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무슨…". 흔히들 하는 얘깁니다. 시간이 흘렀으니, 방식도 시대 변화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정보기관도 '21세기식'으로 운영되고 있을까요?
1970년대 탈북자 김관섭 할아버지와 그로부터 20년 뒤인 1990년대 탈북한 이민복 씨는 정보기관원들로부터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20년 뒤인 2010년대 탈북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전과 같은 폭행은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간첩으로 몰아가기 위한 협박과 회유는 21세기에도 여전했습니다. '유우성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공문서 위조 등 사정기관의 간첩 조작극은 재판을 통해 낱낱이 까발려졌습니다. '제대로 혼쭐이 났으니, 앞으론 이런 일 없겠지….' 많은 이들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유우성 간첩 조작극'으로 나라가 들썩이던 2014년 3월, 검찰은 또다시 '북한 보위사령부 직파 간첩 사건'을 발표합니다.
결론부터 꺼냅니다. 이 사건의 피의자 철이(가명, 41) 씨는 지난해 가을 1심에서, 유우성 씨와 마찬가지로 '간첩죄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검찰의 항소로 현재는 2심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검찰과 국가정보원이 내미는 증거는 오로지 철이 씨의 자백 하나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백은 과연 어떻게 나온 것일까요?
앞으로 소개할 내용은 하루아침에 '보위사 직파 간첩'이 되어버린 철이 씨의 기막힌 사연입니다. 우리 정보기관이 멀쩡하던 사람을 어떤 식으로 간첩으로 몰아가는지를, 철이 씨의 육성 증언과 재판 기록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드립니다.
"낮은 출신 성분으로는… 돈이라도 벌자"
"내가 북한에 살 때, 공부는 잘했더란 말입니다. 학교 다닐 때 학생회장도 하고요. 근데 출신 성분이 문제였습니다. 처음엔 노력하면 어찌어찌 됐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토대 좋은 사람이랑 차이가 나더라고요. 학교 졸업 할 때는 우리 군에서 성적도 상위권이었는데 제 토대가 좋지 않으니 전문대를 추천해주더라고요."
북한 사회주의 체제에 반감이 생기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출신 성분이 낮다는 이유로 진급에서도 번번이 밀려났습니다.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내 아무리 노력해도 발전할 수 없으니 돈이라도 벌자.'
남한이나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이 북에 남은 가족에게 보낼 돈을 대신 보내주는 송금 브로커 일을 시작했습니다. 수수료 벌이가 꽤 쏠쏠했습니다. 친척 한 분이 탈북하겠다는 걸 도와준 일을 계기로 탈북 브로커 일에도 손을 댔습니다. 국경경비대 대원들과 연이 닿아 탈북 브로커 일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습니다.
수사기관의 단속에 걸릴 때면 그 자리에서 바로 돈을 꺼냈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파출소나 경찰서의 말단 직원에 해당하는 그들은 벌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철이 씨가 돈을 꺼내 들면 지방의 말단 수사기관 직원들은 조용히 호주머니에 넣고 사건을 덮었습니다. 수사기관에 있는 지인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단속망을 피해갔습니다. 그땐, 체제의 모순을 견디고 살려면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워낙 범법 행위를 많이 했던 탓에, 동네 수사기관 직원들에게 철이 씨는 요주의 인물로 찍히고 말았습니다. 주변에서 탈북 사건이 터질 때면 곧잘 용의자로 의심받고 수사기관에 잡혀가 조사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몇 번을 잡혀 갔다 오니, 북한에 발붙이고 살기 고달프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에게 "이렇게 살 바엔 한국에 가자"고 했습니다.
아내의 체포, 탈북을 결심하다
어느 날, 형편이 좋지 않은 친척 조카가 북한을 떠나게 도와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울며불며 사정하는 통에 아내와 함께 탈북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2013년 1월 말경, 국경 근처에 있는 장모 집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밤을 지내고 아침 일찍 떠나기로 작전을 짠 뒤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새벽에 슬쩍 잠이 깨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넋을 놓고 있었습니다.
별안간 밖이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뭔가 사달이 났다는 생각에 두만강 근처로 달려갔습니다. 새벽 일찍 조카를 데리고 나간 아내는 이미 국경경비대에 체포된 상태였습니다. 이번엔 돈을 써도 소용없었습니다. 아내는 현장에서 탈북을 도운 게 들통 났으니 이미 10년 이상 형을 받게 됐습니다. 수사기관 직원이 이젠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너 인마, 네 아내가 그러는데, 니가 한국 가겠다고 했다며? 너도 조카가 강 건널 때 나가려고 했지?"
아내도 구류장에 들어간 상황에서, 본인까지 탈북 방조죄로 잡혀 들어갈 터였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송금을 받아준 일도 발각되어 체포령까지 떨어졌습니다. 이제는 자신이라도 잡히지 않고 탈북해서 돈을 벌어 보내야 구류 중인 아내와 가족들 모두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자신과 가족 모두를 지키는 길은 북한을 떠나는 길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까지 무사히 데려다주겠다"던 형님이…
탈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유대용(가명)이라는 자와 통화를 하게 됐습니다. 예전에 송금 브로커 일로 통화를 하는 과정에 알게 된 같은 고향 출신 탈북자입니다. 그는 철이 씨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내가 한국에서 꽤 힘이 있는 탈북 브로커요. 내 일을 잘 도와주면 한국까지 무사히 데려다주겠소."
유대용이 요구한 것은 북한 내부 정보였습니다. '남한 국정원 사람과 연결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언뜻 스치고 지나갔지만, 탈북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5월 중순, 유대용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 중국에 나와 있다며, 박화선(가명)이라는 여자와 그의 딸과 함께 강을 건너면 돈도 주고 철이 씨를 한국에 데려다주겠다고 했습니다. 꼭 그러겠노라 답했습니다.
40년 일생을 살아온 땅이라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젠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유대용을 만나기 위해선 우선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박화선의 어린 딸을 배낭에 넣어 밀수품처럼 위장해 국경경비대 군인을 속이는 등 우여곡절 끝에 강을 건넌 뒤, 유대용과 통화를 하고 약속 장소로 갔습니다. 그러나 종일 기다려도 유대용은 오지 않았습니다. 밤늦게 연락이 다시 닿았습니다. 그는 가는 길이 경비가 삼엄하니 자신이 있는 장소로 와 달라 했습니다. 겨우 찾아갔지만, 유대용은 또 약속 장소를 옮겼습니다. 날이 밝아 철이 씨 일행이 더는 걸어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음에도, 유대용은 철이 씨 일행이 있는 곳과 40~50리 떨어진 곳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밀수꾼은 이제 걸어가면 잡힌다며, 더는 못 가겠다고 했습니다.
이미 밥도 떨어지고, 물도 동났습니다. 어른들보다 박화선의 딸아이가 문제였습니다. 풀숲을 헤쳐 산딸기를 겨우 먹이며 우는 아이를 달래며 버텼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용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화가 치밀었습니다. 결국 한국에 있는 박화선네 가족의 도움으로 다른 브로커에게 연락해 겨우 연길까지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7월 초 태국에 갔습니다. 난민 절차에 따라 방콕 이민국 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태국에서 생활할 돈이 다 떨어지자, 남한에 있는 박화선의 친척에게 송금을 부탁하기 위해 전화를 했습니다. 박화선의 친척은 송금을 약속한 뒤 이상한 얘길 꺼냈습니다.
"아저씨(철이 씨)네 형님(유대용)이라는 사람이 아저씨를 보위부 정보원이고, 보위부 임무를 받고 오는 간첩이라고 국정원에 신고했다는데요? 아저씨 간첩인 건 아니죠?"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불안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은 유대용이 철이 씨 일행을 한국에 데려오는 데 실패해 박화선의 가족으로부터 돈을 받지 못하자, 돈을 내놓으라며 그 가족에게 철이 씨가 간첩이라고 협박을 하기 시작했고, 국정원에도 철이 씨를 간첩이라고 거짓 신고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북한 있을 때 <화려한 휴가>, <이중간첩> 같은 한국 영화를 많이 봤어요. 영화를 보면 고문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혹시 고문받으면 어쩌나 겁이 나는 거예요. 한국에는 내가 믿을 사람이 없으니까 더 무서웠어요."
"너 간첩이지?"
2013년 8월 중순경 다른 탈북자들과 섞여 겨우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국정원 사람 대여섯 명이 다가왔습니다. 그 중엔 권총을 찬 사람도 있었습니다.
중앙합동신문센터(북이탈주민보호센터의 예전 명칭)에 가기 전 신체검사를 하겠다며 공항에서 20여 분 정도 거리의 모 병원으로 갔습니다. 큰 강당 같은 데서 순서대로 서서 검진을 기다리는데, 권총을 찬 국정원 직원이 건들건들한 걸음새로 왔다 갔다 했습니다.
"내가 김정일을 죽이려고 북한에 네 번 갔다 온 사람이다."
그 직원이 별안간 철이 씨 이름을 크게 불렀습니다. 손가락으로는 가슴팍에 걸린 이름표를 가리킨 채였습니다.
"철이, 너 간첩이지?"
서른 명 넘는 탈북자들이 순간 숨을 죽이고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태국에서부터 가슴을 졸여왔던 차였습니다. '결국 간첩 의심을 받는 건가', 앞이 깜깜해졌습니다.
합신센터에 입소하자마자 직원들은 몸수색을 한다며 옷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알몸 상태로 검사를 받았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철이 씨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박화선 씨 짐 가방에서 철이 씨의 사진이 나온 것이었습니다. 욕 섞인 반말 세례가 날아들었습니다.
"야, 이 개새끼야, 니 짐은 니가 건사해야지, 너 말 안 들을래?"
직원들은 철이 씨를 '대기방'에 데리고 갔습니다. 본격적으로 조사를 받기 전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대기방에 있는 동안 그는 답답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종료방'에 있는 탈북자들에게는 담배를 피울 수 있게 했지만, '대기방' 사람들에게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태국 이민국에서도 하루에 한 갑씩 폈던 그는 한국에 들어와선 담배를 피우지 못하니 금단 증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담뱃값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
입소일로부터 보름이 훌쩍 지난 9월 초순경, 센터 직원이 철이 씨에게 대기방에서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가 가게 된 곳은 화장실이 딸려 있는 독방이었습니다. 얼마간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자, 어떤 남자가 방에 들어왔습니다. 조사관이었습니다. 철이 씨를 신문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다시 방을 나가서 2층에 있는 다른 조사실로 갔습니다.
"너 보위부 정보원했다며?"
"무슨 소립니까. 나는 '눈깔(북한에서 정보원을 이르는 은어)' 할 일이 없습니다. 눈깔은 돈 없는 사람이나 하는 거지, 나는 죄 질러놓고도 돈 주고 나온 사람입니다."
조사관은 계속 그에게 정보원 노릇을 하지 않았느냐 물었습니다. 그는 답답함에 담배부터 찾았습니다. 조사관이 선뜻 내주었습니다. 건물 밖에서 담배를 같이 피우는 동안, 다시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야, 너 북한에서 시키면 하게 돼있지 않나."
"예 맞습니다."
"북한에서 시키면 하게 돼 있는데, 야 보위부 정보원 하라면 너 했지, 안 하고 배기나. 여기에도 숱한 탈북자들이 가득한데 이 중에도 보위부 정보원 한 사람이 가득한데, 야 인마 그것 가지고 너 시시하게 노나. 북한에서 있은 일 가지고 여기서 너 추궁하는 사람 하나도 없어. 정보원 한 사람들 누구도 처벌 안 한다."
조사관은 자꾸만 '인정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말을 툭 던졌습니다.
"야, 너 담뱃값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
* 이 기사는 미디어 다음과 공동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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