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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역삼동과 대치동, 당신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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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역삼동과 대치동, 당신의 선택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1920년 정세권의 북촌 입성
부동산 투자 및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를 물어보면, 아래와 같은 답을 듣게 된다.

첫째는 위치.
둘째도 위치.
셋째도 위치.

부동산 투자에서 위치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주 근거리에 위치하였음에도, 부동산 가격 차이가 큰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사교육 1번지 강남구 대치동의 경우, 근래 재개발이 완료되어 입주가 시작된 아파트(50평형대)의 전셋값이 20억 원에 육박하고 시세는 20억 원을 능가한다. 하지만 바로 옆 동네 역삼동만 해도 50평형대(매매가) 시세는 20억 원 이하다.

만약 시계를 30년 전으로 돌려 1980년대 초·중반을 돌이켜보면, 역삼동 지역은 지하철 2호선이 지나가는 교통 좋은 동네임에 비해, 대치동 지역은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지역이었다.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은마아파트 주변은 대규모 논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지하철 3호선이 양재에서 대치동으로 연장된 것은 1993년의 일이었고, 대치동 학원가는 1990년대 초반 이후에 형성되었다. 1980년대 두 지역의 가격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음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격차는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만약 1980년대 초, 서울로 갓 이주하려는 사람이 어느 지역–강북 또는 강남, 만약 강남이라면 역삼동 또는 대치동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현재의 자산 규모는 매우 다를 것이다.

정세권 선생이 하이면을 떠나 경성에 정착한 1920년

가족을 이끌고 상경한 정세권은 거주지와 사업 소재지를 선택해야 할 결정의 순간에 직면한다.

당시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경성의 어느 지역을 거주지로 정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경우, 여러 경우의 수가 존재하였다.

사대문 밖에 거주할 것인가 아니면 사대문 안에 거주할 것인가?
만약 사대문 안에 거주하고자 한다면, 남촌인가 북촌인가?

사대문 밖을 살펴보면, 경성 북쪽과 서쪽은 지형적으로 확장하기 힘든 형편이었고, 남쪽은 일본인들 주거지가 후암동을 거쳐 용산으로 뻗어 가는 중이었다. 따라서 부동산 디벨로퍼에게 실질적으로 남은 선택은 동대문 밖 창신동 주변이다.

현재의 창신동은 동대문 상권의 의류 제조 지구로 서민 주거 지역으로 지금은 인식되고 있으나,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의 창신동은 부유층 거주지 혹은 별장지였다. 일례로, 한일은행 설립자 조병택의 저택과 미디어 아티스트 고(故) 백남준(백남준의 부친 백낙승은 당시 대재벌)의 생가터가 창신동에 있다. 하지만 1920년대 경성의 산업 도시화에 맞물려 창신동은 지방의 빈민들이 몰려드는 급변의 지역으로 돌변한다.

1933년 <동아일보>에는 시 당국이 창신동 소재 토막집을 강제 철거했다는 아래의 기사가 실렸다.

"임원상은 동대문 밖 창신동 626번지에 움집을 짓고 사는지 10년이 넘었다.(즉, 1923년 이전이다.) 무너진 성벽을 의지하고 겨우 비를 피하고 살던 터인데 거기에 모여든 최익준 씨의 식구, 유성규 씨의 식구가 역시 근방에 움(막)을 파고 그날그날을 연명하고 지냈다."

▲ <동아일보>, '십년토굴을 일조에 철퇴, 창신동 성터에 지은 토막민의 가련한 동정', 1933.05.31

기사를 통해 1920년대 초반부터 창신동 지역에 토막집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듯이, 매우 혼란스런 상황의 창신동은 정세권에게 첫 정착지로써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창신동 지역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저택이 있었던 창신동에 토막집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대규모 수요가 존재한다는 방증이었고, 그는 이후 1930년대 창신동에서 한옥 집단 지구를 개발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첫 정착지로 사대문 안 지역을 마음에 두게 된다. 하지만 앞서 연재에서 설명하였듯이 종로 이남 남촌 지역은 이미 일본인 세력권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종로 이북 지역이었고, 그중에서도 현재의 북촌 일대(삼청동, 가회동, 계동, 낙원동 일대)였다.

북촌 입성, 디벨로퍼로서 당연한 선택

디벨로퍼는 토지를 확보하고 건물을 지어 분양하거나 임대를 하여 수익을 낸다. 따라서 첫 조건이 토지 확보인데, 좋은 위치의 토지를 남들보다 빠르고 쉽게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토지의 규모도 중요한데, 여러 작은 토지들보다는 단일의 대규모 토지가 개발에 유리하다. 같은 규모의 토지여도 50평대 토지 10곳을 개발하기보다는 단일의 500평 토지 개발을 자연스레 선호한다. 한 곳을 개발한다고 치더라도 최소의 투입 비용(예를 들어, 최소 1인의 건설 관리자 상주)이 존재하기에, 50평 10곳 동시 개발의 총공사비는 단일의 500평 토지 개발보다 더 많다.

정세권에게도 규모가 상대적으로 큰 토지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지역이 매력적이었고, 이런 관점에서 삼청동, 가회동, 계동, 익선동 지역은 그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일제 통치가 이어지면서 조선의 귀족 출신들마저도 가세가 기울어 자신들의 토지를 대거 시장에 내놓았고, 결과적으로 토지 시장에서 물건(토지) 구하기가 쉬웠다. 실제 정세권은 조선 왕족의 종친 이해승 소유의 누궁동(익선동 166번지)과 고종의 서자 완화궁의 사저 (익선동 33번지)를 매입하여 한옥 집단 지구로 개발한다.1)

아래의 기사는 당시 조선 왕족 소유의 부지(광화문 소재 미술 공장)가 일본인에게 매도되었다는 소식으로, 이는 대규모 토지들이 토지 시장에 나타났음을 알려주는 방증이다.

▲ <동아일보>, '이왕가 미술공장 일본인에게 매도', 1922.02.03

다른 중요한 점은 부유층 부동산 매물은 은밀하게 거래된다는 것이다. 즉, 물건이 모든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공개되는 것이 아니라, 지인을 통해 자본력이 있는 일부에게만 정보가 제공된다. 성북동과 평창동 등 부유층 밀집지역에서 거래되는 물건은 매우 한정된 부동산 중개업소를 통해서만 전달된다. 지체 높은 조선의 귀족들이 본인의 토지를 부동산 시장에 매물로 내놓을 때 정보를 모든 대중에게 공표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자본가에게만 정보가 제공되는 것을 원했을 것이다. 이런 정보 전달은 자연스레 대면 접촉 기회가 많을수록 쉬워진다. 서로의 신뢰가 쌓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북촌 입성은 부동산 시장에 나온 대규모 토지 정보를 쉽게 알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지주 작업을 하기 위한 대면 접촉이 보다 쉽다는 점 등에서 디벨로퍼로서 당연하고 현명한 선택이었다.

정세권 선생 첫째 따님 정정식 님(이화여대 명예교수)의 증언이다.

"제가 1921년 계동서 났으니까, 계동으로 바로 들어가셨던 것 같아요. 그때 계동에는 맹현동산이라고 맹정승 땅이 있었어요. 그 동산이 관리가 안 된 상태여서, 몰래 들어가서 동산에서 막 구르고 놀았어요."

1) 구경하, 김경민 '1920년대 근대적 디벨로퍼의 등장과 그 배경'. <한국경제지리학회지> 제17권 제4호,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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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부동산/도시계획) 취득 후,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환경대학원)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부동산 금융과 도시/부동산개발이며, 현재는 20세기 초 경성의 도시개발과 사회적기업과 경제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Urban Hybrid (비영리 퍼블릭 디벨로퍼)의 설립자겸 고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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