이런 사건 못지않게 쿠데타 세력의 성격을 확연하게 알 수 있는 것이 피학살자 유족회 문제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주민 집단 학살로 수많은 사람이 학살을 당했는데, 4월혁명 이후 거창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유족회를 만들지 않았나. 그때 경상도를 중심으로 해서 유족회가 참 많이 생겼다. 수십 군데 있었다. 그런데 5.16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주민 집단 학살 사건의 진상 규명, 명예 회복 운동을 펼친 사람들이 전부 혹독한 탄압을 받는다. 유족회 관계자들은 대거 구속됐다. 그러면서 거창, 김해, 진영, 제주 등 여러 지역의 피학살자 합동 분묘를 파헤치는 걸 볼 수 있다. 그 안에 있는 유골 상자를 부수고, 정으로 비석을 쪼아서 버려버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래서 제2의 학살이라고 부른다. '경상남북도 피학살자 유족회' 이원식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노현섭은 무기 징역을 받고 그랬다. 많은 유족회 관계자들이 재판에서 징역형을 받았다. 그리고 학살을 주도하거나 그 학살에 가담했던 군인, 경찰들에게 '혁명 재판'에서 면죄부를 명백히 부여한다. 그런 것을 통해 쿠데타 세력이 학살에 가담한 군인, 경찰들과 동류의식을 보여준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는다.

제2의 학살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줬다. 혁신계에 대한 대량 재판과 처단은 혁신계를 전멸시키다시피 했다. 그래서 진보 세력이 새로 정치 세력화하는 것은 1987년 6월항쟁 이후부터이고, 2000년대에 와서야 의회에 여러 사람이 진출하는 모습을 보인다. 진보 정치 세력이 수십 년간 공백으로 남게 되고 그 대신에 학생들이 들고일어나는, 그래서 학생운동이 30년간 계속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나라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혁신계와 피학살자 유족회에 대한 단죄는 피해 대중의 공포와 피해 의식, 무력감을 상기시키고 증폭해서 현대사 그리고 학살 사건 등에 대한 무지와 왜곡의 상태를 심화했다. 주민 집단 학살을 당연시하고 정당화하게 만들었다. 5.16쿠데타가 일어난 후 30년 가까이 유족들은 또다시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입을 열지를 않았다. 이런 공포 상황에서 그 자식들은 자기 부모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또 연좌제에 묶여 온갖 피해와 설움을 당해야 했다.

유족회 사건 피해자 중 재심 청구를 한 사람들은 다 무죄 선고를 받았다. 예컨대 '경주 지구 피학살자 유족회' 김하종은 '혁명 재판'이라는 데에서 7년형을 받았다. 그러나 2011년 대법원은 '군사 재판 판결문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조사 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보니 원심 판결과 같이 범죄 사실의 증명이 없으므로 무죄 판결을 원심 그대로 유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21세기 들어 각종 과거사 위원회가 생기고 거기서 진상 규명을 하게 돼서 이런 판결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30년 이상 극단적인 반공 체제를 유지하는 데 혁신계 단죄, 유족회 단죄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가, 그런 것들을 통해 5.16 주체 세력이라는 사람들의 성격을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잘 들여다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볼 수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표적으로 전락한 장면, 토사구팽 당한 장도영과 육사 5기

프레시안 : 이른바 반혁명 사건의 주요 표적 중 하나는 장면 전 총리였다.

서중석 : '혁명 재판'이 다룬 사건 중 특기할 만한 것으로 장면 전 총리에 대한 단죄를 들 수 있다. 1961년 7월 4일 최고회의는 "그동안 불철주야 민주당 정부 요인들의 용공 음모를 예의 수사하여 오던 바 그 천인공노할 진상이 역력히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그들은 이 권력을 역이용하여 이 나라를 공산화할 무서운 용공 음모에 가담하여 왔었다", 이렇게 단죄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1962년 12월호 <최고회의보>에 '장면 정부는 국민 주권을 유린하고 반민주적 소위(所爲, 행위)를 감행한 자, 민주적 국시를 반역하여 조국을 공산 괴뢰 집단에 넘겨주고자 한 반국가 행위자로 심판하고 있다'고 했다. 도대체 이런 식으로 장면 정권을 단죄한다는 건, 쿠데타를 합리화하려 한다고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심해도 보통 심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수사해도 책잡을 만한 게 없어서, 결국 장면 내각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나중에 석방했다.

장면은 구민주당 사건뿐만 아니라 이주당 사건이라는 이상한 사건에 또 걸려들었다. 입법, 사법, 행정, 경제 이 네 가지가 분립해야 한다는 4권 분립제를 주장하는 이주당이라는 것과 관련 있다는 것이었다. 장면 총리의 미국인 고문이던 도널드 휘태커가 이쪽하고 손잡고 뭔가를 일으키려 했다, 이렇게 돼 있다. (중앙정보부 서정순 차장은 1962년 6월 17일, 이주당 관련자들이 '혁명 정부' 요인을 암살해 쿠데타로 군사 정부를 전복한 후 4권 분립 국가를 만들려 했다고 발표했다. <편집자>) 그래서 10년형을 받았는데, 구속 수감 48일 만에 보석 형식으로 출감은 됐다. (장면은 1962년 8월 28일 무기 징역 구형과 함께 법정 구속돼 서울교도소에 수감됐다. 9월 27일 육군본부 계엄 보통군법회의는 장면에게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수감 48일 만인 10월 15일 장면은 보석 형식으로 석방됐다. <편집자>) 장면은 그 후 몇 년 안 가서 사거했다. 얼마나 울분이 쌓였겠나.

프레시안 : 반혁명 사건에는 장면 정권을 겨냥한 것뿐만 아니라 군인들 간의 치열한 권력 다툼에서 비롯한 것들도 여럿 있다. 그 결과, 쿠데타 세력이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장도영은 물론 쿠데타의 주역 중 상당수가 권력에서 밀려난다.

서중석 : 제일 대표적인 반혁명 사건은 장도영 사건이다. 쿠데타에 반대한 세력, 쿠데타 관련 정보를 누설한 자들, 쿠데타군을 진압하려 한 사람들도 다 반혁명 사건으로 처단되지만 역시 장도영 중장 등의 반혁명 사건이 당시에도 제일 화제가 됐다.

장도영은 5.16쿠데타가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애매한 입장을 취하면서 나중에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계엄 사령관이 되고, 군사혁명위원회가 생겼을 때 그 의장이 되고, 최고회의가 만들어졌을 때 그 의장이 되고 해가지고 '혁명'을 합리화하고 성공시키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긴 했다.

그런데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장도영이 과연 오래가겠는가 하는 이야기가 이미 나돌았다. 최고회의 관계법이 발표된 1961년 6월 6일 그날부터 불과 며칠 사이에 장도영은 이미 무력한 존재가 돼버린다. 제일 힘 있는 게 육군 참모총장과 계엄 사령관, 이 자리인데 이것도 내놓게 되고 국방부 장관 자리도 송요찬한테 넘겨주게 된다. 남은 것은 최고회의 의장하고 내각 수반인데, 내각 수반은 하나 마나 한 자리였다. 또 장도영이 최고회의 의장이긴 했지만, 박정희가 최고회의 상임위원장을 맡았기 때문에 사실상 실권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최고회의 의장과 내각 수반에서 물러난다고 7월 3일에 발표가 났다. 그런 지 1주일도 안 된 7월 9일, 장도영 등 44명의 장교를 문초하고 있다고 신문에 보도됐다.

이 44명에는 장도영 같은 유명한 사람만 들어간 것이 아니다. 최고회의에서 실력자라고 봤던 사람들도 상당히 들어갔다. 예컨대 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장을 맡았던 송찬호 준장, 공수특전단 부단장이던 김제민 중령, 최고회의 감찰위원장을 지낸 최재명 대령, 헌병감이던 문재준 대령, 공수특전단장 박치옥 대령 같은 사람도 들어갔다. 쿠데타군이 한강 인도교에 왔을 때 그걸 막았던 방자명 헌병 중령도 포함됐다. 여러 계열 사람들이 들어가 있는데, 특히 주목받은 건 5.16쿠데타 때 군을 이끌고 온 사람들이 대개 이때 잡혀 들어갔다는 점이다. 포병을 이끌고 온 문재준, 공수특전단을 이끈 박치옥 같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사건은 장도영을 완전히 거세한 사건으로도 유명하지만, 육사 5기와 육사 8기의 권력 쟁탈전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많다. 군대를 끌고 온 쪽(5기)과 5.16쿠데타를 기획한 사람들(8기)이 싸웠는데, 전자가 패배했다는 것이다.

이때 양쪽을 대표한 사람은 한쪽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고 다른 쪽은 헌병감 문재준인데, 김형욱 회고록 같은 걸 읽어보면 문재준과 김종필의 치열한 싸움, 부대도 막 동원하려고 한 싸움이 아주 리얼하게 나온다. 1961년 7월 17일 <뉴스위크>에는 이렇게 났다. "오늘날 혁명 동지들 사이의 우애는 사라졌다. 권총을 휴대한 최고회의 소속 장교들은 서로 의심스런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지프차를 몰고 거리를 질주하는가 하면 언론에 대하여 입을 여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김재춘 회고록 같은 걸 보면, 그 이후에도 중앙정보부장 문제 등 여러 문제가 있을 때 무장 대결과 비슷한 것이 일어나는 걸 엿볼 수 있다. 권총을 찬 30대들이 대결하는 장면이 여러 군데 나온다.

프레시안 : 권총을 찬 군인들의 권력 쟁탈전, 이것이 혁명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진짜 얼굴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건, 장도영은 자신이 여러 차례 큰 은혜를 베풀었던 박정희에게 뒤통수를 세게 맞은 셈이다.

서중석 : 장도영 사건에서 또 하나 관심을 끄는 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이 사건에 관해 증언했다는 것이다. 장도영을 유죄로 만든 가장 큰 건 5.16쿠데타 전에 양다리를 걸쳤다는 것, 5월 15일과 5월 16일 가장 긴박한 순간에 양다리를 걸쳤다는 것인데 그걸 주로 증언하는 것이 바로 박정희 의장이었다. 법정에 직접 나온 건 아니고 서면으로 증언했다.

예컨대 박정희 의장의 증언에 의하면, 1961년 4월 10일경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계획안 같은 걸 박정희가 보여줬는데 장도영은 동조하는 듯하다가 또 반대도 하는 것 같고 태도가 분명치 않았다고 한다. 손잡고 하자고 하면 반대할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태도가 불분명했다는 이야기를 이 4월 10일 사례는 물론 다른 예를 통해 증언했다.

장도영은 박정희의 이런 증언이 맞지 않다고 회고록에 쓰면서 박정희를 비난했다. 그렇지만 재판을 받을 때 장도영 심리는 어땠을까. 특히 박정희 의장이 서면 증언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자신의 행위에 대해 직접 증언하는 걸 볼 때 어땠을까. '도대체 이렇게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 있느냐', 이런 생각을 했는지 '권력의 속성이라는 것이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을 했는지 알 수는 없다. '박정희라는 사람을 내가 잘 몰랐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권력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는 사람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 장도영 중장(왼쪽)과 박정희 소장. ⓒ연합뉴스

장도영 뒤통수친 박정희…권력 앞에선 은인도, 동지도 없었다

프레시안 : 군인들의 반혁명 사건은 그 후에도 계속된다.

서중석 : 유명한 사건이 또 하나 있다. 민정 이양기에 큰 사건이 빈발할 때인 1963년 3월, 이때는 중앙정보부장이 김재춘이었는데, 전 최고회의 외무국방위원장으로 한때 실세로 불렸던 김동하가 구속됐다. 김동하는 1960년 4.19 전에 박정희와 쿠데타를 모의할 때 박정희 다음가는 중심인물이었다. 그런 김동하가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혁명 검찰부장'으로서 피고들에게 그렇게 무섭게 하던 박창암도 구속됐다. 박임항 건설부 장관도, 이규광 전 육군 헌병감도 구속됐다. 이규광 이 사람은 나중에 전두환 정권 때 이름이 널리 알려진다. (전두환의 처삼촌인 이규광은 1982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이철희·장영자 사기 사건에 연루됐다. 장영자는 이규광의 처제다. <편집자>) 김윤근 해병대 소장, 최주종 소장도 걸려들었다. 최주종도 4.19 직전에 같이 쿠데타를 모의한 사람이다. 어쨌든 김윤근까지 연루됨으로써 쿠데타 때 군대를 이끌고 온 사람은 거의 전부 쫓겨나게 됐다.

이 사건은 '김종필이 민주공화당을 사전 조직했을 뿐만 아니라 이원 조직했다. 우리에게 참여하라고 했지만 우리를 바지저고리로 만든 것 아니냐'고 특히 김동하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서 얼마 후 일어난 사건이다. 반김종필파에 대한 거세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때 반김종필파는 반박정희파라고도 볼 수 있다. 민정에 어떤 식으로 참여하느냐와 연관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함경도 출신 군인들, 이 사람들을 당시 알래스카 세력이라고 불렀는데 이 알래스카 세력이 정일권 정도를 빼놓고는 제거됐다. 알래스카 세력이라는 게 참 이상한 말이긴 한데, 당시 그렇게 불렸다. 박창암 등은 재판을 받을 때 "붓은 칼보다 강하다", "이 사건은 조작된 것이다"라고 소리 지르고 그랬다. 그렇지만 정치적 사건이라는 게 어떻게 된다는 건 박창암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사람 아니었나.

박정희에 대한 진짜 쿠데타 사건은 원충연 사건이 유일하다고 보고 있다. 1965년 5월에 일어난 사건이다. 5.16쿠데타 세력이 주장한 '혁명 이념'에 공명해 쿠데타에 참여했는데, 가만히 보니까 쿠데타 세력의 부정부패가 아주 심할 뿐만 아니라 처음에 주장했던 것하고 너무나 다르다고 해서 실제로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다. 발각돼서 원충연과 박인도, 두 대령은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나중에 무기 징역으로 감형됐다. (원충연은 5.16쿠데타 직후 최고회의 공보실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체포된 후 원충연은 "4대 의혹 사건, 3분 폭리 사건 등 부정부패가 꼬리를 잇는데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 거사를 꾸몄다"고 말했다. 1967년 무기 징역으로, 1969년 다시 징역 15년으로 형이 줄었다. <편집자>) 이 사건 하나를 빼놓고 나머지는 다 권력 쟁탈전으로 볼 수밖에 없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쉰두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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