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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 세월호처럼 표류하다 끝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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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우리 아이들, 세월호처럼 표류하다 끝날 수 있다" [민들레 교육 칼럼] '다 팔아먹는' 세상일지라도
가만히 있으라!

한국 사회는 사회구성원들에게 '비겁'을 종용하는 사회다. 웬만큼 의식 있고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비겁해지지 않기가 힘들다.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또는 더 큰 밥그릇을 차지하기 위해 기자들은 기레기(쓰레기 같은 기자)가 되어 보도지침을 따르고, 교사는 교장과 교육부 공문에 순응해야 한다. 학교, 병원, 기업, 언론, 정부 시스템 어디에 몸을 담고 있든 눈치 보면서 알아서 기어야 자리보전을 하고 승진도 할 수 있다.

지난 5월 17일 KBS 기자들이 선언했다. 더 이상 '기레기'로 살지 않겠다고. 앞서 13일에는 교사 43명이 자신들의 실명을 걸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책임을 묻는 교사선언을 청와대 게시판에 올렸다. 이어서 15일 스승의 날에는 1만5853명의 교사들이 대통령의 무한 책임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교사선언에는 전교조 소속 교사들뿐만 아니라, 일반 교사들도 상당수 참여하고 있다.

수백 명의 제자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때 교사들이 신분의 위협을 무릅쓰고 정부와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것은 교육자로서 용기 있는 행동이다. 사회의 근간이 흔들리는 이때 미래세대를 책임지고 있는 교육자로서 양심에 따른 행동이며 이 나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본권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데 교육부는 이를 지지하지는 못할지언정 징계를 운운하고 있다. 교육부가 교사들을 위한 조직도, 학생들을 위한 조직도, 심지어 교육을 위한 조직도 아니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 단원고 2학년 6반 故 김동협 군이 세월호 침몰 당시 남긴 영상 갈무리. ⓒ세월호가족대책위원회

세월호 침몰 일주일 뒤 교육부는 전국의 초·중·고 학교에 긴급 공문을 보냈다. "세월호 사고와 관련하여 SNS상에 악성 댓글이나 유언비어 유포 시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을 수 있음을 학생들에게 안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종례 시 안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의 형과 언니, 친구들을 잃게 만든 죄를 엎드려 사죄해도 부족할 판에 아이들을 협박하려 드는 교육부는 대체 뭐하는 곳인가. 몇백 명의 아이들을 바닷속에 수장시킨 것도 모자라 수장당한 친구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아이들을 위협하기까지 하다니.

그 일주일 뒤에는 전국 시·도교육청을 통해 각 학교로 또 한 장의 공문이 내려왔다. "전 국민적 추모 분위기 속에 공무원(교사)들이 집회에 참여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므로 각급 기관(학교)장께서는 소속 공무원(교사)들의 복무관리에 철저를 기하여 주시기 바라며, 관할기관(학교)에 전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수백 명의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화면으로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교사들더러 교육부는 그렇게 계속 가만히 있으라고 요구한다.

무엇이 두려운가. 아이들에게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을 갖게 해서 미래의 유권자들이 자신들에게 등을 돌리게 될까 봐 두려운가. 교사들이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이 사회가 얼마나 부실한지, 어른 행세하는 이들의 본색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어른들에 대한 신뢰가 배반당한 아이들이 가슴 깊이 품고 있을 배신감과 당혹감, 분노를 표출할 수 있도록 그냥 좀 놔두면 안 되겠는가.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할 줄 아는 사람으로 기르는 것이 제대로 된 교육이 아닐까. 책임을 질 줄 아는 이라면 분노해야 할 때 마땅히 분노할 줄 알고, 자신이 분노의 대상이 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마땅히 분노할 권리가 있는 유일한 이들이 아이들이다. 이들의 분노를 기성세대는 마땅히 감수해야 한다. 이 아이들의 가슴속에 타고 있는 분노의 불꽃이야말로 희망이다. 이 뻔뻔한 어른들에게 분노할 줄 아는 아이들이 새로운 사회의 씨앗이다. 발뺌과 책임 떠넘기기에 여념이 없는 후안무치한 이들에 대한 분노 없이 서둘러 반성하고 치유하고 봉합하려 들지 말자.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아이들과 교사들, 부모들이 늘어나는 만큼 세상은 바뀔 것이다. 세상이 좀 시끄러워지겠지만 정적 속에서 죽어가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분노의 불씨를 꺼트리지 말자.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를 소리 없이 외치면서 비겁해지려는 마음,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추슬러보자. 비겁함도 습성이다. 습성을 고치는 방법은 그와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다. 하고 또 하다 보면 새로운 습성이 생겨난다. 용기도 습성이다. 용기도 내어본 사람이 더 잘 낸다. 더 이상 비겁해지지 말고, 시스템 탓하지 말고, 기자다운 기자, 교사다운 교사, 선장다운 선장, 부모다운 부모가 되어보자. 그런 어른다운 어른들을 보고 자라야 아이들도 진짜 어른이 될 수 있다.

다판다!

세모그룹 계열사 '다판다'가 상징하는 바가 있다. 돈이 된다면 뭐든 팔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합작하여 빚은 참사가 세월호 참사다. 양심도 팔고, 구원도 팔고,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 팔아먹는 사람들이 이 참사의 뒷전에 있다. 그리고 그 뒷전에는 잇속에 눈이 멀어 낡아빠진 배를 운항할 수 있도록 허가해주고, 승객과 화물을 더 싣기 위해 제멋대로 배를 뜯어고치는 것을 눈감아주면서 국가의 녹까지 받아먹는 이들이 있다. 구명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서 골프장을 짓느라 수백억 원의 예산을 쓰는 조직이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 사고가 참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고가 참사로 이어지는 과정을 전 국민이 몇 시간, 며칠에 걸쳐 실시간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보여준 무능과 무책임에 다들 어안이 벙벙해 이것이 우리 사회의 현 수준임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가 타고 있는 대한민국호가 또 다른 세월호나 다름없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 배의 선장과 선원들도 여차하면 먼저 탈출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도. 이 배가 그들에게는 그저 돈벌이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승객들이 화들짝 놀라 움직이기 시작하자 '눈물쇼'까지 펼치면서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들을 다시 주저앉히기에 바쁘다.

이대로 가다간 한국호 역시 가라앉게 될 것이다. 구제금융 사태 때 이미 배가 기울기 시작했지만 땜질 처방으로 일관했다. 구제금융이라는 국가 위기를 우리는 삶의 방향 전환을 도모할 기회로 삼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는 신자유주의에 편승하여 벤처광풍을 일으키고 카드론을 남발하면서 문제를 덮어버렸다. 국민소득 2만 불을 외치며 한미 FTA를 밀어붙인 노무현 정부도 그 연장선에 있었고, '대한민국 CEO'를 자처한 이명박 전 대통령과 '제2의 새마을운동'을 내세운 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지면서 이 사회는 점점 속이 곪아 왔다. 십 년의 기회를 가졌던 민주정부조차 힘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않았고, 경제민주화는 공염불이 되어가고 있다. 성장제일주의에 사로잡혀 사람이 뒷전으로 밀려난 세월이 지난 반세기였다.

'다판다' 정신에 투철한 이는 세모그룹의 유병언만이 아니다. "바이(Buy) 코리아!"를 외친 이명박이 그러했고, '사죄의 눈물쇼'를 한 뒤 곧장 원전 세일즈를 하러 중동으로 날아간 박근혜 대통령 역시 그러하다. 대통령으로서 국부를 키우기 위해 상중에도 애쓰는 모습을 보이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이 정녕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는 걸까? 그 또한 '쇼'였다면 차라리 나으련만, 그 길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는 믿음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그 몽매함에 앞이 캄캄할 따름이다.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지상명령에 따라 수완을 발휘하는 데 귀재가 된 사람들이 갖은 편법과 불법을 일삼으며, 이익을 추구하는 동안 대한민국 호는 하자 투성이 배가 된 채 기우뚱거리며 오늘도 험한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1등실 승객들은 언제든 탈출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승객들은 3등실에서 구명조끼조차 없이 생명을 하늘에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이 대한민국 호에서 한시바삐 탈출하는 길이 아이를 살리는 길이 아닐까 고민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달리 갈 곳이라도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능력 있는 이들은 일찌감치 아이들을 빼돌렸고, 남아 있는 이들끼리 가위바위보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질세라 너도나도 선행학습을 시키지만 애써 서로를 힘들게 만들 따름이다.

지금 학교에 있는 아이들 중 대다수는 머지않은 미래에 이 사회의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입시공부만 하면 구조될 수 있을 것처럼 어른들은 떠들고 있지만, 그것이 거짓말임이 드러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기껏 몇 년이다. 사태를 먼저 파악한 이들이 솔직히 말해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구조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다 인생이 끝날 수 있음을. 아이들의 인생을 부모나 교사가 다 책임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아이들이 자기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도록 가르치는 일은 제대로 해야 한다. 세상을 제대로 보게 하고, 자기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알게 할 책임이 교사와 부모들에게 있다. 그리고 아이들과 부모들, 교사들의 삶을 갉아먹는 교육시스템을 더 이상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방치하고 있을 뿐이다.

▲ 서울 광화문 광장 사거리 횡당보도 인근에서 '아직 밝혀진 것 하나 없다'는 문구가 적힌 손피켓을 들고 있는 한 시민의 모습. ⓒ프레시안(최형락)

그래서?

세월호 전과 후의 우리 사회가 다를 것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희망'을 담은 말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쉬 바뀌지 않는다. 언론 방송은 과연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기레기가 되지 않겠다는 기자들의 선언이 무색하게도 공중파 방송은 여전히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채 유병언 검거작전 보도에 열을 올리고 있다.(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으로 의심되는 사체가 7월 22일 전남 순천 송치재 인근 매실밭에서 발견됐다. 수사 당국은 현재, 사체의 DNA 검사 등 추가 감식을 하고 있다. 편집자) 뻔뻔함과 탐욕스러움의 상징 같은 존재이지만 유씨는 사고의 일차적 책임자일 뿐이다. 사고의 원인 제공자는 그 말고도 수없이 많고, 정작 사고를 참사로 만든 책임자들은 따로 있다. 그 최고 책임자는 '국가 개조' 같은 거창한 수사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할 따름이다.
이렇게 무책임한 지도자와 여당을 국민들의 절반이 그래도 좋다 한다. 악어의 눈물 한 방울에도 감동하는 순진한 이들은 자기 발등 찍는 줄 모르고 투표지에 도장을 찍는다. 악어인 줄 알면서도 악어 편에 서야 악어 이빨 새에 낀 먹이 한 점이라도 더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하는 이들은 눈을 질끈 감거나 한쪽 눈만 뜬 채 도장을 누를 것이다. 이 사회의 미래보다 내일의 아파트값이 더 걱정되는 것이 이 나라 중산층의 한계인 걸까. 과연 이 사회는 달라질 수 있을까.

지금은 곁에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부모들이 다시금 공부하라고 아이들을 닦달하게 될 날은 언제일까. 교사들은 또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더 이상 승진 점수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아이들 편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교사들이 얼마나 늘어날까. 정부의 책임을 묻듯이 교사들 자신의 책임을 묻는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정부의 지침대로 아이들을 교육해 온 자신들이 기레기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인정하는 교사들이 얼마나 될까.

처절하게 인정하는 딱 그만큼 변화의 가능성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인간의 마음은 연약해서 쉬 흔들리고 정신은 허약해서 쉬 자기합리화를 하고 망각에 빠진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냉정한 현실이라면, 변화의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그 과정을 제대로 밟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이라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무엇이 아니라 내가 몸담은 바로 이곳이다. 이곳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바꾸는 것이 우선이다. 나의 세상은 나 대신 그 누구도 바꿔줄 수 없다. 발 딛고 선 자리에서 기자는 기자답게, 교사는 교사답게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 '다움'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여기에 지성이 요구된다. 교사다운 교사, 부모다운 부모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그 앎을 행동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용기도 필요하다.

지성과 용기. 쉽지 않은 덕목이다. 이 과정을 홀로 감당하기보다는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필요하다. 약한 마음을 다잡고 허약한 정신을 벼리는 작업을 함께 해나가자. 함께 공부하고 함께 도모하고, 서로를 북돋우면서 한 발 한 발 나아가보자. 우리가 피부로 경험하는 세상은 바로 그런 이웃들이기에, 어떤 의미에서 내가 바뀐 그만큼 세상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아직 까마득한 길이 앞에 펼쳐져 있지만, 한 걸음 속에 천리 길이 이미 녹아 있음을 깨우치면 천리 길도 멀지 않게 느껴진다. 좋은 길동무가 있으면 멀고 험한 길도 즐거운 여행길이 될 수 있다.

* 대안교육 격월간지 <민들레> 93호 "잊을 수 없는, 세월"에 실린 글을 재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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