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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시라소니조차 무서워서 경호를 그만둔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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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시라소니조차 무서워서 경호를 그만둔 사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9> 조봉암과 진보당, 일곱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 번째 이야기 주제는 조봉암과 진보당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이야기 마당 4253] 5.16쿠데타

[이야기 마당 5462] 제3공화국

프레시안 : 우격다짐 발췌 개헌 후 제2대 정부통령 선거 국면으로 접어든다.

서중석 : 직선제 개헌이 발췌 개헌 형식으로 되고 나서 직선제 헌법이 1952년 7월 7일 공포됐다. 7월 18일, 정부는 8월 5일에 정부통령 선거를 실시한다고 공표했다. 선거 실시를 공표하기 전에 국회에서는 다시 의장단 선거를 했다. 의장단 선거는 2년마다 했는데, 여기서 신익희가 다시 의장이 됐고 조봉암과 윤치영이 부의장이 됐다.

조봉암은 당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철영이 1950년대 초에 쓴 글을 보면, 조봉암은 두뇌가 아주 명석하고 정연한 이론을 가진 인물로 호평이 자자하다고 돼 있다. 1954년 한 기자가 쓴 글에는 '조봉암의 사회 솜씨가 너무나 세련돼 있다. 국회법을 잘 운용하면서 조금도 사심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돼 있다. 바로 이러한 뛰어난 기량 덕분에 두 번째 국회 부의장으로 무난히 선출됐다는 것이다. "극단의 경지에 이른 사회 기량"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이처럼 조봉암은 국회를 이끌어가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 그래서 두 번째 의장단 선거에서도 88명 의원의 가(可)표를 얻어 국회 부의장이 됐다. 그런데 조봉암에게 국회 부의장은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고 난 본다.

제2대 대선 출마, '죽음의 길' 택한 조봉암

프레시안 :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서중석 : 대통령 직선제가 되니까 이 사람은 대통령에 출마하는 큰 꿈을 꾸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1951년 신당을 만드는 작업을 할 때 뼈저리게 느낀 것이지만, 국회의원 70∼80명이 조봉암 자신을 좋아했고 그중 몇 사람은 자신을 따랐는데도 신당을 만들려고 하니 다 피했다. 조봉암은 정치 활동에서 그냥 국회에서 활동하는 정도로 머물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더 커다란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그럴 때 직선제처럼 나한테 유용한 제도는 없지 않은가', 직선제 개헌안이 통과돼서 직선제 선거가 공표됐을 때 조봉암이 이런 생각을 했으리라고 본다.

8월 5일에 선거를 실시한다고 정부가 공표하면서 후보 등록을 할 때 조봉암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던 윤길중은 제일 먼저 신익희 의장을 찾아갔다. 윤길중이 신익희에게 '대통령 선거에 나와라'라고 하니 신익희는 물론 사양했다. 신익희 의장은 상당히 두려워했다고 하는 글이 있다. 이승만하고 맞서다가는 매우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 선거에 나올 만한 또 다른 사람으로 이시영 전 부통령이 있지 않았나. 조봉암과 윤길중이 이 양반을 찾아가서 출마를 권했다. 이시영은 극구 사양하면서 '조봉암 당신이 직접 나가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그러자 조봉암이 대뜸 7월 24일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되니까 민국당으로서는 큰일 난 것 아닌가. 그래서 이시영 이 노인네를 찾아가 출마를 요청했다. 이분은 당시 몸을 움직이기도 굉장히 힘들었다. 1869년생이니 이때 83세였다. 그런데 민국당에서 '꼭 나가셔야 한다'고 아주 강청을 하니까 이시영은 결국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 신흥우도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 (신흥우는 기독교계 인사로 일제 강점기에 독립 운동, 농촌 개조 운동 등을 했다. 그러나 일제 말에는 일본의 침략 전쟁에 협력하는 등 친일 행위를 했다.) 어쨌건 대통령 선거 출마는 조봉암으로서는 자신의 정치적 능력을 펴볼 수 있던 기회라고 볼 수도 있지만 죽음의 길을 택한 것이 아니냐, 그렇게 볼 수도 있다.

▲ 2013년 7월 31일, 망우리 묘지공원(서울 중랑구)에서 열린 조봉암 54주기 추모제 모습. ⓒ연합뉴스


이승만 쪽에서 부통령 후보로 이범석 대신 함태영을 택한 이유

프레시안 : 이 시기 이승만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8.5 정부통령 선거는 아주 이상한 선거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뭐냐 하면 원외 자유당이라고 불리던 자유당이 전당 대회를 열어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 부통령 후보로 이범석을 지명했다. 이승만이 당수, 이범석이 부당수였으니까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자유당 총재를 사양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뜻밖에도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나왔다.

이 대통령은 이범석이 어떤 인물인가를 알고 있었다. 이범석이 내무부 장관을 할 때 그 무서운 힘을 봤다. 그야말로 리틀 이승만이라고 할까, 이범석이 이승만 자신과 성향이 같다고 본 데서 비롯한 두려움이라고 할까 걱정으로 '이범석이 부통령이 되는 건 막아야 한다', 그렇게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승만 쪽에선 함태영 심계원장에게 출마를 종용했다. 이분도 나이가 이승만보다 위였는데, 이 양반을 찾아가서 후보로 나오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쪽에서는 당연하게도 '내가 어떻게 나가느냐. 나갈 수 없다. 정치 자금도 없고', 이렇게 하면서 안 나가려고 했다. 그렇지만 이 대통령 쪽에서 온 사람은 막무가내로 나오도록 했다. 그래서 결국 함태영, 맘씨 좋은 이 양반이 부통령 후보로 나서게 된 것이다.

프레시안 :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을 조금도 위협하지 않을 인물을 택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서중석 : 이 선거에서 또 하나 재미나다고 할까 흥미로웠던 것은 민국당 부통령 후보로 나온 조병옥을 제외한 모든 부통령 후보, 그러니까 이범석, 이갑성, 함태영, 임영신, 이윤영 이런 사람들이 전부 이승만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부통령 후보가 거의 대부분 이승만을 지지하고 나선 건데, 왜 이게 논란이 될 수 있느냐 하면 그렇기 때문에도 발췌 개헌 때 직선제 개헌이라면 러닝메이트 제도를 집어넣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깜빡 빠뜨린 것인지 그걸 넣지 않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2년 후에 하게 되는 사사오입 개헌 때는 러닝메이트 제도를 도입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도 넣지 않는다. 그러다가 1956년 선거에서 장면이 부통령이 되는 걸 보고 기겁한 것이다. 자유당이나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 아닌가.

그때부터 이 제도 도입을 서두르는데, 그러면 왜 이 대통령이 러닝메이트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느냐. 그 이유 중 하나가 '사실상 모든 부통령 후보가 나를 지지한다', 이런 것과도 연관돼 있다고 나는 본다. 이분은 '모든 국민이 나를 지지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했다. 하여튼 이것 때문에 나중에, 그러니까 1960년에 또 3.15 부정 선거를 저지르게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승만의 불출마 선언과 관제 민의 동원…번복 후 제일착으로 후보 등록

ⓒ오월의봄
프레시안 :
숱한 무리수를 두면서 직선제로 바꿔놓고 정작 이승만 대통령이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것도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 불출마 소동은 그 이후 대선에서도 일어난다.

서중석 : 그게 이 선거에서 가장 특이한 점이다. 직선제 개헌안,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데 이승만 대통령이 핵심적인 위치에 있지 않았느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불출마 선언을 한 것이다. 참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출마하지 않겠다고 하니까 당시 분위기에서 민중이 가만있을 수 없는 것 아닌가. 민중자결단, 지방 의원들을 비롯해 부산 정치 파동 때 등장했던 민의 부대들이 막 동원됐다. 직장인을 비롯한 여러 부문의 대중도 막 나서고 그런다. 이승만 재출마를 갈구하는 정당, 사회 단체들의 요청, 민중 운동 같은 게 일어나서 350만 명에 달하는 지지·추대 탄원서가 제출됐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후보 등록일이 며칠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고 후보 등록을 한다. 그것도 제일착으로 했다.

출마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후보 등록을 한 이유를 이 대통령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때 대통령이 한 담화를 보면, 대통령 별장이 있는 진해에 비서가 와서 "만일 대통령이 출마 승낙서에 서명하기를 원치 않으신다면 자기에게 내 도장만이라도 주어 국민들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하기에 "나의 친구의 전부가 본인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면 그것을 사용하여도 무관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도장을 사용하는 건 상관없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참, 이 대통령은 우민관이 강하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런 식으로 국민을 우롱하는 이야기를, 그것도 담화 형식으로 발표하고 그랬다. 그런 속에서 7월 26일 등록 마감이 됐으니까 8월 4일까지 선거 운동일이 채 10일도 안 됐다. 보통 10일 선거 운동 기간이 있었다고들 이야기한다.

프레시안 : 관제 민의를 중시한 이승만 대통령의 이런 태도를 보면 엎드려 절 받기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어쨌건 이런 식으로 문을 연 대선 기간 중 조봉암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조봉암 측은 "우리는 이대로 더 4년을 갈 수 없다. 대통령으로 혁신 정치가 조봉암 선생을 선출하자"는 구호를 내세웠다. 그러면서 공산당 독재도,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강고히 반대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겠다는 것을 강조하며 선거에 임했다. 선거 사무장은 윤길중이었는데 사무차장은 예전에 서북청년회 부회장이었던 김성주가 했다는 것이 사람들 눈에 들어왔다.

경호는 당시 주먹 세계에서 김두한, 이정재와 함께 신화적 인물이었던 시라소니가 맡았다. 조봉암이 연설하지 못하도록 깡패들이 막으려 할 때 그걸 저지하는 역할을 했다고 돼 있다. 그런데 시라소니 관련 전기를 읽어보면 시라소니가 무서워서 경호를 그만뒀다고 한다. 조봉암이 이승만을 얼마나 세게 비판하면서 후려치는지 '이러면 나도 어떻게 되는 것 아니냐' 싶어서 슬그머니 빠져나갔다고 한다. 시라소니는 1956년에는 장면 부통령 후보 경호를 맡는다. 특이한 사람이다.

하여튼 선거 운동에 대한 방해가 워낙 공공연해서 선거 운동 자체가 아주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민국당 쪽에서 제일 심하게 조봉암을 공격하고 나섰다. 조병옥은 조봉암의 대통령 입후보 자체를 반대한다고 하면서 '조봉암은 민족 진영에 도전하는 스탈린이나 김일성과 다름없는 유고의 티토 정권을 흉악하게 꿈꾸고 있는 자다', 이런 식으로 공격했다. 그런데 당시 조봉암의 인기가 좋았던가 보더라. 7월 30일 조병옥 후보는 '반이승만 정책을 구실로 근로층의 좌경분자를 획득하려는 조봉암의 행동은 참을 수 없다'고 하면서 '조봉암이 입후보를 철회하지 않고 또 다수가 조봉암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이승만 후보에게 투표를 집중시키도록 노력하겠다', 이렇게 나온다. 1956년 대통령 선거를 미리 내다보게 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주장이다.

▲ 전설적인 주먹 시라소니는 1952년 대선에서 조봉암 후보 경호를 맡았다. 이미지는 KBS 드라마 <야인시대>의 시라소니. ⓒKBS 화면 갈무리


경찰 동원의 대명사 이범석조차 불평한 경찰의 선거 개입

프레시안 : 지적한 대로 1956년 대선에서 조병옥이 속한 민주당은 자기 당 후보 신익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지지자들에게 이른바 '추모 표'를 권한다. 민주당의 일부 간부는 그 직전까지 야권 연합을 논의하던 상대이던 조봉암 대신 이승만을 지지하는 게 낫다는 태도까지 보인다. 다시 돌아오면, 1952년 정부통령 선거를 거치며 조봉암의 정치적 위상은 상당히 높아진다.

서중석 : 이 선거에서는 이승만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서 당선됐다. 그러나 영남 지방에서 조봉암 표가 꽤 많이 나왔다. 그러면서 조봉암은 이시영을 누르고 차점자가 됐다. 주한 미국 대사관 자료를 보면 이제 조봉암은 확고히 이승만의 라이벌이 됐다고 표현돼 있다. 그건 조봉암이 기호지세(騎虎之勢), 즉 호랑이 등에 올라타서 내릴 수가 없게 됐다는 걸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선거가 제대로 치러졌느냐. 그렇지 않다는 건 부통령 선거를 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놀랍게도 함태영 후보가 무소속으로 나와서 294만 표를 얻었다. 자유당 부당수이던 이범석은 181만 표밖에 못 얻었다. 이범석은 유명한 사람이었고, 자유당 조직뿐만 아니라 족청 조직이 있었는데도 표가 그렇게 적었다. 함태영에 대해서는 그 당시 어떤 정치인이 이야기한 것이 있다. 국민이 모르는 사람,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분"이 부통령에 당선됐다는 것이었다. 대다수 국민들이 함태영 이 노인을 알 턱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100만 표 넘게 이범석을 앞서며 당선됐는가. 이건 정말 신기한 일을 넘어서서 신비에 속하는 일이다. 아무도 이걸 정확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관련 자료를 아무리 찾아봐도 어째서 함태영이 이렇게 득표했는지를 분명히 알 수가 없다. 뉴라이트 일부 연구자들이 이때 이승만이 이렇게 표를 많이 얻었다고 하면서 '농지 개혁을 잘한 것이 이승만 표로 연결된 것이다', 이런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 어렵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람한테 물어봤다. 그러면 함태영 표가 그렇게 나온 건 어떻게 된 것이냐고. 그런데 그건 대답을 안 한다.

프레시안 : 경찰이 노골적으로 선거에 개입한 점을 빼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경찰 선거라고 볼 수는 있다. 이범석의 사례에서도 이 점이 잘 드러난다. 이범석은 부산 정치 파동 때 내무부 장관으로서 경찰을 동원해 국회의원들을 여러 가지로 곤경에 빠뜨리지 않았나. 경찰 하면 이범석이 상기될 정도로 내무부 장관 때 경찰 동원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바로 그 이범석이 쓴 글을 보면, 이 선거 때 경찰들이 자기가 선거 운동을 못하게 막았다고 무지무지하게 불평한다. '이런 부정 선거가 어디 있느냐. 있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실제로 항의하러 다녔다. 이 사람 기반이라고 할 수 있던 충청남도 쪽 정도를 빼놓고는 나머지 지역에서는 경찰들이 이범석의 선거 운동을 상당히 방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경찰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겠는가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지만 경찰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걸 했는지, 투표와 개표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진행됐는지 등 이 시기 상황을 설명해줄 수 있는 자료들이 지금까지는 나오지 않고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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