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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없는 삶은 '앙꼬 없는 찐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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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없는 삶은 '앙꼬 없는 찐빵' [민들레] 놀이·② 놀이 본능을 일깨우자
놀이는 우정으로 통한다

"놀면 안 돼, 놀면 안 돼!"를 주문처럼 외는 사회에서 아이들을 놀게 해야 한다고 외치는 '철없는' 어른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힘을 얻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부터 문화 예술 교육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중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숨통을 틔워주자면서 자유학기제를 도입하기도 한다. 지난해 서울시교육청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날마다 100분씩 놀이 시간을 주기로 했다는 발표가 있자, 강원도교육청도 동참했다. 최근 전국 시도의 진보 교육감들이 함께 '어린이 놀이 헌장'을 선포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을 뺑뺑이 도는 것이 성장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일까.

근대 이후 부국강병을 추구한 국가들은 한결같이 아이들을 인적 자원으로 간주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경쟁 구조 속으로 밀어 넣고 숨도 못 쉬게 조이다가 아이들이 점점 망가지는 낌새가 보이자, 안 되겠다 싶어 조금 풀어주다 또다시 조이는 상황을 반복했다고 볼 수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떤 사회나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우리 사회는 지금 조금씩 풀리고 있는 단계인 듯하다. 일제 고사를 부활시키면서 아이들을 못살게 굴더니, 이제 너무 못살게 굴었나 하고 반성하는 기미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이런 반성이 얼마나 근본적인 성찰로 다가갈지는 알 수 없다. 아마 그리 쉽지 않을 거다. '더 잘 살아보자'는 욕망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한 이 악순환의 고리는 계속될 것이다.

그럼 손 놓고 있어야 하는 걸까. 아니다. 설령 이 고리를 아주 끊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씩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아이들에게 '노는 맛'을 알게 하는 거다. 그래서 제대로 놀 줄 아는 어른으로 자라게 하는 거다. 그러면 문화가 바뀐다. 일을 더 해서 돈을 좀 더 벌기보다 노는 시간을 확보하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기는 어른들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도 좀 더 인간적인 사회로 바뀔 것이다.

▲ 인생에 있어 '가장 찬란한 순간'은 앞뒤 가리지 않고 놀던 때가 아닐까? 영화 '써니'의 한 장면. ⓒ알로하픽쳐스

아이들을 위해 놀이터를 만들고 놀이 시간을 확보해주려는 착한(?) 어른들의 노력은 반가운 일이지만, 놀이는 무엇보다 여럿이 함께 어울리는 데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혼자 할 수 있는 놀이도 있지만, 여럿이 어울릴 때 생겨나는 놀이만큼 재미난 놀이는 드물다. 무엇보다 웃음은 사람들이 어울릴 때 터져 나오는 것이다. 춤추고 노래하는 것도 여럿이 어울려야 제맛이 난다. 영화 <써니>에서 소녀들이 그렇게 함께 어울리지 않았다면, 그처럼 빛나는 10대 시절을 보낼 수 있었을까? 특별한 놀이가 없어도 그저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나게 놀 수 있다.

때문에 놀이 본능을 일깨우는 길은 우정을 일깨우는 것과 통한다. 서로를 밟고 올라서도록 부추기는 경쟁 문화에서 건강한 놀이 문화가 꽃피기는 어렵다. 문화 예술 교육의 핵심이 10대들의 놀이 문화를 잘 가꾸는 데 있다고 한다면, 무엇보다 아이들을 경쟁 속으로 몰아넣지 말아야 한다. 협력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건강한 경쟁심이 아닌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경쟁심은 결국 자기 자신까지 죽이게 된다.

진정으로 아이들의 삶을 염려한다면, 그리고 그들의 창의성을 키우고자 한다면, 그들에게 우정의 가능성을 열어줘야 한다. 문화 예술 교육의 바탕 또한 거기에서 찾아야 한다. 창의 경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위해 아이들에게 친구를 돌려줘야 한다. 그저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뭔가를 작당하고 만들어내는 그 에너지가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되고, 세상을 구원하게 될 것이다. 놀이는 우정을 키우고, 우정은 놀이를 만들어낸다. 이 선순환의 고리가 아이들을 살리고 우리 사회를 살리는 고리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아이들만 놀아야 할까?

놀이는 어린아이들에게만 중요한 게 아니다. 모든 세대를 막론하고 삶의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자. 어린 시절에 구슬치기, 비석치기 하면서 많이 놀았던 어른들은 지금 잘 놀 줄 아는가? 우리 사회 어디나 어른들의 놀이 문화는 비슷하다. 술집, 그다음은 노래방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비석치기나 다방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뭔가 어른에게 어울리는 놀이 문화가 필요한데 지금의 어른 세대는 그걸 갖추지 못한 것 같다. 고스톱과 내기 골프 정도를 추가할 수 있을까?

그나마 자기 돈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놀거리를 찾기가 비교적 쉽지만, 마음을 내기가 쉽지 않고 시간을 내기도 어렵다. 어려서 아무리 많이 놀았어도 청소년기에 제대로 놀아보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잘 놀 줄 모르는 게 아닐까? 대개 10대 시절에 경험한 문화가 성인기까지 이어진다. 20대 이후의 삶의 질은 대체로 10대 시절의 삶의 질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음식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듯이 놀아본 사람이 놀 줄 아는 법이다. 최근 직장인 밴드가 유행하고, 온갖 동호회들이 생겨나는 걸 보면 그래도 놀이에 목마른 어른들이 나름의 살길을 찾아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이들의 면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10대 시절에 조금이라도 놀아본 사람들이 많다. 기타 줄이라도 튕겨본 거다.

오로지 시험 공부만 하도록 강요하는 사회에서, 아이들이 잘 놀 수 있으려면 웬만큼 강심장이 아니면 안 된다. 별 볼일 없는 대학에 가서 별 볼 일 없는 직장에 들어가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 각오가 되어 있어야, 그제야 좀 놀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 법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시험 공부에 올인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제대로 놀지도 못하면서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현실이다. '범생이'가 되거나 확실한 '날라리'가 되는 게 자기 길을 찾는데, 그나마 좀 더 확실한 길이 될 텐데 둘 다 쉬운 일이 아닌 거다.

놀면 안 되는 줄 알았던 모범생들은 어른이 돼서도 잘 놀 줄을 모른다. 기껏해야 책이나 보고 음악을 듣거나 영화관을 찾는 정도다. 10대 시절 시험 공부 외에 그나마 하던 짓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생활기록부 취미란에는 거의 대부분 '독서'라고 적혀 있을 것이다. 집에 전축이라도 있는 아이들은 '음악 감상'을 꼽기도 했다. 영화관은 단체관람 때나 가는 곳이거나, 간혹 날라리들이 선생님 눈을 피해 드나드는 곳이었다. (사족 : 요즘처럼 밥 먹듯이 일상이 된 영화 관람 그 자체를 놀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 벼르고 벼르다 큰 맘 먹고 찾게 되는 영화관, 그것도 선생님 눈을 피해 즐기는 것이야말로 놀이가 아니었을까. 그러고서 교실에서 떠벌이게 되는 무용담은 놀이의 여흥 같은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골목에서 놀 수도 있었지만, 10대가 되면 더 이상 골목에서 놀기도 어려웠다. 시골 아이들은 그나마 낚시하러 다니거나 산을 찾거나 강이나 바다에서 놀 수 있었지만, 도시 아이들은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수영장이나 스케이트장을 다닐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은 딱히 놀 거리가 없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공을 차거나 농구를 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저렴하게 놀 수 있는 길이었다. 몸보다 머리 쓰는 일에 소질이 있는 아이들은 바둑 같은 데 재미를 붙이기도 했다.

최근 산행 바람이 불면서 아웃도어 시장이 달아오른 것도 어린 시절 자연과 친숙했던 세대가 먹고살 만해지면서 다시금 자연에 눈을 뜨면서 생겨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좀 더 살 만한 이들 사이에서 골프 바람이 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들의 경우 문화 센터를 찾는 것이 나름 놀 거리를 찾는 길이 되고 있다. 먹고살 만해지면서 문화 예술에 눈을 뜨기 시작한 셈이다. 춤과 노래, 시와 그림 같은 모든 문화와 예술은 사실상 인간의 놀이본능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놀이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저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년)는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적 각성의 힘은 그 시대에 널리 퍼진 놀이 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르네상스 시대는 곧 '놀이의 황금기'라는 것이다. 19세기 이후 급격히 진행된 산업화와 도시화는 놀이 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제는 놀이도 사업의 대상이 되어 산업 일부가 되고 있다. 여가 산업은 갈수록 덩치를 키워가고 있고,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놀이 산업 역시 사교육시장 못지않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간다. 거기에 '치료'를 빙자한 갖은 요법들이 등장하면서 놀이는 점점 다른 뭔가를 위한 수단이 되어간다. 어른들에게 놀이는 다음의 노동을 위한 휴식과 재충전의 수단이 되었고, 아이들에게는 치료와 학습을 위한 방편이 되고 있다.

▲ 네델란드 역사가 하위징아는 '유희의 인간'이라는 뜻으로,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림은 앙리 마티스의 1910년作 '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그렸다. ⓒgoogle.com

최근에는 잘 놀아야 공부도 잘한다는 말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맞는 말 같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아이들이 진짜 배워야 할 것을 놀이 속에서 배운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어울려 놀면서 진짜 중요한 '삶의 기술'을 배운다. 죽었다 살아나고, 죽었다 살아나는 놀이를 하면서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힘이 길러진다. 그리고 친구들과 밀고 당기는 관계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노하우를 터득하기도 한다. 그런 것은 책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놀이다운 놀이의 본질 중 하나는 '무목적성'이다. 아이들은 그저 논다. 무엇을 위해 노는 것이 아니라, 놀고 싶어 노는 것이다. 그렇게 노는 가운데, 많은 일이 저절로 일어난다. 치유도 일어나고, 성장도 일어나고, 창의성도 꽃핀다. 아이에게든 어른에게든 놀이는 삶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놀이가 빠진 삶은 '앙꼬 없는 찐빵' 같은 삶이다. 놀이 본능은, 곧 삶의 본능이다. 이 본능을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그답게 사는 길이다.

놀이 본능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쩌면 모든 동물들이 타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끼들이 뒹굴며 노는 모습을 보면 적어도 포유류에게는 유전자에 놀이 본능이 내재된 것 같다. 학원을 뺑뺑이 도는 그 틈새를 비집고서라도 노는 것이 아이들이다. 시간과 공간만 주어지면 이 본능은 깨어나게 되어 있다. 이는 사실 돈이 드는 일도 아니다. 비싼 원목으로 놀이터를 만들어주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빈 시간과 공간 그리고 친구들을 선물해주는 것이다.

놀이터를 바꾸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놀이터는 사실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위한 차선책일 따름이다. 어떤 놀이터도 모래와 자갈, 강물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천연의 놀이터를 흉내 낼 수 없다. 어릴 적 강에서는 해마다 한두 명이 익사하는 사고가 일어났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큼 강은 매혹적이었다. 아이들은 여름날이면 강에서 사다시피 했지만 어른들은 별걱정을 하지 않았다. 삶이란 그렇게 위험을 동반하기 마련임을 알았던 것일까.

강물이 오염되고 수영장이 늘어나면서 강변을 찾는 이들도 사라지고, 흐르는 강물처럼 강가에서 마냥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도 사라졌다. 강에서 노는 즐거움을 잊어버린 아이들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강변을 도배해서 강을 망쳐놓고는 '삐까번쩍한' 놀이터를 안겨준들 아이들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질까. 하지만 어찌할 것인가. 강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놀이터라도 안겨줘야 하는 것이 이 시대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인 것을….

자연을 안겨줄 수 없다면 괜찮은 놀이터라도 만들어주고, 좀 더 자라면 친구를 만나게 할 일이다. 친구랑 어울려 놀 수 있는 시간을 주고, 내일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 즐길 수 있게 하자. 재미있는 일은 놀이가 되고 재미없는 놀이는 고역이 되는 법이다. 리누스 토발즈도 '단순히 재미로(Just for fun)' 하다 보니, '리눅스'를 만들게 되었다지 않는가. 자기가 하는 일을 놀이로 만들 줄 아는 능력은 인간의 가장 고등 능력이 아닐까. 공자님도 말씀하셨다시피,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누가 아는가. 잘 놀다 보면 공부를 즐길 줄도 알게 될지. 사실 마지못해 하는 공부가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노는 사람 구경하지 말고

노는 사람들 구경이나 하면서 여가를 보내는 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싸움 구경처럼 놀이 구경도 재미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게 일상이 되면 스스로 노는 법을 잊어버리게 된다. 안방과 영화관에서 구경꾼의 인생을 사는 것은 사실 서글픈 일이다. 구경꾼의 삶이 아니라 자기 인생 드라마의 주역이 되어 제대로 살아보게 돕는 것이 교육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바보 만들기>(김기협 옮김, 민들레 펴냄)를 쓴 존 테일러 개토는 정규 학교에서 스스로 고안한 '게릴라 학습'을 시도하면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현실에 직접 뛰어드는 것이 포장된 세상을 화면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보람 있는 일이다. 내가 너희에게 지워진 구경꾼으로서의 삶을 집어던질 수 있도록 돕겠다. 그래서 자기 삶의 플레이어가 되도록 할 거다."(<수상한 학교>(오필선 옮김, 민들레 펴냄), 168쪽) 아이들은 학교 바깥으로 나가 인턴십과 다양한 활동들을 시도하며 "삶의 바다에 풍덩 빠지면서" 놀랍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려서 친구들과 어울려 충분히 놀다 보면 자신이 선 자리, 상황과 맥락을 파악하는 힘이 저절로 길러진다. 몰입의 능력도 자라난다. 아이들이 잘 자라기를 바란다면 무엇보다 아이들을 놀게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해 어른들이 애써 같이 놀아줄 필요도 없다. 그냥 '냅두면' 된다. 놀이운동가 편해문은 "어른이 없는 곳에서 아이들이 하는 모든 활동"이 놀이라고 말한다. 아이들끼리 어울리면 놀게 되어 있다. 그 속에서 창조성도 살아나고 세상을 살아갈 힘도 얻게 된다. 노는 꼴을 못 봐주는 어른들이 문제지 노는 아이들, 놀 줄 모르는 아이들이 문제는 아니다.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볼 일이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바로 가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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