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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떻게 10년 만에 부동산 재벌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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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떻게 10년 만에 부동산 재벌이 되었나?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상경 10년 후 재벌이 되다.
1929년 <경성편람>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여러 분야의 대표적 인물들이 각 분야를 소개한 것인데, 나름 경성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경성은 조선의 수도이요. 삼십여만 시민이 사는 대도시일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조선의 심장이라 할 것인데 이때까지 완전히 소개한 책은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누구나 유감으로 여기던 바, 이번에 경성 인사동에 있는 홍문사 편집부에서는 <경성편람>이라는 책을 발행하기로 계획하고 여러 학자의 원조와 각 신문사 편집국장의 고문 하에 가장 완전히 경성을 소개하기 위하여…."

<경성편람>은 경성을 최초로 소개하려는 목적이 있었기에 신문 등의 주목을 받았다. 당대 학자와 신문사 편집국장 등이 논의를 거쳐 대표적 인물을 섭외하고 내용을 검토했다.

교육, 종교, 언론, 금융, 실업, 과학(발명), 의료, 법조, 건축 등 총 열아홉 분야를 정한 후, 각 분야의 대표적 인물들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교육계에는 최두선(대한적십자사 총재, 경성방직 회장), 유억겸(연희전문 총장, 문교부 장관), 김활란(이화여대 총장), 언론계에서는 송진우(동아일보) 등, 법조계에서는 김병로(초대 대법원장) 등이 참여했다.

그리고 건축계(건축설계가 아닌 부동산/건설업)를 대표해 건양사의 정세권이 참석했다. 그는 당시 '건축계로 본 경성‘이라는 글을 썼다. 정세권의 나이 41세, 경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건양사를 설립한 지 불과 10년도 안 된 시기였다. 그사이 조선을 대표하는 부동산업계의 거두로 성장한 셈이다.

그의 회사 건양사가 어느 정도 지명도가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지표들은 그 외에도 많다. 1936년 <매일신보>는 신흥 자본가로 성장한 인물들을 조명하는 시리즈 '나는 어떻게 성공하였나'를 연재하였다. 5회차 연재에서 부동산/건설업계를 대표하여 정세권과의 인터뷰가 실렸다.

▲ <경성편람>(홍문사, 1929)
"최근 10년 전부터 시골서 소위 견딘다는 사람들(약간의 자산이 있는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와서 서울 장안에는 그들이 사는 산뜻한 새 집으로 군데군데 난데없는 새 부락을 이루었습니다. (…) 이런 경향으로 장안에 갑자기 집 장사가 많이 생겼고 또 그 집 장사들이 돈푼도 족히 모았습니다만, 그 중에도 (정세권의) 건양사라면 아낙네들까지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이름이 났습니다."

일반 아녀자들까지도 정세권의 건양사를 알 만큼 대중들에게 이미 보편화된 회사라는 것이다. 이는 매우 대단한 일이라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인 상류층 또는 유학 출신들이 살고자 하였던 주택은 한옥이라기보다는 문화 주택이라 불렸던 서양식 주택이었다. 근대적 디벨로퍼들이 건설했던 한옥은 규모가 매우 작은 주택을 대규모로 지었기에, 현재의 다세대 다가구 정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브랜드가 있는 다세대 다가구 전문 건설 및 임대 업체를 알지 못한다. 대기업 건설 회사마저도 자체 브랜드(삼성의 래미안, 대림산업의 e편한세상 등)를 들고나온 것은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이후였다. 하지만 지금부터 근 100년 전 일반인들에게 주택 브랜드를 각인시킨 디벨로퍼가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것이다.
또 다른 예는 소설 속에서 발견된다. 이태준의 소설 '복덕방'(<조광>, 1937년)은 1930년대 서울 한 복덕방을 배경으로 세 노인의 삶을 담고 있다. 등장인물 중, 서 참의는 복덕방의 주인으로 가회동에 큰 한옥을 가진 꽤 잘 사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인물이 어떻게 돈을 벌었고, 현재의 삶은 어떤지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참의는 참의로 다니다가 합병 후에는 다섯 해를 놀면서 시기를 엿보았으나, 별수가 없을 것 같아서 이럭저럭 심심파적(심심풀이)으로 갖게 된 것이 이 가옥 중개업이었다. 처음에는 겨우 굶지 않을 만한 수입이었으나 대정팔구년 이후로는 시골 부자들이 세금에 몰려, 혹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만 몰려들고… 몇 해를 지나 가회동에 수십 칸의 집을 세웠고 또 몇 해 지나지 않아서는 창동 근처에 땅을 장만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중개업자도 많이 늘었고 건양사 같은 큰 건축 회사가 생겨서 당자끼리 직접 팔고 사는 것이 원칙처럼 되어 가기 때문에 중개료의 수입은 전보다 훨씬 줄은 셈이다."

경성에 인구가 급증하면서, 추가적인 주택 수요가 붙어서 중개업 활황으로 초기에 돈을 좀 모았으나, 현재는 중개업 자체의 수입이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로 정세권의 건양사 같은 근대적 디벨로퍼들이 한옥 판매자로서 구매자와 직접 매매를 하거나, 혹은 그들이 한옥을 직접 임대하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다.

부동산업을 세밀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구조로 산업이 움직인다. 디벨로퍼가 개발에 대한 전체적인 구상을 하면, 금융권 자금을 수혈 받아 건축 설계 회사에서 설계를 그린다. 그리고 건설 업체에 시공을 맡긴다. 시공이 완료된 후, 부동산 중개업을 통해 일반인에게 분양하거나 임대를 맡기는 구조다.

위의 문맥을 살펴보면, 부동산 중개업 시장에 별도의 중개 업자들이 존재했으나, 중개업 시장에 건양사 등 근대적 디벨로퍼가 영역을 확장한 것으로 읽힌다.

건양사는 디벨로퍼이면서 자체적으로 설계팀과 시공팀을 갖춘 건설 업체임과 동시에 중개업 영역까지 확보한 부동산의 모든 영역을 수직적으로 통합한 회사였다. 그리고 부동산 관련 모든 영역(개발/기획, 설계, 시공, 중개)을 통합한 회사를 정세권은 건양사 설립 10년 안에 마무리했고, 자체 브랜드를 일반인에게 각인시켰다.

이외에도 자체 금융을 통해 일반인에게 융자를 한 부분 그리고 건양주택이라는 브랜드를 만들고 신문 광고를 통해 마케팅한 부분에 관한 설명은 추후 연재에서 한다.

1) '경성편람계획 경성을 소개코저 홍문사에서 계획',<동아일보>, 1929년 7월 26일.
2) '나는 어떻게 성공하였나 (5)',<매일신보>,1936년 5월 21일.
3) 이태준, '복덕방', <조광> 1937년 3월호 , 1937년,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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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부동산/도시계획) 취득 후,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환경대학원)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부동산 금융과 도시/부동산개발이며, 현재는 20세기 초 경성의 도시개발과 사회적기업과 경제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Urban Hybrid (비영리 퍼블릭 디벨로퍼)의 설립자겸 고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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