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7일 오후, 나는 서울시 서초동에 있는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법정 동관 562호에서 열린 재판정 증인석에 섰다. 이 재판의 피고는 대한민국이었다. 피고석 맞은 편엔 대한민국으로부터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받았다고 주장하는 가족들을 대신한 변호인단이 원고로 섰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2년 전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 코너의 연재를 시작할 때부터 꼭 하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연재는 어쩌면 지금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관련 기사 :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 <1>~<51> 모두 보기)
평범한 시민이 법정에 선다는 건 사뭇 떨리는 일이다. 이 법정에 함께 증인으로 채택되어 왔던 과거 나의 철도 동료이자 선배들도 판사 앞에서 잔뜩 주눅이 든 채로 서있었다. 나는 법정의 모습을 보면서 시간여행을 하는듯한 묘한 감정을 느꼈다. 아주 오래 전, 짜장면 곱빼기를 먹고 나서도 돌아서면 바로 허기가 지던 20대 시절, 푸른 수의를 입고 피고석에 섰던 적이 있다. 시간은 화살처럼 달렸다. 세월의 열차가 잠시 내려준 증인석에 중년의 모습으로 다시 섰다. 그리고 과거의 한 사건에 대해 담담하게 판사와 피고를 향해 이야기했다. 피고인 대한민국 측을 변호하기 위해 나온 군법무관들의 얼굴들은 앳됐다.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들이 국가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자료를 뒤지고 질문을 준비해왔다. 우습지만,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었음에도 아직 여드름 자욱이 얼굴에 남아있던 그 젊은 친구들이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박태순은 1992년 8월 29일 죽었다. 당시 만 25세의 빛나는 청춘이었다. 나와 동갑내기였다. 그의 행적을 볼 때 어디서에선가는 한 공간에서 스쳐 지나갔을 수도 있던 친구였다. 이 친구의 죽음은 2001년에 와서야 '인양'되었다. 생각해보라. 저녁에 집에 들어오겠다고 말하고 나갔던 자식 혹은 동생이 연락이 두절된 채 사라졌다. 가족과 친구들은 실종신고를 하고 사방팔방으로 찾아 나섰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실종 9년 만에 한 줌의 유골로 돌아왔다. 이처럼 황망한 일이 또 어디 있으랴.의문사위 조사관들은 박태순의 실종 날짜인 1992년 8월 29일 전후의 서울시 행려사망자 212명에 대한 변사 자료를 검색했다. 이 가운데 8월 29일, 지금은 금천구청역으로 이름이 바뀐 시흥역 구내에서 열차사고로 사망한 신원불상의 변사자 사체가 가매장 처리 되었다는 기록을 발견한다. 변사자 처리 문서에 찍힌 지문을 경찰청에 의뢰한 결과 2001년 2월 13일 경찰청으로부터 변사자의 지문이 박태순 것이었음을 확인받게 된다. 박태순 사망 시점에 경찰에 의해 채취된 지문은 선명하게 남겨졌다. 하지만 어떤 일이었는지 신원불상 처리가 되어 행려사망자로 분류되었다. 이후 바로 서울장묘사업소를 경유하여 벽제 묘지 행려사망자 구역에 가매장 되었다. 시간이 더 지나자 무연고 사망자 단지 조성 계획 및 매장지 확보 난 해소 등의 이유로 서울시는 1998년 4월 20일 가매장구역에 매장된 사체 300여 기를 들어냈다. 이 300여 기는 일괄적으로 화장처리 되었고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의 무연고 추모의 집에 유골상태로 보관되었다. 박태순은 당시의 대학생들이 많이 그랬듯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나섰다. 신입생 시절부터 '언더'로 부르던 지하서클에 가입하여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독재정권 퇴진 등 민주화시위에 적극 참여한다. 1989년 5월 20일에는 점거농성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1년 6월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같은 해 5월 22일, 나 역시 시국사건으로 구속되었다. 부산교도소에 복역했던 박태순과 서울 구치소에 있었던 나는 비록 지역은 달랐지만 수감자들의 은어인 '큰 집' 혹은 '법무부 대학' 동기인 셈이었다. 나는 1심 재판결과 다행히(?)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출감했지만 입대 영장이 나와 항소심 재판이 끝난 지 1주일 만에 군대를 가야했다. 이 당시 군대에서는 좌경세력에 의한 군내 좌경의식 오염 및 확산 방지 차원에서 좌경 전력자에 대한 동향관찰 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기무사가 주도한 이 사업의 이름은 ‘마파람사업’이었고 사업 대상 병사들을 A, B, C 급으로 나누어 관리했다. 1990년 2월에 입대한 나는 기무사의 입장에서 보면 군내 좌경의식을 확산시키는 오염원이었다. 군에 입대한 병사들의 소원은 얼른 '민간인'이 되는 것이다. 하루씩 날짜를 지워가거나 밥그릇 수를 깍아 나가면서 간절하게 그리는 것은 자유다. 군인은 폐쇄된 조직의 틀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군 조직이 일개 사병에 관해 갖는 지배력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군 당국의 통제와 지배는 군인에 한정되어야 한다. 군이 민간인에 대한 정치사찰을 시도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틀에 도끼질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민간인 박태순은 기무사의 추적과 감시를 받았다. 아마도 기무사는 좌경세력에 의해 군이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선제적 대응이란 명분으로 민간인 신분인 박태순을 미행하고 감시했는지도 모른다. 서울지구 기무부대 방첩과 좌경계에서는 신원조회, 전과기록 및 판결문, 공안기관 정보제공 등을 통해 박태순의 친구 R씨를 A급 좌경 관련 동향관찰 대상자로 선정했다. R씨는 박태순과 함께한 점거농성사건으로 복역한 후 군에 입대한 처지였다. R씨는 91년 2월부터 육군 제52사단 212연대 기동중대에서 군복무를 시작했다. 1년 전 입대해 213연대 소속이었던 나는 R과 같은 사단 병사였다. 대략 R에게 어떤 조사가 들어갔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신병훈련소 3-4일차 쯤으로 기억한다. 오전 훈련을 준비하기 위해 철모를 쓰고 소총을 든 단독군장 차림으로 막 내부반을 나가려던 차였다. 기간병이 들어오더니 이름을 부른 뒤 철모와 총을 내려놓고 따라오라고 했다. 연병장에는 먼저 나와 있던 훈련병들이 줄을 맞춰 서고 있었다. 연병장 끝 산자락 가장자리에는 사단의 여러 건물이 모여 있었다. 난로 연통이 삐져나온 방에서 나와 하얀 가운을 입은 채 수건을 빨랫줄에 너는 병사도 보였는데 이발병이 분명했다. 연병장에서는 대열을 맞추는 구령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각자의 일상에 빠져있는 평범한 군대의 아침이었다. 내가 안내되어 들어간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양철 재떨이가 놓인 책상과 의자, 벽 쪽의 작은 소파가 전부였다. 방을 안내해 준 기간병이 돌아가고 나서도 한 참이 지나서야 방문이 열렸다. 방으로 들어오던 사람은 문밖의 어떤 사람과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나누고 인사를 마친 뒤 내게 눈을 돌렸다. 뒤이어 한 사람이 더 들어왔다. 나는 일어선 채 차려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30대 중반 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책상에 앉을 것을 지시하고는 마주 앉았다. 나이가 조금 더 들어 보이는 이가 등 뒤에 섰다. 16절지 시험지들과 검정색 모나미 볼펜이 놓여졌다. 제일 먼저 시험지 접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2센티미터(cm) 3개. 맨 위 2센티미터는 문서 묶음 철끈용 여백, 다음은 제목, 그 아래는 소속과 성명을 적어야 했다. 서있던 사내가 말했다.
"담배 피나?"
"네, 핍니다."
"한 대 펴!"
사내는 주저하는 나에게 괜찮다며 담배를 물리고 불을 붙여준 뒤 자신도 한 개비를 뽑아들었다. 담배를 빨고 연기를 내뱉은 후 다시 입에 물고 빨려는 찰나에 눈앞이 번쩍했다. 앞에 앉은 이가 주먹을 날려 뺨을 쳤다. 어금니 안쪽 살이 찢겼는지 혀에 실 같은 것들이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입 안 가득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코에서도 살짝 피가 비쳤다. 손등으로 코를 닦고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주웠다. 앞에 앉은 젊은 사내가 담배를 빼앗아 재떨이에 비벼 껐다. 빨간 핏물이 스친 담배꽁초가 짓이겨졌다."너 같은 빨갱이 새끼는 이렇게 비벼 죽여도 시원치 않아!"
뒤에 서있는 사내가 "왜 애를 때리냐"며 속이 들여다보이는 역정을 냈다. 어르고 달래는 분담된 역할이었다. 공포와 분노, 자포자기와 결기 같은 감정이 머릿속에 뒤섞였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이 생각났고 말랑한 애인의 속살만이 그리웠다. 나는 시국사건으로 구속되어 검찰 조사를 받거나 재판정에 섰을 때도 고개를 들고 행위의 정당성을 항변했었다. 검사와 나는 서로를 비웃었다. 검사는 나 같은 학생들을 세상물정 모르고 사회불안을 야기 시키는 암적인 존재로 여겼다. 나는 반대였다. 최고 엘리트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채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는 존재가 검사라고 생각했다. 검사가 지키려는 것은 파렴치한 권력이었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분명한 대립지점이 있었고 서로 지지 않으려고 맞섰다. 존재가 규정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사와 나는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다. 재판정에서도 판사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역사가 무죄로 판결하리라는 신념이 팔팔하게 살아있었다. 그러나 군대는 달랐다. 군대 안에서의 심문은 20대의 젊음을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미 국가의 행정명령에 의해 징집된 상황이었다. 명령과 복종이라는 철저한 위계질서 속의 제일 밑바닥에 편입된 것이다. 게다가 외부와는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등병 계급장도 달지 못한 훈련병의 처지란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가련한 존재에 불과했다. 일반인들의 상식조차 군대란 불합리하고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 있더라도 참고 견뎌야하는 곳이었다. 군에 의해 문제적 인물로 찍힌 사람들은 언제든 제물이 될 수 있는 독수리 날개 밑의 병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하물며 나는 군에서 척결 대상으로 여기는 좌경 분자로 규정된 상태였다. 지독한 고립감과 누군가에게 하소연도 할 수 없는 조건은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며칠 동안 간헐적으로 조사가 이어졌다. 훈련소 동기들은 훈련에서 열외 되는 나를 보고 대단한 "빽"을 가진 거 아니냐며 부러움과 질시의 눈길을 보냈다. 조사 기간 동안 내게 쓰라고 강요됐던 것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았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읽었던 모든 책의 제목", "자주 들르는 사회과학 서점 이름(당시에는 각 대학 앞에 인문사회과학전문 서점이 있었고 운동권 학생들이 주 이용객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이 조사가 대체 무슨 쓸모가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같이 활동했던 친구, 선후배 명단",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대해 아는 대로 쓰기", "공산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김일성 주체사상에 대하여" 등등. 16절지 시험지에 너무 티 나지 않게 내 사상의 순수성을 증명해야 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한민국 헌법은 사단 훈련소의 후미진 막사 한 편에서 가볍게 짓밟혔다. 친한 친구의 명단은 만난 지 몇 년이 지나 연락처도 모르는 고등학교 동창들의 이름을 채워 넣었다. 몇 번의 조사를 끝으로 더 이상의 호출은 없었다. 내가 C급 정도의 중요하지 않은 사찰 대상이었는지 아니면 군대의 속성상 다른 일로 바빠지거나 주의가 돌려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대신 누군가가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전역할 때까지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했다. 어깨에 커다란 형틀을 지고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A급 대상자로 관리된 R을 통하여 R의 주변 인사들을 내사하기 시작한 기무사 요원들은 수원경찰서 대공과, 경기지방경찰청 공안 분실, R과 박태순의 출신학교 경찰 상황실 등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내가 박태순 사건을 알게 된 계기는 어쩌면 필연적이었다. 2001년 말 쯤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나는 철도청 소속 공무원으로 기관차를 타는 승무원이었다. 내가 일하는 서울기관차승무사업소의 게시판에 낯선 알림문서가 부착되었다. 의문사위의 조사에 협조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약 9년 전, 그러니까 1992년에 있었던 철도사고를 겪은 승무원을 찾아 주거나 본인일 경우 신고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사건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1992년이면 내가 입사하기 전 일이었고 철도 사고 특성상 사고 당사자야 쉽게 찾을 수 있으리란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잊고 있었던 중 어느 날이었다. 수도권 주변을 밤샘 운행하는 화물열차의 승무를 끝내고 업무종료를 위해 수색의 기지로 가야했다. 이미 교대를 한 상태라 기관사와 부기관사로 이루어진 승조 2명은 서울역에서 기지로 입고하는 기관차를 얻어 탔다. 이 디젤 기관차 운전실에는 나의 승조를 비롯해 같은 밤샘 운행을 마친 승조와 입고하는 디젤기관차를 모는 기관사와 부기관사 등, 총 6명이 탔다. 서울역에서 수색기지까지의 운행시간은 20분 정도 걸린다. 이 시간 동안 기관사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기지로 들어간다. 이날의 화제는 억울한 사고 당사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동료 기관사 중 한 명이 자신이 일으킨 사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고당사자로 처리됐다며 불만을 토로한 것에 대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2002년 2월 19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첫 방한을 했다. 20일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신설된 남한의 최북단 역인 도라산역에서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상징적인 행사가 있었다. 이때 대통령 일행을 위해 서울역에서 도라산역까지 전용 특별열차가 운행됐다. 대통령 전용 특별열차는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운행에 지장을 받지 않도록 특별 관제를 받아 움직인다. 더욱이 미국 대통령까지 참가하는 행사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 관련된 모든 사람이 행사 수행에 전념했을 것이 분명하다. 서울역에서 도라산역까지는 무정차 고속주행을 인가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통령 전용열차가 서울 외곽의 한 지점을 지난 뒤에 발생했다. 이미 특별열차가 지나간 뒤라 비상 경호 상황이 해제되었고 경의선의 열차운행은 정상화 되었다. 이에 따라 특별 열차를 뒤따라 수색 차량기지로 향하던 열차가 선로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 비상 정차했다. 당시 운전을 했던 A기관사는 할머니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비상 정차 후 기관사가 숙지한 매뉴얼에 따른 응급조치를 실시했다. 이 할머니는 병원으로 긴급이송됐지만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A기관사의 판단에는 자신의 앞에 지나간 열차는 대통령 전용 특별열차였기에 이 사고는 특별열차가 낸 것이 분명했다. 악천후가 아닌 대낮 상황에서 열차에 사람이 부딪히면 기관사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사고를 보고받은 당국은 국가적으로 최고의 VIP를 태운 열차를 세워놓고 사고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결국 이날의 사고는 A기관사가 관련된 것으로 결정되었다. 선로에 사람이 진입한 상황에서 기관사가 대응하는 것은 불가항력으로 인정된다. 기관사에게 형사책임을 물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이에 따라 A기관사가 사고조서를 쓰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A기관사는 이즈음 입이 한 주먹이나 나와 자신이 저지른 사고가 아닌데 덮어쓰게 되었다며 툴툴거리고 다녔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나와 같은 승조였던 선배 기관사 B가 말을 받았다. 우리 사무소에 사람을 찾는다고 붙은 시흥역 사고도, 당시 관련 기관사인 C한테 기관원들이 사고 보고서만 잘 쓰라고 했다며,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 많았다는 투로 말을 했다. 나는 이 소리를 듣고 순간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B 기관사에게 "죽은 사람이 너무 억울하지 않나?"며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B 기관사는 교통사고 목격자로 나서도 피곤한데 괜히 나서가지고 고역을 당할 일 있느냐며 손사래를 쳤다. 평생 관리자들의 눈치를 보며 회사생활을 한, 퇴직을 얼마 안 남긴 소심한 아저씨에게 진실을 밝히는 길에 나서길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B기관사는 시흥역 사고 당사자도 아니고 친구인 C기관사한테 들은 내용이었다. 이날 이후 가슴 속 한 켠에 커다란 돌이 들어온 듯 했다. 사건과 관련된 꿈까지 꾸게 되었다. 주변에 만나는 이들마다 내가 알게 된 사실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런 행위들은 결국 의문사 조사위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의문사위의 출두 요구를 받게 되었다. 나는 의문사위에 출석해 조사관들에게 내가 알게 된 사실들을 진술했다. 박태순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의문사위의 조사에 협조해야한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박태순 사건은 진상규명 불가 판정을 받는다. 의심 가는 지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가기관의 공권력이 작용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였다. 박태순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길 기대했던 가족과 친구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박태순의 사고를 생각할 때마다 억울한 영혼이 나를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같은 나이에, 같은 꿈을 갖고 거리를 달렸던 친구였기에 내게 말을 걸었다고 믿었다. 비록 의문사위에서는 진상규명불가라고 나왔지만 이 글을 통해서라도 진실의 조각을 모아 친구와 그 가족의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풀어 보려한다.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자. 박태순은 집안의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그의 부친은 아들 걱정으로 줄담배를 피웠을지도 모른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허구 헌 날 데모 질에 나서는 아들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을 것이다. 나도 학생시절 부친으로부터, 경찰한테 잡혀 두들겨 맞아 병신 되지 말고 정신 차리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었다. 일제시대와 독재정권 치하를 경험한 부친은 순사들에 끌려갔다가 반죽음이 되어 나온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며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데모 학생들을 집에서 일정 정도 포기하는 시기가 온다. 감옥에 수감될 때이다. 징역살이까지 할 정도면 골수 운동권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미 수감 생활을 마친 박태순은 집에서도 반쯤은 포기한 운동권 학생이었다. 박태순은 출감 후에도 수원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계속 했다. 1991년 2월 19일 자로 입영기일이 정해진 입대 영장도 무시하고 군 입대를 거부했다. 이 시기 경기도 일대의 노동운동조직은 많은 부침을 겪고 있었다. 사회주의국가로 간주되었던 소련의 몰락에 따른 이념의 쇠퇴 기조가 몰아쳤다. 혁명을 목표로 삼았던 많은 이들은 새로운 좌표를 찾아 나섰다. 운동 그룹과 조직의 이합집산이 일어났다. 박태순은 미래를 기약하자며 노동운동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박태순은 군 입대를 마음먹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박태순의 부친은 자식의 변화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박태순은 입대 날짜 전까지 아버지가 소개해준 경기도 부천의 작은 공장에서 일하기로 약속하고 임시직 선반공으로 일했다. 운명의 날인 1992년 8월 29일, 저녁 6시 30분경부터 공장 일을 마친 박태순은 동료들과 소주를 곁들인 회식을 했다. 회식 후 퇴근을 위해 공장 동료 Z와 경인선 전철 역곡역으로 갔다. 역곡역에서 동료와 헤어진 박태순은 구로역에서 경부선 수원행 열차로 갈아탔다. 박태순은 석수역 근처에 있는 형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박태순은 저녁 9시 30분경부터 47분 사이에 시흥역에 내렸다. 형 집에 가기위해서는 한 정거장을 더 가야 했지만 웬일인지 목적지 전 역에서 내린 것이다. 시흥역에서는 8분에서 최대 24분 동안 머물렀다. 지금 금천구청역이나 1992년의 시흥역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옛 모습 그대로라고 볼 수 있다. 시흥역은 승강장이 높은 고상 홈 끝이 서울 방면으로 저상 홈으로 연결되어 있다. 과거에는 비둘기호 같은 완행열차가 승강장이 낮은 이 저상 홈에 정차해 승객들이 타고 내렸다. 서울에서 출발한 열차들은 영등포역과 수원역을 기본 정착 역으로 삼는다. 90년대에는 안양역에 이따금 정차하고 시흥역은 거의 정차하지 않았다. KTX가 고속으로 다니는 지금의 금천구청역에서는 아예 정차하는 열차가 없다. 저상 홈은 금천구청역에 일반열차가 정차했던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화석 같은 존재다. 박태순은 전철 고상 홈을 넘어 이 저상 홈 승강장으로 내려가 30여 미터를 갔다. 형의 집과는 정 반대 방향이었다. 그리고는 이 저상 홈에서 서울발 광주행 제3175호 무궁화호 열차에 부딪혔다. 기관차 맨 앞 승강대 손잡이에 머리를 부딛힌 박태순은 선로 왼쪽 편으로 튕겨져 나갔고 두개골 파열로 즉사했다. 서울 남부 경찰서에서 나온 변사사건 담당 형사들은 박태순의 바지 주머니에서 전철 정액권 이외에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다. 지갑도 현금도 없이 오직 전철 승차권 한 장만 든 변사체는 신원수배에 들어갔다. 채취 된 열손가락 지문은 한 달을 훨씬 넘겨 10월에서야 경찰청 지문감식과로부터 "지문불발견" 통보를 받았다. 불과 1년 전 출소한 전과자의 지문이 조회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9년이 지난 뒤 경찰에서는 단순한 행정적 실수였다고 해명했다. 2001년경 내가 근무하는 부서에 사건 당사자를 찾는 의문사위의 안내문이 붙은 것도 의아했다. 당시 사고 열차였던 서울발 광주행 무궁화호는 디젤기관차가 끄는 열차였다. 디젤 기관차에는 기관사와 부기관사가 짝을 이뤄 운행하게 된다. 이날 사고는 부기관사 쪽에서 일어났다. 디젤 기관차의 구조상 기관사는 진행방향 우측의 시야가 좋고 부기관사는 좌측 시야가 좋다. 전조등 불빛에 의존하는 야간 운전에서는 어느 쪽에서 피해자가 사고를 당했는지가 중요하다. 박태순의 경우에는 부기관사가 정확히 사고 상황을 볼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당시 사고열차의 부기관사가 누구였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기관차 승무원들은 열차운전보고서라는 일일 승무일지를 작성해 보관하는데 보관연한이 3년이다. 철도청은 승무일지가 이미 폐기 처분되어 당시 승무했던 부기관사를 찾는데 실패했다고 밝혔다. 어쨌든 사고에 대한 결정적 증언을 해줄 수 있는 부기관사는 내가 근무하는 서울기관차 승무사업소의 부기관사였던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의문사위에서 당시 근무했던 모든 부기관사에 대해 일일이 연락을 취해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당시의 사고 보고서에도 부기관사의 인적사항은 누락되었다. 그리고 박태순의 신원을 확인한 것은 사고가 난지 9년이나 지난 뒤였다. 공식 기록은 모두 폐기되어 버렸다. 기껏해야 200여 명의 확실한 후보군인데, 사건 당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나마 믿을 것은 기관사의 기억이었다. 그러나 당시 옆에 누가 부기관사로 타고 있었는지, 기관사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언뜻 보면 사고가 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나는 20년을 기관차 운전실에서 보냈다. 입사 후 수년간의 부기관사 시절을 포함해 기관사가 된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동료 승무원들과 짝을 이뤄 근무했다. 특정한 인물과 언제 한조를 이루어 근무했는지는 생각해낼 수 없다. 그러나 생각나는 짝이 있다. 바로 함께 사고를 겪은 승조였다. 사상 사고나 열차 고장 등 어려운 순간에 함께 고생한 승조는 시간이 한참 지나도 잘 잊지 않게 된다. 특히 인사사고가 날 경우 시간이 오래 경과했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뱉었던 욕이나, 끊었던 담배를 빌려 피웠던 기억, 당시의 무전기 통화 내용과 동료의 얼굴 표정까지도 생각해내는 기관사들이 많다. 그만큼 사고의 트라우마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현상이 나만의 것은 아닌지 확인했다. 다른 동료들에게 아주 오래전 겪은 사고들을 떠올리게 하고 그 때 옆에 탔던 짝을 기억할 수 있는지 물었다. 내가 물어본 동료 선후배들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생생하게 옆 사람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사고 당일 열차를 운전했던 C기관사만큼은 그날 함께 탔던 부기관사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결국 사건 관련 부기관사를 찾는 일은 실패하고 말았다. 지금은 어디에선가 기관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사건에 대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진술해 줄 것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나타나주기를 바랄뿐이다. 왜 박태순은 형 집이 있는 석수역까지 가지 않고 전 역인 시흥역에서 내려 한동안 배회했을까? 왜 급히 선로를 횡단해야 했을까? 의문사위의 조사위원들이 밝힌 사실에 따르면 기무사요원이 박태순과 관련된 경찰청의 정보 및 수사 자료를 열람했다. 또한 박태순 주변의 수원지역 노동운동가들의 활동을 조사했고 이들의 거주지를 정탐했다. 박태순이 취업했었던 공장에 찾아가 행방을 추궁한 사실도 확인되었다. 박태순은 동료들을 만날 때면 공안기간의 사찰에 대한 불안을 호소했다. 아마도 사고 당일 박태순은 자신을 뒤따르는 이상한 그림자를 눈치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운동권 학생이나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미행을 피하기 위한 몇 가지 행동원칙을 갖고 있었다. 수시로 주변을 살폈을 박태순은 구로역 환승 시, 수원행 열차를 타고서도 계속 조여 오는 날카로운 눈빛을 느꼈을 것이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전철의 칸을 옮겨 다니던 박태순은 시흥역에서 내렸다. 정보기관원들도 따라 내렸을 것이다. 박태순은 추적자를 따돌리기 위해 시흥역에서 전철을 내렸고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저상 홈 쪽으로 피했을 것이다. 정보기관 요원들이 박태순의 이름을 불렀을 수도 있다. 이름을 호명 당했을 때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는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박태순은 기관원들의 동행 요구를 피해 급히 달아났을 수도 있다. 시흥역의 구조를 보면, 시흥역의 출구가 있는 금천구청 쪽은 비교적 사람들의 통행이 많다. 반면 역사 반대쪽인 광명시 쪽은 어둠에 싸인 공간이다. 둑 산책길로 조성되어 있는 지금도 밤 시간이면 한적한 곳이다. 박태순은 자신을 쫓는 그림자를 따돌리기 위해 선로 건너편 어둠 속을 눈여겨봤을 것이다. 25살의 청년,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고 달릴 체력과 자신감이 있을 나이였다. 저상 홈 바닥에 내려서 30여 미터를 달리던 박태순은 뒤를 돌아봤을 것이다. 거기서 어둠 속 그림자 몇몇이 쫓아오는 것을 보고 봐두었던 선로 건너편 어둠을 향해 몸을 틀어 뛰었던 것이 박태순의 마지막 행위였다. 이 구간은 열차가 시속 130킬로미터(km)로 달리는 곳이다. 당시의 무궁화호 열차는 연결한 객차의 형식에 따라 시속 110이나 120킬로미터의 속도로 시흥역 승강장을 향해 달렸을 것이다. 박태순이 부딪친 위치는 기관사가 운전석에 오르기 위한 승강대 강철 손잡이 아래 부분이었다. 선채로 머리를 받쳤다. 그리고 시흥역 저상 홈 쪽으로 튕겨 나가버렸다. 박태순을 쫒던 어둠 속의 그림자들이 현장에 있었다면 낭패감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신원을 감추기 위해 지갑이나 다른 소지품을 수거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론가 연락을 취해 사고처리 과정에서 박태순의 신원이 드러나지 않도록 손을 썼을 것이다. 다른 추측도 가능하다. 박태순의 승차 기록을 근거로 추정했을 때 시흥역에서 최소 8분에서 24분까지 머물렀기 때문이다. 기관원들은 시흥역 승강장에서 박태순을 잡아 저상 홈으로 조용히 끌고 갔을 수도 있다. 박태순으로부터 특정한 정보를 캐려 했을 수도 있고 군 기피 혐의로 연행하기 위해 잠시 억류하려 했을 수도 있다. 퇴근길 전철 승강장에서 박태순이 저항이라도 해 소란을 일으키는 것을 기관원들은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경찰 정보과 형사들이었든 기무사 요원이었든 박태순을 끌고 조명등도 없는 저상 홈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어쩌면 박태순에게 수갑이 채워졌을 수도 있고 요원들에 의해 허리춤을 붙잡혔을 수도 있었다. 기관원들은 박태순을 협박하거나 어르고 달래며 시간을 보냈다. 이런 일들이 8분에서 24분 사이에 일어났다. 박태순은 기관원들이 방심할 순간을 기다렸다. 어쩌면 담배를 달라고 했을 수도 있고 자포자기한 모습으로 기관원들을 안심시켰을 수도 있었다. 두어 명의 추적자와 어둠속 저상 승강장에 서있던 박태순은 기회를 노렸다. 자신을 붙잡고 있는 기관원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틈을 타 상대방의 손을 힘껏 뿌리치며 선로 건너편으로 뛰었다. 박태순은 거대한 철마가 다가오고 있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 점멸되는 전조등도 발악적으로 울리는 기적도 듣지 못했다. 낭패감에 빠진 기관원들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박태순의 주머니들을 뒤져 모든 소지품을 챙겼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는 박태순의 신분이 드러나지 말아야 했다. 유일하게 남겨진 것은 옷을 뒤진 자들에 의해 발견되지 않은 전철 정기 승차권이었다. 명함 정도의 얇은 두께 탓에 주머니 한 쪽에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승차권의 마그네틱 기록이 그나마 박태순의 최후 시간을 추정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렇게 25살의 청년은 경찰에 의해서 신원미상변사 처리가 되었다. 나중에 사고 당시의 사진을 통해서 본 박태순의 모습은 머리를 제외하고는 아주 깨끗한 상태였다. 지문 조회만 제대로 되었어도 사라진 청년을 찾기 위해 9년이란 시간 동안 가족들이 희망과 절망의 롤러코스터 속에서 고문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의문사위의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결정적 증언이 나왔다. 기무부대 방첩과 좌경계 소속 요원 Y의 진술이 그것이었다. Y는 함께 활동했다가 대구 지역으로 파견되었던 X가 어느 날 좌경계 사무실에 들렀을 때 "박태순이 전철 역에서 사망한 사실을 수원 지역 경찰들로부터 들었다"라고 말한 사실을 똑똑히 기억했다. 같은 날 Y는 오류동 소재 음식점에서 X와 점심을 먹었다. 이때 X가 역곡역 쪽을 가리키며 "박태순이 이 쪽 방향으로 출퇴근 하는데 전철을 타고 다니다가 죽었다"라는 말을 했다고 Y는 진술했다. 그러나 X는 의문사위 조사과정에서 자신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했다. X는 Y가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 이외의 의문사위 조사과정에서는 기무사 요원, 경기경찰청 공안 분실, 화성경찰서 대공과 형사들 모두 사고 당일 박태순에 대한 미행과 감시가 없었다고 진술했다. 물론 이 진술은 사건이 난 뒤 10여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진 것이다.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Y의 진술에 일관성과 구체성이 있지만 X가 발언 사실을 부인하고 다른 기관의 요원들도 미행사실에 대해 일관되게 부정하고 있으므로 새로운 구체적 증거나 증인이 존재하지 않는 한 사실관계를 명확히 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Y의 진술이 맞다면 박태순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신원불상 처리된 변사자의 죽음을 기무사 요원이나 경찰들이 알았다는 것 자체가 사건이 은폐·조작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증언을 한 사람이 희생자에게 다소 우호적일 수 있는 시민단체소속이나 친구들이 아니라 기무사 좌경계 요원이었다.
의문사위의 조사 과정은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좌절됐다. 결정적 진술이 나오면 부정되었다. 새로운 증언이 나오면 관계자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기무사에 대한 의문사위의 자료 제공 요청은 간단히 거부되었다. 기무사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관련 자료들이 폐기되었다는 회신만 보내왔다. 이에 2002년 8월, 위원회가 현지조사를 시도하였으나 이마저도 기무사의 거부로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박태순 의문사 사건은 "박태순의 사망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에 의한 것인지 명백히 밝힐 수 없으므로 진상규명 불능"으로 규정되었다. 의문사위의 활동은 종료되었지만 규명되지 않은 사건들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2005년 12월, 다시 한시적 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위)’를 출범시켰다. 가족들은 진실위에 박태순 사건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고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진실위에는 총 1만1175건의 사건이 접수되었다. 이중 75.6%인 8450건이 진실위 조사과정을 거쳐 진실규명 판정을 받았다. 15.5%인 1729건은 각하되었다. 4.7%인 528건은 진실규명 불능 판정을 받았다. 박태순 사건은 의문사위에서는 진실규명 불능 판정을 받았지만 진실위에서는 조사중지 결정을 받았다. 진실위가 처리한 조사중지 결정사건은 총 사건의 0.2%인 20건에 불과하다. "이 사건의 핵심인 박태순의 사망사실을 인지한 기관원에 대한 조사를 못함에 따라 진실규명신청및조사에관한규칙 제43조 3호에 의거 조사중지하여 종결한다." 진실위의 결정문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민사재판의 결과도 피고인 대한민국의 승리로 끝났다. 가족들이 의문사위와 진실위를 통해서 밝혀내고자 했던 진상규명이 무산되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걸었던 소송이었다. 대한민국의 법체제와 행정제도는 가족들이 갖는 의문을 풀어주지 못했다. 당연히 아픔 역시 치유해주지 못했다. 이렇게 박태순 사건은 대한민국의 시공간 어느 한구석에 멈춰선 채 종결되었다. 같은 시대 같은 거리를 달렸던 두 청춘의 삶의 궤적은 완전히 다른 길로 이어졌다. 20대에 별을 달았던 나는 세월이 흐른 뒤 사면·복권이 되어 공무원까지 되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유공자 증서까지 받았다. 증서에는 "귀하는 대한민국의 민주헌정질서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켰으므로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의 규정에 의하여 이 증서를 드립니다."라고 쓰여 있다. 개인적으로는 과연 이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지 낯이 뜨겁기까지 한 문구들이다. 이 증서는 박태순에게 훨씬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다행히 750여 년 전 피렌체의 시인은 맑은 영혼들이 천국에 들르기 위해 잠시 쉬어가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러니 이 사람을 기꺼이 맞아 주시오. 이 사람은 자유를 찾아서 가고 있소. 자유를 위해 삶을 포기한 당신이니 잘 알 것이요"라고 단테는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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