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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왜 'A급 전범' 아베 외조부에게 훈장 안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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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왜 'A급 전범' 아베 외조부에게 훈장 안겼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61> 제3공화국의 탄생, 여덟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일곱 번째 이야기 주제는 제3공화국의 탄생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1963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가까스로 윤보선을 눌렀다. 표차는 15만여 표에 불과했다. 이 선거에서 박정희가 승리한 원인에 대해 그간 적잖은 연구가 이뤄졌다. 이와 관련, 도시에서는 윤보선이 전반적으로 승리했지만 일부 지식층은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박정희에게 호감을 보였다는 시각도 있다.

서중석 : 이 선거에 대해 여러 면에서 평가하고 있는데, 하나하나 짚어보자. 잘못 알려진 것도 많다. 도시에서는 윤보선이 전반적으로 승리했지만 일부 지식층은 박정희의 민족주의 강조에 호감을 보였다는 시각도 있다고 물었는데, 이 부분은 박정희를 평가하는 데 아주 중요하고 논쟁거리가 많은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선거에 크게 영향을 주진 않았지만 이 선거에서 일부 지식인이 박정희를 민족주의자로 보게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박정희 전집, 연설문 선집 같은 걸 읽어보면 자주, 민족 이런 말이 참 자주 등장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래서 일부 정치학자들은 박정희를 민족주의자라고 보고 있다. 이 선거에서 윤보선을 사대주의자로 부각한 게 표에는 큰 영향을 안 줬다고 하더라도 일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끼친 건 인정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좀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가 윤보선을 사대주의자로 모는데, 예컨대 군정 4년 연장 이야기가 나왔던 1963년 3.16 성명 후 윤보선이 시청 앞에서 데모한 걸 가지고 얘기하는 것 아닌가. 이걸 그다음에도 계속 써먹는다. 그런데 여기서 박정희의 패턴을 하나 볼 수 있다. 18년간 계속 그런 패턴을 보인다고 난 생각한다. 윤보선이나 허정이 산보('산책 데모')라는 것을 하면서 주장했던 것은 '군정을 연장하려는 박정희를 지지해선 안 된다.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선 박정희를 군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해 1963년 2.18 민정 불참 성명, 2.27 선서에 충실하게 해야 한다는 걸 미국에 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국민한테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시위를 한 것이다.

그러니까 '박정희가 탄압하는 민주주의, 인권에 관심을 가져라', 이렇게 미국에 촉구하는 것을 박정희는 계속 사대라고 부른 것이다. 김영삼이 10.26 직전에 '미국은 박 대통령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고 얘기한 것에 대해서도 박정희 쪽에서 아주 심하게 몰아세우지 않나. 김영삼을 사대주의자로 몰아버렸다. 김영삼을 의원직에서 제명할 때도, 읽어보면 그렇다. 18년간 나타나는 패턴으로 보이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 : 역대 대통령 중 박정희는 이승만과 더불어 미국에 당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서중석 : 이 점과 관련해 나는 박정희가 윤보선 등 야당을 사대주의자라고 공격하고 자신을 자주적인 사람, 민족 이념을 가진 이로 자주 언급해 민족주의자라는 인상을 주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정책,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을 폈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박정희가 윤보선이나 장면보다 행동으로 훨씬 더 친미 반공주의자라는 걸 보여주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혁신계를 탄압하고 철저히 배제한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윤보선이나 장면은 엄두도 못 냈다. 혁신계를 미워한 건 사실이고, 제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 사람들은 그렇게 하더라도 민주주의, 합법적 방법을 가지고 해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장면 정권이 <민족일보> 같은 것에 대해 했던 것처럼 혁신계에 대한 약간의 압력은 있었지만, 그 이상을 하진 않았다. 그렇게 하려는 생각을 갖지도 못했다. 그런데 알다시피 혁신계는 4월혁명이 열어놓은 공간에서 외세로부터 자주와 민족을 내세우고 통일 운동을 폈는데, 5.16쿠데타 세력이 이걸 무자비하게 제거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이 박정희를 신임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 1963년 3월 20일 '산책 데모'에 나선 윤보선(앞줄 왼쪽 2번째)과 허정(앞줄 왼쪽). ⓒ연합뉴스


박정희=민족주의자? 장면·윤보선보다 훨씬 더 친미 반공에 충실

프레시안 : 이 무렵 미군 범죄 문제가 부각되면서 논란이 됐다. 이는 민족과 자주를 이야기한 박정희 세력을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서중석 : 박정희 쿠데타 정권 때 일어난 일인데, 1962년 1월 파주 임진강 북쪽에서 미군이 나무꾼 2명을 사살했다. 카빈총도 아닌 엽총으로 한국인을 사살했다. 5월엔 기지촌 여성이 윤간을 당하고 머리를 깎였다. 이런 인권 유린 사태가 연달아 그 시기에 일어났다. 그야말로 자주성 문제를 시험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파주 나무꾼 피살 사건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미군 범죄 중 하나로 꼽힌다. 1962년 1월 6일 미군은 땔감을 구하러 온 주민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1명이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나고, 중상을 입은 다른 1명도 치료 중 사망했다. 미군 당국은 비무장지대에 들어온 나무꾼들이 정지 명령을 어기고 도망가다가 사살됐다고 발표했다. 미군 발표는 사실과 달랐다. 사건 발생 지역은 비무장지대가 아니었고, 미군은 군용 무기가 아니라 엽총으로 사냥하듯이 사격했으며, 한 피해자는 옷이 벗겨진 상태에서 여러 발을 맞은 사실이 2월에 드러났다. 그러나 미군은 배상금 지불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편집자>)

프레시안 : 이런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자 대학생들이 들고일어났다. 5.16쿠데타 후 1년여 만에 처음으로 벌어진 시위였다.

서중석 : 6월 6일 고려대 학생 수천 명이 자신들은 반미, 반정부가 아니라고 하면서 시위를 했다. 반미, 반정부면 큰일 나기 때문이었다. 그 시위에서 한미행정협정을 체결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16명이 구속됐다. 이틀 후인 6월 8일, 서울대에서도 1000여 명이 결의문을 낭독하고 시위를 했다. 결의문을 보면 "우리는 주권국의 정당한 권리를 끝까지 사수한다"고 돼 있다. 선언문은 "대한민국은 주권 국가다"로 시작하고 있다. 한마디로 군사 정권이 주권 국가로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있느냐를 꼬집은 것이다. 6월 9일엔 대구대에서도 시위가 일어나고 그랬다.

군사 정권에서는 이런 시위가 외국인의 투자 의욕을 떨어뜨려 한국의 국가 이익을 포기하는 행위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6월 14일에 김낙중을 주모자로 한 학생 간첩단 6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한다. 이들이 학생 시위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김낙중은 서울대도 다니고 고려대도 다니고 북한에도 갔다 왔는데, 북한이 이들한테 방송 같은 걸 통해 지령을 내렸다는 주장이다. 미제 만행을 폭로하는 반미 시위를 일으키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또 서울대에서 시위가 있은 후 서울대 부근에 바로 불온 삐라가 돌았다. '양키의 야수적인 만행을 배격한다' 등 강경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걸 누가 뿌렸겠나. 김낙중은 굉장한 고문을 당했고 처음엔 사형이 구형됐다. (1962년 11월 7일, 서울 지구 보통군법회의는 사형이 구형된 김낙중에게 무기 징역을 선고했다. <편집자>) 나중에 상당히 시일이 지난 다음에 형이 대폭 줄긴 했다.

그 당시 대학생들은 이런 사태를 보고 '반미 시위로 보이면 이렇게 엄청난 보복을 당하는 것이구나'라고 여겼다. 1962년 시위에 참여한 이 사람들이 1964년 서울대 문리대 시위도 주도했는데 이렇게 얘기하더라. "한일 회담 반대 시위 같은 걸 할 때엔 상당히 신중했다." 미국 문제를 당연히 건드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한일 회담 문제에 미국이 깊이 개입했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 아니었나. 그런데도 얘기를 못했다고 하더라.

대륙 침략한 일본 우익은 친한파, 한국 독재 비판하면 반한파?

프레시안 : 이승만 집권기는 물론 박정희 정권 때도 미국 비판은 금기로 여겨졌다. 이런 분위기는 1980년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바뀐다.

서중석 : 박정희 정권의 다른 측면을 보면, 예컨대 노동 운동을 보더라도 '노사가 평등해야 한다. 사용자에게 종속되지 않고 어느 정도 노동자들이 자주성을 가지고 노사 협의를 해야 한다', 이런 것들도 아주 강하게 탄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5.16쿠데타 후에도 그렇고 1970년대에도 이런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 박정희 정권은 어떤 단체든, 예컨대 교사 단체건 경제 단체건 다른 사회 단체건 권력으로부터 자율성을 갖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오로지 박정희 정권을 추종하고 그 명령에 따르는 것만 인정했다.

우리나라에서 자주, 민족 문제가 나올 때 가장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은 누가 봐도 친일파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한 번이라도 친일파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나? 박정희 자신의 얘기이기도 할 테니까 안 했겠지만, 그래도 1962년에 나온 <우리 민족의 나갈 길>에선 내 생각엔 독립 운동도 언급해줘야 하는 것이고 그 반대편에 있는 친일파도 언급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양자에 대해 한마디도 안 하고 있다. 역사를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고 식민 사관도 언급하고 있는데도 그랬다. 이승만을 직접 비판하는 이야기도 별로 안 하지만, 어쨌건 참 놀라운 현상이 그 책에서 많이 보인다.

프레시안 : 박정희 세력은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꿈꿨던 일본 우익과 친밀하게 지냈다.

서중석 : 자주나 민족은 우리 근현대사에선 일본, 미국과 연관되는 게 가장 크고 많다. 그런데 일본과 관련해 박정희 정권 18년간 친한파, 반한파가 어떻게 사용됐나? 이것도 자주 문제와 관련해 검토해야 한다.

친한파라는 게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해 대륙 침략에 앞장섰던 그자들이다. 이들은 5.16쿠데타 직후부터 박정희 정권을 적극 지원하고 관련을 맺는다. 마지막 유신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1978년 12월에도 기시 노부스케 등 12명만 참석한다. (이때 어떤 나라에서도 공식 축하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기시 노부스케 일행도 일본의 공식 사절단은 아니었다. <편집자>) 이 사람들은 침략에 앞장선 군국주의자임과 동시에 1950~1970년대에 한국이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으로 일본의 이해관계에 따르게 하려고 끝없이 시도하지 않았나. 그러면 이게 반한파가 돼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이 사람들이 친한파로 분류됐다.

이와 달리 한국의 인권, 민주주의에 대해 계속 발언하고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항의하고 구속된 김지하를 석방하라고 요구하고, 그러면서 일본의 한국 침략, 식민 지배를 반성한 사람들을 반한파라고 했다. 통상적으로 생각하면 이게 친한파 아닌가?

여기서도 그런데, 박정희 의장은 5.16쿠데타 이전에도 만주군관학교 교장이었던 사람(나구모 신이치로 예비역 중장)과 편지를 주고받았더라. 그러면서 1961년 미국을 방문하기 전 일본에 들렀을 때 이 양반을 만나 일본식으로 아주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 이건 많은 국민을 굉장히 당혹스럽게 하는 행위다. (나구모 신이치로는 이 자리에서 자신은 박정희를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박정희가 여러 차례 고려 인삼을 보내준 덕분에 건강하게 지낸다고 말했다고 한다. <편집자>)

▲ 1977년 9월 29일 청와대에서 악수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는 이때 한일협력위원회 일본 측 회장 자격으로 한국을 찾았다. ⓒ연합뉴스


일본 A급 전범들에게 훈장 안겨준 박정희

프레시안 :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집권기에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A급 전범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2013년 10월 이 사실이 드러나 커다란 논란이 됐지만, 박근혜 정부는 과거 정부에서 적법하게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서훈을 취소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서중석 : 한일 회담을 보더라도 참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되는데, 박정희 정권이 굴욕적 저자세라는 비판을 얼마나 많이 받았나. 학생들이 박정희의 '민족적 민주주의'를 반민족적 비민주주의라고 규탄하며 화형식까지 하고 그랬다. '민족적 민주주의'도 참 정체가 안개 속에 있는 건데 나중에 '이건 유신 정권이 내세운 한국적 민주주의와 같은 것 아니냐', 그렇게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이때 제일 반대편에서 강경파로서 야당 의원들을 이끈 것은 윤보선이었다. 아주 강경했다. 나중에 윤보선은 의원직도 사임하지 않나.

베트남 문제만 봐도 그렇다. 박정희는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말을 참 몇 년간 거듭했다. 1964~1965년경부터 베트남 문제가 이제 완전히 끝나간다고 이야기되던 1972년 사이에 나온 연설문 같은 걸 읽어보면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말을 쉬지 않고 하더라. 그야말로 한국 역사상 미국과 이 시기에 가장 밀월 관계가 나타난다고 할 정도로 친미적이었다. 무려 5만 명이나 파병했다. 그런데 이 베트남 파병을 가장 비판한 건 다 알다시피 윤보선, 장준하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의 반일 정책을 반공 노선과 별개로 생각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박정희 정권이 이야기한 민족, 자주 역시 통상적인 의미와는 다른 뜻을 지녔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서중석 : 1963년 첫 번째 선거 유세 포문을 열 때 박정희가 '5.16 직전 남북 협상론이 횡행할 때 너희는 뭐했느냐. 그러니까 가식적 자유민주주의자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윤보선을 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박정희의 연설문, 성명서, 담화문 같은 것들을 쭉 훑어보면, 박정희의 자주와 민족은 일본과 미국을 향해 있는 게 아니다. 문맥을 자세히 보면 반공·반북 정책과 맥을 같이하는 게 참 많이 나온다. 이건 유신 체제에서 유독 심하다.

'북한이나 공산주의자들이 대단히 비자주적이다. 민족을 배반한 자들이다', 이런 걸 이승만 대통령도 많이 얘기했지만 박정희 정권도 유신 체제 때 쉬지 않고 얘기한다. 여기서 나는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비롯한 중남미 군부 독재자들이 '반공을 외치는 게 자주다'라는 식으로 들고나오고, 사회주의자나 진보 세력을 ‘외부와 결탁한 세력’이라고 비방하면서 몰아세우고 구속하고 처형한 것들이 떠오른다. 이런 글들을 볼 때 그런 점도 좀 생각나더라. 종속론을 연구한 몇몇 학자들이 '이런 중남미의 친미 반공 종속형 파시즘과 박정희의 파시즘이 비슷한 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나는 여기엔 수긍할 점이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예순두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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