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는 인간의 현재 모습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설명은 매우 강력하기도 하다. 현재 우리가 하는 행동, 심리가 왜 그렇게 나타나는지를 있는 그대로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정치·경제·문화적 관점이 삶의 문제를 이해하고 푸는 데 도움이 되지만, 진화론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말해주기에 더 의미가 있다.
진화론은 주로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는지를 우선 기준으로 정하고 인간을 바라본다. 그중 많은 것은 우리가 인정하기 싫어하는 내밀한 모습이기도 하고, 너무 무미건조하거나 삭막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인간 본성들은 존재하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야기하려는 것은 공동 육아의 진화적 기원이다.
모든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시작됐다. 그것은 인간의 뇌가 너무나 크다는 것이다. 넓은 땅에 포식자도 없고 먹을 것들이 지천이라 해도, 불을 쓸 수 없었을 때는 날음식을 소화하느라 거의 모든 에너지를 써야 했다. 거의 200만 년 가까이 음식을 익혀 먹으면서 우리의 소화기관은 크기가 작아지고 그 덕에 남아도는 에너지를 뇌를 키우는 데 쓸 수 있었다. 인간은 그렇게 뇌가 큰 동물이 됐다.
태어나서 몇 시간만 지나도 뜀뛰기가 가능한 몇몇 동물에 비해, 인간은 네 발로 기는 데만도 1년은 족히 걸리는 미숙한 동물이다. 근골격계와 이를 통제할 뇌 부위가 어느 정도 성숙한 채로 태어나면 좋았겠지만, 그러면 뇌가 너무 커져서 출생 시에 어머니의 골반을 통과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미숙한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인간이란 동물의 운명이 됐다.
이 미성숙한 인간 아기는 많은 돌봄을 필요로 한다. 어머니 1명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는 엄청난 물질적·경제적 지원을 바탕으로 이 불가능한 일을 겨우 해낼 정도는 되었지만, 후유증도 크다. '모성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해서 어머니 한 사람에게 육아의 모든 책임을 전가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행복한 육아는 아니다. 아이와의 유대감만으로는 어머니 혼자 그 책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오랫동안 돌봄이 필요한 아이를 키우는 일은 혼자 감당하기 어렵기에 인간은 일찍부터 공동으로 육아를 해왔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생존이나 번식에 유리한 행위는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많이 남길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같이 아이들을 키우는 행위에서 상대방의 의도를 잘 읽고 공동의 목표를 잘 인식하는 능력이 있다면 자신과 아이의 생존에 매우 유리했을 것이다. 그렇게 인간에게 장착된 감정 중 하나가,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같이 협동하려는 '연대의 욕구'다. 우리의 이런 능력은 다른 동물과는 확연히 다른 공동 육아 방식을 창조해냈다.
공동 육아의 역사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어머니의 손을 거치면서 길러졌다. 오늘날처럼 먹을 것과 자원이 풍부하지 않던 시대에는 모두가 식량을 찾아 사냥을 나가거나 채집을 하거나 농사를 지어야 했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를 무사히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기에 서로 모여 살았고, 주로 여성들이 함께 여러 명의 아이를 키우는 형태의 부족을 만들어, 자연에 맞서서 생존과 번영을 이룩해왔다. 공동 육아의 시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조상 시대부터 현재까지 우리의 돌봄 본성은 혼자 키우기가 아니라 여럿이 키우기, 무조건 공평한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경쟁과 협동이 어우러진 형태의 공동 육아를 해왔다. 인간의 많은 특징들은 사실 성공적으로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데 초점을 맞춰서 진화한 것들이다(즉, 아이들을 성공적으로 성장시켰기에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특징이다). 그중에는 육아와 전혀 상관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 육아에 많은 영향을 미친 특성도 있다. 나무나 정글짐을 오르면서 노는 아동기, 저녁 노을에 대한 시적인 감상, 빠른 완경(폐경)-월경이 끝나는 것, 연애 실패로 인한 마음의 상처, 다부일처부터 일처다부까지의 다양하고 탄력적인 가족 구성, 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소득에 따라 차등적인 세금 정책 등 사실상 거의 모든 인간의 특성은 육아와 관련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 집단과 가족 형태도 사실상 효율적인 번식과 육아를 위한 것이었다.
일부일처제와 여성에게 억압적인 가부장제, 현대 산업화된 도시의 가족 형태는 사실상 성공적인 육아를 위한 차선의 타협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발달된 뇌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상황에 따라 행동 전략을 바꿀 수 있기에 이런 다양한 형태의 육아-가족 형태들을 취해왔다. 오늘날에는 평등 의식이 점차 확대되면서 삶의 형태는 계속 변하고 있고, 따라서 육아 방식도 변하고 있다. 핵가족 형태로 파편화된 육아는 그다지 성공적인 방식이 아니라는 게 드러나면서 '공동 육아'가 많은 새삼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공동 육아는 특별한 게 아니다
공동 육아는 그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하다. 과거 우리 삶이 그러했듯이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나 하고 있는 모든 육아가 사실상 공동 육아다. 시댁에서 시부모님이 봐주는 것도 어찌 보면 공동 육아고, 선생님을 고용하는 형태의 어린이집도 일종의 공동 육아다. 내가 같이하고 있는 '토끼똥 방과후 공부방'도 공동 육아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우리 모두들 나름의 공동 육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공동 육아'라는 말이 공동육아어린이집을 가리키는 일종의 고유 명사가 되어버렸지만, 사실 공동 육아는 일반명사다. 일종의 브랜드가 된 '공동 육아'는 자칫 어떤 획일적인 기준을 정해 거기에 맞출 수 있는 부모와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부모로 나뉠 수도 있다. 외제 유모차 경쟁처럼 될 수도 있다는 노파심이 드는 건 나뿐일까?
비록 고용 구조로 되어 있긴 하지만, 일반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는 것이 잘못된 방식은 아니다. 부모가 협동조합을 만들어 교사를 고용할 때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점에서 좀 더 건강한 운영이 가능할 수 있지만, 이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부모는 그리 많지 않다. 실제로 비용이 많이 드는 문제도 있고, 시간을 더 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지난한 의견 맞추기 과정에서 서로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기껏 어렵게 만들었다가도 무너지거나 흩어지는 경우도 생긴다.
오늘날 공동 육아 방식은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다.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숲동이' 사례처럼 엄마들끼리 품앗이를 할 수도 있다. 요즘은 원하는 시간에만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어린이집도 생겨나고 있다. 독일의 '마더센터'도 사실 천차만별로 운영되고 있어서 '이런 게 대표적인 모델이다'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다. 각자에게 알맞은 다양한 공동 육아 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일 것이다. 모든 방식이 완벽하진 않듯이, 각자 나름의 불편함과 단점이 있다.
우리 안의 '공동 육아 능력'을 찾아서
얼마 전부터 서울시 마포구청 여성정책팀의 요청으로, 연남동 주민커뮤니티센터에 있는 아이 돌봄 모임 고문을 맡고 있다. 이곳에서 '육아와 경제 활동 공간이 많이 떨어져 있지 않은 형태로 육아 모임을 만들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을 가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자신의 가능성을 제대로 펴보지 못하는 여성들이 많다. 많은 여성이 경력 단절과 육아 스트레스로 힘들어하고 있다. 양육과 가정 경제 사이의 어려움도 대부분 혼자서 고민한다. 이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중간답(최종 형태의 답은 아직 모르겠지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경제 활동인 것 같다.
이 문제를 풀어가는 정부 정책도 중요하겠지만, 우리 안에 내재된 공동 육아 능력을 활용해 우리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내는 것도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도 경험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과감히 시도해볼 기회가 주어지길 기대한다. 다양한 색의 불꽃을 내는 양초 만들기 공방, 수제 자전거 공방, 먹을거리 재료의 위험성을 직접 검사할 수 있는 연구소 조합 등 기존의 형태에서 조금 더 활동 영역을 넓힌 마을 기업이나 조합을 통해서 경제 활동과 육아의 공간이 멀리 떨어지지 않은 마을 공동체를 상상해본다.
육아에 대한 자신감은 상상력과 함께한다고 생각한다. '공동 육아'라는 용어가 일반 명사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면서 '공동'의 방법에 대해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했으면 좋겠다. 하인리히 뵐은 "언어는 자유의 마지막 보루"라고 말했다. 공동 육아가 획일화된, 브랜드화된 고유 명사가 되면, 육아에 대한 우리의 자유도 그만큼 잃게 된다. 그 잃어버린 자유의 크기만큼 불안감과 죄책감이 자리 잡을 것이다. 공동 육아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쳐보자.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바로 가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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