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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경고 "성을 쌓는 자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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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경고 "성을 쌓는 자 망한다!" [유라시아 견문] 몽골 : 유라시아의 축도
신정(新政) : 백년의 급진

모든 비극의 출발에 '새 정치'가 있었다. 대청제국이 '신정(新政)'을 단행함으로써, 몽골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중국이 동방형 제국이기를 멈추고, 서구형 국민 국가가 되고자 한 것이다. 몽골로서는 배반이었다. 대청제국은 만몽연합에서 출발했다. 만주족은 몽골족과 협동함으로써 한족을 누르고 중원을 차지할 수 있었다. 몽골은 그 대가로 자치와 자주를 누렸다.

만주족은 잠재적 위협인 몽골족을 관리하기 위하여 '분리 통치'를 행한 것이지만, 몽골은 덕분에 '중국화'와 '한족화'를 면할 수 있었다. 라마불교를 신봉하고 몽골어를 사용하면서 근 300년을 지낸 것이다. 즉, 대청제국은 하나의 하늘 아래 두 개의 세계를 품고 있었다. 동남부는 농경 문명과 유교 세계였으며, 서북부는 유목 문명과 불교/이슬람 세계였다. 대청제국의 황제들은 한족들에게는 천자였으되, 몽골인들에게는 대칸이고 법왕이었다.

20세기의 '새 정치'란 바로 그 복합 국가를 철폐하는 것이었다. 신정과 함께 '근대화=중국화'가 본격화되었다. 유교 교육이 강요되었고, 한문 쓰기를 강제했다. 한족과의 통혼이 장려되었고, 유목을 접고 농사를 지으라고 했다. 몽골은 '변법(變法)'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그들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었다. 반(反)중국 운동에 승려와 사원이 앞장섰다. 대청제국에서 철수하기로 뜻을 모았다. 천하에서 이탈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1911년 독립을 선언했다. 신해 혁명을 촉발한 무창 봉기보다도 앞서 일어났다. 20세기 아시아 최초의 독립 혁명이 몽골의 푸른 초원에서 시작된 것이다.

절반의 성공이었다. 독립을 추구했으되, 자강에는 이르지 못했다. 자존과 자부는 있었으되, 자력갱생에는 못 미쳤다. 천하(天下)에서 벗어나자 중국은 외국(外國)이 되었다. 압도적인 이웃나라와 '평등'해져야했다. 그래서 남의 힘을 빌어야 하는 역설이 일어났다. '세력 균형'의 국제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정신적으로는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에 의존했다. 라마교로 연대하는 불교 연방 국가를 모색했다. 물질적으로는 러시아 제국에 기울었다. 러시아의 지원으로 신정(神政) 국가를 건설할 것을 도모했다. 1915년 맺어진 중국-몽골-러시아 간의 캬흐타 조약은 이행기의 흔적이었다. 몽골은 러시아의 보호 아래 독립을 인정받았으되, 중국 또한 '종주권'을 유지한다고 결착이 났다.

'자주적인 속국', 중화 세계의 조공국과 유사한 위치에 그쳤던 것이다. 몽골로서는 충분치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러시아에 안달했다. 그럼으로써 러시아 혁명의 파도에 휩쓸리고 말았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적색 물결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이 몽골이었다. 초원은 점점 붉게 물들었다.

1920년 몽골의 불교 지도자 보그드 칸이 중화민국 총통에게 절하기를 거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청제국에 이어 중화민국에서 벗어나는 제2차 독립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근대적인 정당도 등장했다. 몽골인민당이 창설되었다. 민족 혁명가 수흐바타르도 등장했다. 그는 보그드 칸의 인장을 들고 러시아를 찾았다. 그를 접견한 이는 러시아 제국의 차르가 아니라 소련의 혁명가 레닌이었다. 레닌은 종교 국가를 부정했다. 볼셰비즘을 따를 것을 요구했다.

결국 중화민국에서 떨어져나가기 위해서 공산주의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흐바타르가 소련의 적군과 귀환한 것은 1921년이었다. '몽골공화국'이 출범했다. 1924년에는 '몽골인민공화국'으로 개명했다. 세계 두 번째, 아시아 첫 번째 공산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위성 국가였다. 사실상 소련의 속국이었다. '근대화된 속국'이었다. '속국의 근대화'였다. 1945년 이후 동유럽에 도열했던 위성 국가(satellite state)들의 원조였다.

1924년 이래 소련판 '신정'이 단행되었다. 수도 이름도 바뀌었다. '붉은 영웅'이라는 뜻의 울란바토르(Улаанбаатар)가 되었다. 소련이 보기에 몽골은 낙후한 봉건 국가였다. 자본주의를 건너뛰고 공산주의로 곧장 도약할 것을 강권했다. 대약진이었다. 농업화와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말을 타던 유목민들이 집단 농장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되어갔다. 생래적으로 '모던 보이', '모던 걸'이 될 수 없었던 이들은 '봉건의 유산', '계급의 적'으로 지탄받았다. 소련의 근대화 정책에 반대하는 몽골인민당 간부들은 숙청을 면치 못했다. 독립 영웅 수흐바타르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련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다가 의문사로 제거되었다.

수흐바타르를 대체한 인물이 초이발산이었다. 소련 여성을 부인으로 둔 '몽골의 스탈린'이었다. 1952년 사망까지 장기 집권하며 몽골판 대숙청을 자행했다. 특히 라마 불교에 대한 탄압이 극성을 이루었다. 9할 이상의 불교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처형했다.

만주국 건국의 파장도 영향을 끼쳤다. 만주국은 은근히 중화 제국을 흉내 냈다. 오족협화(五族協和)와 왕도낙토(王道樂土)를 내세우며 동방의 이상 국가를 표방했다. 만주족의 마지막 황제, 푸이까지 모셔갔다. 몽골인들로서는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판 '신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로 만주국에 솔깃했던 것이다. 일본은 노련하고 노회했다. 만주국의 매력 공세로 몽골을 꾀어냈다. 중화민국서도 소비에트연방에서도 벗어나 만주국과 연합하는 '몽골국'이 되라고 유혹했다. 초이발산은 초조해졌다. 불교 세력들을 친일파로 몰아갔다. 만주국의 스파이라며 뿌리째 뽑으려 했다.

라마 불교 지도자들의 패착도 있었다. 전통적 지배층으로 지나치게 귀족적이었다. 대부분의 재산을 사원이 소유하며 민중 위에 군림했다. 어디까지나 소승(小乘)에 그쳤던 것이다. 소승의 민주화/민중화/근대화로써 대승(大乘)에는 이르지 못했다. 중생들을 구제하여 지상에 극락을 구현하는 보살로서의 책무에는 소홀했던 것이다. 하더라도 전통의 전면적 말살은 비극이었다. 불교 탄압은 곧 몽골 전통 문화를 담지한 지식 계층 전체에 대한 억압이었기 때문이다. 소련에서 유학한 과학적 유물론자들이 피바람을 일으키며 활개쳤다. '신청년'들의 객기와 광기가 '조드'가 되어 한바탕 초원을 휩쓸고 갔다.

결국 몽골은 새나라가 되었다. 새마을도 생겼다. 사원과 게르 대신에 공장과 집단 농장이 들어섰다. 말과 양, 가축도 국가 소유가 되었다. 5개년 생산 계획에 따라 젖을 짜고 가죽을 벗겼다. 몽골 문자와 티베트 문자도 사라져갔다. 러시아어의 키릴 문자가 책을 채우고 거리를 점령했다. 신생아의 이름마저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이 유행했다. 1963년 인구의 절반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되었다. 1985년에는 65%까지 달했다. 삽시간에 유목 국가가 노동자 국가가 된 것이다. '백년의 급진'이었다.

▲ 몽골의 독립 영웅 수흐바타르와 레닌. ⓒ팟캐스트 역사책읽는집

민주화 : 몽골화와 세계화

그 체제가 오래갈 수는 없었다. 1986년 쇄신(шинэчлэл) 운동이 분출했다. 1990년 다당제가 도입되었다. 1992년에는 헌법도 개정되었다. 몽골인민공화국은 사라졌다. 몽골국이 되었다. '민주화'로의 체제 이행을 경험한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를 지속하고 있는 중국/북조선/베트남/라오스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붉은 몽골'은 확실히 동방보다는 동구에 가까웠다. 몽골인민공화국 시절 교역 통계를 보더라도 소련이 75%, 동유럽이 15%를 차지했다. 중국은 4%에 그쳤다. 물류와 문류 양면에서 몽골은 동구권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몽골판 '민주화'의 향로는 탈동구화이자 재동방화이기도 했다.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한 해가 바로 쇄신 운동이 일어난 1986년이었다. 소련군이 철수한 것도 다당제가 시작된 1990년이었다. 적성국가 한국과 수교한 것도 1990년이다. 소련의 원조가 끊어지면서 붕괴 상태에 이르렀던 경제도 동방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으로 만회할 수 있었다. 재차 동아시아의 일원이 된 것이다.

흔히 1990년대 이후 몽골의 변화를 '민주화'라고 갈음한다. 충분치 못한 진술이다. 세계를 '민주 대 독재'로만 가르는 외눈박이 시선으로는 적절한 술어를 찾을 수가 없다. 나는 갈수록 '민주화'라는 말조차 삐딱하게 보고 있다. 20세기 초기의 문명화, 중반의 근대화와 아울러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지배 이념은 아니었던가 의심을 품고 있다.

문명화는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논리였다. 근대화는 개발 독재의 명분이 되었다. 민주화 또한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을 가리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발휘했다. 문명화-근대화-민주화 간에는 묘한 연속성도 있다. 근대화가 탈식민화를 왜곡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면, 민주화는 정부의 역할과 기능을 축소하고 무력화함으로써 발전 국가들이 축적해둔 국부를 강탈해가는 수단이 되었다. 하여 1980년대의 동아시아, 1990년대의 동유럽, 2000년대의 중앙아시아 및 중동을 아울러 '민주화'의 실질적 효과와 결과를 냉철하게 따져봐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여긴다. 유라시아의 곳곳을 견문하면서 민주화의 실상과 허상 또한 차근차근 살펴볼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몽골은 또 하나의 전범이었다. '쇼크 독트린'이 동유럽이나 동아시아보다 먼저 관철된 곳이다. '민주화' 이후 몽골에도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이 진출했다. 옛 공산국가에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질서'를 도입하는 전위 노릇을 한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몽골인민공화국 시절 축적해둔 몽골의 국부가 원체 변변치 않았다는 점이다. 종속 이론의 전형이라고 할 만큼 소련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민영화'와 '구조 조정'을 추진할 만한 자산이랄 게 마땅히 없었다. 덕분에 동아시아와 동유럽 국가들이 '민주화'의 경로에서 경험했던 파국적 금융 위기, '세계화의 덫'에도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오히려 몽골에서의 '민주화'란 '서구화'보다는 '몽골화'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탈동구화와 더불어 몽골의 전통과 개성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칭기즈칸의 복권이 상징적이다. 시내 복판에 있는 수흐바타르 광장부터 칭기즈칸 광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붉은 몽골' 시절 몽골인들은 차마 그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사회주의 국제주의' 정신에 어긋나는 민족주의의 화신으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하여 칭기즈칸의 귀환은 전통 복원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라마 불교도 다시 번창하기 시작했다. 지방에서는 토착적 무속 신앙도 기지개를 켜고 있다. 강철국가에 억눌렸던 민간사회의 저력이 재생하고 재활하고 있는 것이다.

유목민의 기질도 재차 발현되고 있다. 그들에게는 애당초 '고향'이라는 관념이 미미하다. 게르부터가 계절에 따른 이동식 주거 공간이다. 매년 10여 차례 거주지를 옮겨 다니며 사는 게 익숙한 사람들이다. 수도(首都)라는 발상조차도 희미했다. 현재의 울란바토르에 자리했던 이흐흐레(Ih Huree) 또한 대청제국 시절에는 스무 번도 넘게 장소를 이동했던 상징적 기호였을 따름이다. 몽골 세계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마저도 폐허처럼 남아있다. '성을 쌓는 자 망할 것이요,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 세계를 정복할 것이다'를 되뇌며 살았던 유목민다운 문화재였다.

역으로 말하면 몽골인들에게는 모든 곳이 내 집이고, 전 세계가 곧 고향이다. 과연 '민주화' 30년, 몽골 인구의 1할이 몽골 밖에서 살고 있다. 몽골의 안과 밖을 순회하며 노마디즘을 향유한다. 몽골인의 절반이 울란바토르에 이주해서 살고 있고, 그 울란바토르 시민의 절반은 외국 생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몽골화 및 전통화가 곧 세계화에 부합하는 것이다.

당장 나를 도와 몽골의 동서남북을 안내해 주었던 운전기사 에르덴도 부산에서 5년을 살다왔던 유목민의 후예였다. 난생 처음 본 해운대 바다를 추억으로 품고 있는 26세 청년이었다. 비단 한국뿐이 아니다. 당장 몽골 초원을 가로지르면 러시아와 중국은 물론이요, 터키도 한 걸음이다. 게다가 몽골인들은 외국어도 쉽게 배우는 편이라고 한다. 타고난 천성이고 물려받은 기질이렷다.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다. 생긴 대로 살아야 한다.

울란바토르 시내에는 유독 항공권을 판매하는 여행사들의 간판이 많았다. AIR TRANS, AIR MARKET, AIR WAYS 등 다양했다. 왕년의 초원길을 대신하여 하늘길을 애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몽골의 밖으로 나간 젊은이들은 온라인 금융망을 통하여 몽골의 안과 접속한다. MONEY GRAM, WESTERN UNION 등 글로벌 송금 업체도 여럿이었다. 즉 몽골은 영토 국가에서 가교 국가(Transit Mongolia)로 이행하고 있었다. 유목 국가의 속성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시골 간이역 같은 칭기즈칸 공항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한창 제2 국제공항을 시공하고 있었다.

▲ 칭기즈칸 동상. ⓒ팟캐스트 역사책읽는집

유라시아의 축도

붉은 광장에서 '역사 동맹'을 맺은 시진핑과 푸틴의 공동 성명 가운데 주목에 값하는 내용이 하나 있다.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경제연합(EAEU)과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를 단일 사업으로 통합하겠다는 것이다. 냉전기 유라시아의 패권를 두고 다투었던 북방 제국과 중원 제국이 유라시아의 대통합에 거국적으로 합의한 것이다.

그간 미국은 EAEU를 '재소련화'라고 폄하해 왔다. 그러나 중국의 일대일로가 결합됨으로써 판세가 전혀 달라졌다. 중국은 EAEU 너머 EU 까지 내다보고 있다. 일대와 일로를 통하여 유라시아연합과 유럽연합까지 연결해 내겠다는 것이 중국의 야심이고 복심이다.

흥미로운 것은 유라시아의 이 거시적 통합의 마지막 열쇠를 몽골이 쥐고 있다는 점이다. 몽골은 여태 EAEU 가입을 미루고 있다. EAEU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베트남보다도 신중한 행보이다. 중국이 주도하고 있는 상하이협력기구(SCO)도 가입을 보류하고 있다. 러시아의 경제 울타리에도, 중국의 안보 우산에도 쉽사리 편승하지 않겠다는 균형 감각이 돋보인다. 양 대국 사이에서 지난 100년간 단련된 맷집이라고 하겠다.

1915년과 2015년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몽골의 종주권은 중국에 있으되, 실질적으로는 러시아의 보호국이라는 캬흐타 조약의 시대는 지나갔다. 유라시아의 대일통을 위해서라도 중국도 러시아도 300만 소국 몽골을 정중하게 모시고 깍듯하게 대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유라시아 대통합의 화룡점정도 몽골이 찍게 될 것이다. 21세기 유라시아의 향방을 가늠하는 척도이자 축도이다.

과연 유라시아는 몽골세계제국으로 말미암아 최초로 하나가 되었다. 동서남북에서 각개약진 하던 국가와 문명들이 하나의 제국 아래 수렴됨으로써 '세계사'가 탄생하였고, '세계 지도'가 편찬되었다. 즉 몽골이 보유하고 있는 최대의 자산은 땅 밑에 묻혀 있는 지하자원이 아니다. 역사의 지층에 새겨두었던 유라시아 제국의 유산이다.

유럽형 세계 체제(Inter-state system)가 작동했던 20세기에는 사방이 막혀 있는 '내륙 국가'로 신음했으되, 유라시아형 세계 체제(Trans-state system)를 복구해가는 21세기에는 동서남북을 맺고 잇는 '가교 국가'로 비상하는 것이다. 북방에서도 오래된 세계가 새롭게, 다시, 펼쳐진다.

몽골 견문은 여기서 끝이 나지 않는다. (외)몽골국 아래에는 내몽골 자치주가 있다. 몽골도 일종의 분단 국가이다. '두 개의 몽골'이 병존한다. 내/외몽골 견문에 나선 가장 큰 이유이다. 한반도의 분단을 동아시아로 확대투영하지도 않고, 작금의 G2 구도를 과거로 소급적용하지도 않으며, 동아시아 (대)분단 체제의 실상을 궁리하는데 북방의 분단 국가를 참조항으로 삼을 만 한 것이다. 내몽골로 향하는 기차가 울란바토르를 떠난 시간은 9시 10분이었다. 해가 지지 않은 북방의 밤은 여전히 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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