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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의 잠룡' 인도네시아, 기지개를 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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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의 잠룡' 인도네시아, 기지개를 켜다! [유라시아 견문] 인도네시아 : 적도의 대국
상상의 공동체

인도네시아는 '상상의 공동체'였다. 20세기 중반에야 세워진 '인공 국가'이다.

1945년 이전에 인도네시아는 없었다. 적도의 아래위로 산재한 섬들의 군집이 있었을 뿐이다. 자바와 수마트라처럼 인구가 많은 섬도 있었고, 파도만 부서지는 바위섬도 있었다. 영해를 포함하면 인도네시아의 크기는 중국이나 미국의 영토에 필적할 만큼 광활하다. 그 너른 마당에 200여 개의 종족 문화와 언어 집단이 널리 산포되어 있던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처음으로 정치적 통일성을 부여한 경험은 길게는 300년, 짧게는 30년에 달하는 네덜란드 식민 지배라고 할 수 있다. 식민주의가 민족주의를 촉발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 조선, 월남, 시암, 버마 등 내륙형 중앙 집권 국가의 경험이 부재했던 인도네시아로서는 민족주의에 동원할 역사도 전통도 부박했다. 종교와 친족, 상업망이 느슨하게 교차하는 '만달라 국가'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독립 국가의 상상력에 불을 붙인 계기는 1942년 대일본 제국의 점령이었다. 일본은 진주만 공습 이후 동남아로 진격했다.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말레이 반도의 영국에 이어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마저 격파했다. 제국 일본은 인도네시아에 반서구 아시아의 이념을 제공했다. 뿐 아니라 네덜란드 식민 통치 기구를 물리적으로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역할도 수행했다.

수마트라는 육군 25사단, 자바는 16사단이 장악했고, 동부의 작은 섬들은 해군이 점령했다. 이들은 각각 싱가포르에 직속되었고, 싱가포르는 사이공의 예하였으며, 최종적으로는 도쿄에 복속되었다. 대동아 공영권에 편입된 것이다. 자바의 표준시도 도쿄에 맞추어졌다. 자바의 수도가 바타비아에서 자카르타로 바뀐 것도 이 때이다. 네덜란드식 거리 명칭도 모조리 변경되었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인도네시아인'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근대적인 군사 훈련도 받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현지인 장교를 전혀 양성하지 않았다. 반면 제국 일본은 현지 군인을 적극 배양했다. 대동아 아래서 장차 '인도네시아 국군'이 자라난 것이다. 이 과정을 관료로서 경험한 이가 아크멧 수카르노(1901~1970년)였다. 일종의 '수습 기간'이었다.

수카르노는 1945년 건국 헌법에서부터 인도네시아의 도덕적 책무로서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정의로운 세계 질서 확립에 기여할 것을 표방했다. 1955년 반둥 회의가 괜히 열렸던 것이 아니다. 또 이 자리에 아시아-아프리카 가운데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이 초대된 것도 우연만은 아니었다.

실로 1960년대의 인도네시아는 1940년대의 일본과 흡사했다. 신세계 질서를 표방하며 영미(英美)와 일전을 불사했다. 수카르노는 올림픽을 대체하는 가네포(GANEFO)를 주도했고, 국제연합(UN)을 대신하는 코네포(CONEFO)까지 추진했다. 동북아에 자리한 일본이 대동아에 그쳤다면, 동남아에 자리한 인도네시아는 아프리카까지 포함하는 더 큰 포부를 품었다.

그래서 건국 이념이었던 '다양성 속의 통일성(Bhinneka Tunggal Ika)' 또한 국내적인 동시에 국제적인 발언이었다. 인도네시아라는 '상상의 공동체'부터가 이미 수많은 종족/민족과 다양한 종교/문화로 이루어진 '작은 아시아-아프리카'였다. 즉 범아시아-아프리카주의와 범인도네시아주의는 공진화했던 것이다.

허언만도 아니었다. 2억4000만 인구 가운데 1억3000만이 사는 자바 문화가 인도네시아 문화를 대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자바어가 아니라 말레이어의 일종을 나랏말로 선택했다. 인도양 동부의 보편어를 국어로 채택함으로써 자바 패권주의를 억제한 것이다. 지금도 학교와 방송 등 공적 영역에서는 오로지 말레이 계통의 표준어만 허용된다.

인구의 약 90%가 무슬림이면서도 '이슬람 국가'를 표방하지 않았다. 15세기부터 이슬람이 약진하기 전까지 적도의 섬들에는 불교와 힌두교가 중요했다. 발리는 여전히 힌두 문화의 처소이며, 곳곳에 중국식 사원과 성당, 교회도 여럿이다. 신정(神政) 국가 대신에 세속 정부를 지향한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다양성과 개방성은 인도와 중국은 물론이요 인도양 건너 아프리카와도 교류했던 천 년 역사의 소산이다. '다양성 속의 통일성'은 두 세대에 걸친 '국민 교육'을 통해서 국가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수카르노는 좌로 기울고, 수하르토(1921~2008년)는 우를 선택했다는 이데올로기의 차이는 있었다. 그럼에도 인도네시아를 상상의 영역에서 실제의 영역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공동의 공로자였다.

새천년 인도네시아는 세계 10위의 국내 총생산(GDP)을 확보하며 G20(주요 20개국)의 일원이 되었다. 매킨지의 예측에 따르면 2030년이면 세계 7위 국가로 부상한다. 브릭스(BRICs)에도 포함되지 않아 상대적으로 조망을 덜 받고 있지만, 21세기를 주도할 신흥 국가의 하나임에 분명하다.

과연 규모는 관건적이다. 세계 4대 인구 대국이고, 세계 최대 무슬림 국가이며, 아세안의 최대 국가이자, 세계 3대 민주주의 국가이다. 갈수록 목청이 커질 수밖에 없다. 내실도 만만찮다. '상상의 공동체'였기에 더욱 유연함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만의 오랜 역사, 독자성, 정체성을 일방으로 강조하지 않는다. 코즈모폴리턴 문화가 곧 토착 문화라는 역설이야말로 21세기 지구촌 시대에 걸 맞는 최적의 자산이 되고 있다.

▲ 라이잘 쿠크마 인도네시아 국제관계전략센터 소장. ⓒ이병한

'인도-태평양' : 역동적 균형자

라이잘 쿠크마(Rizal Kukma)를 만난 것은 아시아-아프리카 정상 회의가 열린 다음날 오후였다. 역사 박물관을 조망할 수 있는 '바타비아 카페'에서였다. 역사 박물관은 옛 네덜란드 식민지 총독부를 개조한 곳이다. 이제는 붉고 하얀 인도네시아 깃발이 바타비아 광장에 펄럭이고 있었다.

쿠크마는 국제관계전략센터 소장으로, 100대 '글로벌 싱커(Thinker)'로 꼽힌 적도 있는 명망가이다. 인도네시아에 가기 전 선행 학습으로 읽었던 여러 논문과 저서 가운데서 단연 돋보였던 인물이다. 현 조코위 대통령의 외교를 자문하는 핵심 책사로 꼽히기도 한다.

한 교민의 표현을 빌면 조코위 대통령은 '인도네시아의 노무현'에 가까웠다. 자그마한 도시의 시장을 역임하다가 자카르타 주지사를 짧게 거치고 곧바로 대통령까지 당선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주류 사회와는 거리가 먼 '서민의 대변자' 이미지가 크다. 반면에 국제 사회 경험은 부족했다. 국제주의자를 자처했던 전임자 밤방 유도요노(Bambang Youdhoyono)에 견주어 외교력의 부족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외교보다는 내치에 집중할 것이라는 전망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우려를 일시에 불식시킨 것이 아시아-아프리카 정상 회의 개막 연설이었다. 국제 사회의 데뷔 무대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세운 것이다. 발전도상국의 대변자이자 이슬람 세계의 중재자로서 신정부의 외교 청사진을 명료하게 밝혔다. 신흥국들이 제 몫을 누리는 새로운 세계 경제 질서 창출을 선언하며 유엔과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의 개혁을 촉구하는 대목도 화제를 모았다. 얼핏 수카르노의 재림처럼도 보였다. 이 개막 연설의 준비 과정에도 깊이 개입했다고 알려진 인물이 바로 쿠크마였다.

그는 '포스트 아세안'의 주창자로 유명하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지역' 개념은 이미 동남아와 아세안을 넘어섰다. 대표적인 것이 '인도태평양(Indo-Pacific)'이다. 인도양과 태평양이라는 두 해양을 잇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두 대륙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국가로서 인도네시아를 자리매김한 것이다. '협력의 지정학', '역동적 균형(Dynamic Equilibrium)' 등과 같은 선도적인 개념을 제출하며 새로운 규범을 제시하는 역할(Norm Setter)을 지향하고 있다.

역동적 균형이란 무엇인가? 인도태평양의 4대 대국, 미국, 중국, 일본, 인도의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는 뜻이다. 언뜻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이 떠오른다. 동북아에도 4대 대국이 있다. 그럼에도 흔히 사용되는 'Balance'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있음이 눈에 띈다. 기존의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과는 다른 발상인 것일까?

그는 'balance'를 쓰지 않는 이유를 군사 동맹이나 군비 경쟁을 통한 군사력의 균형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악순환의 재균형'을 지양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도네시아는 냉전기부터 초강대국이 주도하는 지역 안보 체제(SEATO) 가입을 일관되게 거부해왔다. '지역 문제의 지역적 해결'을 추구한 것이다.

유럽연합(EU)의 브뤼셀과 같은 특정한 중심이 없는 아세안형 조직 구성도 인도네시아의 역할이 컸다. 회원국들이 해마다 순회하며 중심 역할을 번갈아 맡는데 주도적인 공헌을 한 것이다. 그는 인도네시아가 아세안 가운데 유일한 G20 국가라며, 아세안에서 실현한 '협력의 지정학' 모델을 전 지구적으로 확산시키는 것이 '역동적 균형자'로서 인도네시아의 책무라고 말했다.

기실 인도네시아가 세계 외교 무대에 적극 관여하는 것이 새로운 현상만은 아니다. 반둥 회의와 비동맹 회의 등 수카르노가 남겨준 역사적 유산에 가깝다. 다만 수카르노의 실패를 반복해서는 곤란하겠다. 수카르노는 서구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제3세계의 전사를 자처함으로써 정작 내치에 실패하고 말았다. 수하르토의 쿠데타로 내부로부터 좌초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여 조코위 정부는 내치와 외교의 선순환을 꾀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조코위의 신세계 질서와 시진핑의 신형 국제 관계가 궁합이 맞아떨어진다. 인도네시아가 두 대륙과 두 해양을 잇는 연결망의 축(Global maritime axis)이 되기 위해서는 항만과 공항, 도로와 철도 등 인프라 건설 투자가 절실하다. 조코위는 집권 청사진으로 인도네시아 섬들 간의 연결망을 확충해서 교육과 의료 등 복지 서비스를 강화할 것을 표방했었다. 국내적 차원에서는 물론이요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이, 태평양과 인도양 사이의 인프라 건설이 긴요한 것이다. 바로 그 시점에 중국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라는 호기가 열린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지난 10월 일찌감치 창립국 가입을 선언했다. 조코위 정부 출범 두 달만의 신속한 결단이었다.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친중 노선을 표방하나?" 개막 연설 직후부터 현장서는 말이 많았다. 또 그 전부터 들은 얘기도 있었다. 그가 소장을 맡고 있는 연구소는 1971년 창립부터 화교 자본이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저서 가운데는 중국과 인도네시아의 관계를 단독 주제로 삼은 책도 있다. 그러나 대답은 간결하고 단호했다. "NO!"

인도네시아는 특정 국가의 패권을 용납하지 않는다. 미국의 '환태평양'(Trans-Pacific)에 끌려가지 않는 것만큼이나, 태평양을 '중화의 바다'로 허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재차 강조한 것이 '인도태평양'이다.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협력하여 중국의 독주도 제어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도태평양의 허브는 특정 강대국이 아니라 아세안이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인도네시아가 '동남아의 균형자' 역할을 했듯이, 아세안은 인도태평양의 '역동적 균형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아세안이 허브(Hub)이고, 미국, 중국, 일본, 인도가 스포크(Spoke)이다.

실제로 인도네시아는 지구적 수준에서는 비동맹을 고수하고 지역적 수준에서는 아세안의 심화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부국강병을 추구하기보다는 역내 문제의 해결을 주도하는 중재자 역할에 치중했다. 그래서 아세안의 모든 국가들로부터 존중받는 '형' 대접을 받고 있다. 권력을 행사하기보다는 권위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를 발판으로 G20에서도 공헌할 작정이다.

그는 G20은 G7과 같은 선진국 클럽이 아님을 강조했다. 반둥 회의 참가국이었던 중국과 인도, 사우디와 터키, 인도네시아가 참여했다. 문명 간 연합을 추동하는 다문명 지구 공동체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G20에서 '문명 간 가교자'로서 한층 균형 잡힌 세계 질서에 공헌할 것이라고 한다. 하얀 치아가 환하게 드러나는 웃음만큼, 그는 자신만만하고 야심만만해 보였다.

▲ 아시아-아프리카 정상 회의 중 이슬람 국가 대표와 반둥 시민이 따로 모여 모스크에서 가진 합동 기도회. ⓒ이병한

이슬람 르네상스

세계 질서의 재균형이라는 과제에 인도네시아와 중국이 내심으로 공명하고 있다면, 양국이 갈리는 지점에는 문명과 문화가 자리한다. 인도태평양이 새로운 지리-정치학적 발상의 제출이라면, 지리-문화 혹은 지리-문명적으로 인도네시아는 이슬람의 중흥을 꾀하고 있다.

반둥 현장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중앙 모스크에서의 합동 기도회였다. 이슬람 국가 대표들과 반둥 시민들이 따로 모여서 별도의 행사를 치른 것이다. 여기서는 세속적 국가의 수반들이 아니라 이슬람 학자, 울라마(Ulama)가 주역이었다. 울라마는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지평에서 무슬림 형제들을 하나로 잇는 정신적 지도자이다.

한 시간의 기도회에서 오고간 설교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간간이 '아시아-아프리카', '반둥', '알라', '무함마드', '팔레스타인', '이슬람' 등의 단어들이 들려왔을 뿐이다. 실제로 이번 아시아-아프리카 정상 회의의 3대 의제 가운데 하나가 팔레스타인의 독립 국가 인정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인도네시아는 선도적 조취로 자카르타에 임시 영사관도 설치했다.

인도네시아는 1998년 아시아 금융 위기의 여파 속에 수하르토 정권이 붕괴하면서 민주화로 이행했다. 몇 차례의 대선과 평화로운 정권 교체로 체제 이행에 성공했다는 평가이다. 그런데 '민주화'로 촉발된 가장 큰 사회적 변화가 이슬람의 부흥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수하르토 시절만 해도 차도르를 걸치고 다니는 여성은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민주화 이후 도리어 크게 증가한 것이다. 2015년 4월, 자카르타와 반둥 곳곳에서 화려한 색깔의 차도르로 한껏 치장한 여성들이 '아이폰6'를 들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숱하게 목도할 수 있었다.

기실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도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본인부터가 메카 순례를 다녀왔던 독실한 신도였다. 그래서 이름 또한 '아흐마드' 수카르노(Ahmad Sukarno)였다. '아흐마드'는 이슬람 인으로서,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인으로서 그의 정체성을 상징했다.

('아흐마드(Ahmad)'는 아라비아 어로 '가장 찬양할 만한'이라는 뜻이다.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마호메트)의 또 다른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랍권에서는 대중적인 이름 가운데 하나다.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은 '아크멧 수카르노'다.)

아랍의 신생 국가들 또한 수카르노에 기대가 컸다. 반둥 회의를 성공시킨 정치적 역량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하르토의 쿠데타로 미국과 결탁하는 서구 지향으로 굴절되었다. 그러다 '민주화'의 물결과 더불어 인도네시아의 정체성 및 위상을 재정립하는 과제가 제출되었고, 재차 이슬람 부흥(Pembaruan) 운동이 활발해진 것이다.

▲ 바타비아 광장. ⓒ이병한

특기할 만한 것은 이슬람 부흥 운동이 사회운동과도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슬람 NGO가 대약진하고 있다. 종교와 학교와 시민 단체가 융합되고 있는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급진적 무슬림 여성주의자로 명성이 높은 릿팟 하산(Riffat Hassan)의 강연을 이슬람 사원에서 허락하는 유일한 국가이다. 그만큼 풀뿌리에서 이슬람 여성주의, 이슬람 환경주의, 이슬람 민주주의 운동이 활발한 것이다. 국가도 보조를 맞추고 있다. 이슬람 연구소(State Islamic Institute)을 만들어서 '계몽적 이슬람' 관료를 집중적으로 양성하고 있다. 이슬람 계몽주의의 부활을 예감케 한다.

그래서 중동의 혼돈과 이슬람 급진주의에 견주어 인도네시아의 세속적 이슬람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간 인도네시아는 2억2000만 무슬림이 살고 있는 나라임에도, 그 규모에 비해 영향력이 덜했다. 종가가 아닌 변방이었기 때문이다. 메카나 카이로에서 공부한 유학파 울라마들이 줄곧 우대를 받아왔다. 지금도 서점에는 아랍과 인도, 페르시아, 터키의 이슬람 사상가들의 번역서가 대저를 이룬다.

그러나 그 변방의 위치가 이제는 유리한 지점이 되고 있다. 터키와 이집트, 이란처럼 중동의 패권국으로 등장할 우려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는 오로지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이슬람 세계에 기여할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이슬람 세계의 혁신과 부흥을 이끌 수 있는 적임자로 주목받게 되는 것이다. 이슬람의 종착지에서 이슬람의 르네상스를 주도하는 사상적 되감기가 기대된다.

인도네시아는 이미 이슬람회의기구(Organization of Islamic Conference)의 再活(재활)에 정성을 쏟고 있다. 15억 무슬림을 대표하는, 유엔 다음으로 큰 국제기구이다. 이 조직을 통하여 이슬람 공동체의 바람직한 거버넌스를 추구하고 이슬람형 민주주의를 모색한다. 이슬람 교리를 정치적 언어로 변경하여 지구적 공론장에 적극 개입하려는 것이다.

서구적 가치를 배타시하지 않고 이슬람형 민주와 인권 추구를 통하여 평화롭고 건설적인 '지하드(Jihad)'를 꾀한다는 점에서 퍽이나 미덥다. 실로 이슬람은 유라시아의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보편적 세계 종교가 아닐 수 없다. 인구 추세를 보건데 21세기의 최대 종교가 될 것이 확실하다. 앞으로 이슬람 국가들의 견문을 이어가면서 '이슬람적 근대'의 모험 또한 계속 주시하려고 한다.

지난 20세기, 수카르노는 혁명으로 서방을 뒤집으려고 했다. 수하르토는 발전 국가로서 서구를 따라잡으려고 했다. 21세기 인도네시아는 '만달라 국가'의 갱신으로써 '네트워크 국가'로 진화하고 있다. 지역 공동체와 이웃 애를 나누고 지구 공동체에 공공재를 제공하는 '역동적 균형자'를 도모한다.

정치적 혁명과 경제적 발전을 지나서 문명적 中興(중흥)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도양 세계를 복원하고 이슬람 세계도 재건하고자 한다. 조코위 대통령은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의 개막 연설에서 "미래는 적도에 있다"고 선언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적도의 대국이자, 열대의 열도 국가인 인도네시아가 패러다임의 전환을 선도하는 핫 트렌드(Hot Trend), 훈풍(薰風)의 진원지가 되길 기원한다.

반면 아시아의 또 다른 열도 국가는 전혀 상반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아시아의 화해와 통합을 교란하는 삭풍(朔風)의 발원지가 되고 있다. 반동의 선봉에 선 북방의 섬나라, 일본을 긴히 짚지 않을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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