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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가 언제 비판자에게 자비로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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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창비가 언제 비판자에게 자비로웠나?" [기고] '자비의 원칙'과 '비판의 원칙'
표절과 문학 권력 논쟁과 관련해서 그동안 침묵하던 창비 쪽의 입장이 나오고 있다. 창비 편집위원인 김종엽, 황정아 교수(이하 경칭 생략)의 글들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이런 잇따른 입장 표명이 창비 내부의 협의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견해인지 명확히 판단할 수 없으나, 두 글 모두 현직 편집위원의 글이므로 아주 개인적인 견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두 글이 공유하는 문제의식에 적지 않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두 글이 개진하는 몇 가지 쟁점에 관한 단상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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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김종엽의 글에 대해. 김종엽은 이렇게 "자비의 원칙(principle of charity)"을 말한다.

"이 말은 타자를 비판하고 평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평가나 비판을 위해서도 해석 작업에서 자비의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당한 말씀이다. 다른 사람의 글이나 주장을 평가하고 비판할 때는 언제나 상대방의 입장을 최대한 이해하고, 사실에 즉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비판은 비난이 되기 쉽다. 그런데 이 글에는 두 가지 납득할 수 없는 전제가 깔려 있다. 첫째, 김종엽이 이해하는 것처럼, 그동안 표절과 문학 권력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했던 이들이 그렇게 막무가내로 상대방의 입장을 곡해하고 거친 비판을 했던가? 비판자들의 입장도 제각각 차이가 있으므로, 만약 그런 점이 있다면 뭉뚱그려서 말할 게 아니라 어떤 것이 그런 거친 비판인지를 구체적으로 논해야 한다. 둘째, 자비의 원칙을 논하려면 남들에게 그 원칙을 들이대기 전에 김종엽 혹은 창비는 자신들에게 먼저 그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김종엽은 "신경숙과 문학 권력에 대한 비판자들이 자신의 동기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자비의 원칙을 지켰는지 의문"이라고 불평하지만, 그 말은 그대로 창비에게 되돌려 줄 수 있다. 창비는 그동안 비판자들의 비판에 대해 "필요한 자비의 원칙을 지켰는지 의문"이다.

2

비평에서 자비의 원칙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비판의 원칙은 어디 갔는가. 자비와 비판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신경숙 작품의 평가에 대한 그의 주장을 납득할 수 없다. 우선 "신경숙의 작품 전체가 형편없다는 견해"를 누가 표명했는지 궁금하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표절과 문학 권력 비판자들 중에 누구도 신경숙의 "작품 전체가 형편없다"고 주장한 이는 없다. 내 경우 신경숙의 문학적 성취를 엄정하게 재평가해야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지만, 내 입장은 재평가의 필요성을 말한 것이지, 섣불리 그의 작품을 매도하자는 게 아니다. 그리고 백보양보해서 설령 누군가가 그런 주장을 했다고 해서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근거가 있다면 그런 강한 비판도 가능한 게 비평적 공론장의 고유성이다. 신경숙의 문학적 성취는 건드릴 수 없는(untouchable) 성역인가? 칭찬이든 비판이든 그것도 비평적 입장이다. 요는 주장의 구체적 근거일 뿐이다.

3

신경숙을 옹호하는 근거로 "신경숙 작품들에 대한 그간의 비평과 대중의 반응" 운운하는 말도 예사롭게 읽히지 않는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째, 김종엽은 백낙청을 비롯한 그간의 신경숙에 대한 '칭찬의 비평'을 옹호한다. 그럴 수 있다. 비평적 가치판단에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시각에서 그동안 유력 문예지를 중심으로 제출된 신경숙에 대한 고평(高評)이 어느 정도 설득력과 적실성을 지니고 있었는가를 다시 물을 수도 있다. 그것도 충분히 가능한 비평적 입장이다. 둘째, 김종엽은 "대중의 반응" 운운하면서 신경숙의 문학적 성취를 옹호하지만, 이런 시각은 현대 문학에서 흔히 목도되는 대중성과 작품성의 거리를 외면한 것이다. 많이 팔린다고 반드시 좋은 작품이라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살펴보지 않고, 몇몇 유력 잡지의 비평가들이 신경숙을 높이 평가해왔고, 대중이 많이 읽었으니까, 그 수준은 이미 검증된 거라고 우기면 곤란하다. 참고로 말하자면, 당대의 베스트셀러 중에서 문학사에 남는 걸작은 거의 없다. 어떤 작품이 많이 팔렸다는 사실은 그 특정 시점에 (대중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대중성을 그 작품이 지니고 있었다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작가나 작품에 대한 (재)평가에 종료의 시점은 없다. 언제나 새롭게 논의되고, 재평가되는 게 문학사다. 문학사는 평가의 전쟁터다. 어느 작가이던지 예외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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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지엽적으로 보이지만, 내게는 중요해 보이는 문제. 김종엽은 현재 논란의 중심에 있는 창비의 편집위원이다. 그런데 <한겨레> 칼럼에서 그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짐짓 제 3자의 입장에서 '자비의 원칙'을 말한다.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다. 나는 창비 편집위원이라는 그의 위치가 이번 글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고 단언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아무리 객관성을 표방하는 경우에도 자신이 처한 입장의 주관성을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이른바 '이해 충돌의 배제' 원칙이다. 나는 김종엽의 글이 그런 원칙을 위배한 글이라고 판단한다. 글의 내용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서, 이 글을 읽고 내가 불쾌감을 느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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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아의 글에 대해서는 짧게 적는다. 이 글은 여러 가지를 말하지만 핵심은 표절에서 의도성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다. 황정아의 주장이다.

"의도적 절도로서의 '전설'이나 상습범 신경숙을 단정했다가 그간의 논의를 통해 '의도'를 가정한 비난이 부적절하다는 점을 새삼 발견한 것이라면 스스로 그러한 비난에 얼마나 동조했는지도 솔직히 밝히는 게 옳다."

첫째, 내가 동의하는 지점. "의도를 가정한 비난"은 타당하지 않다. 만약에 신경숙의 표절 여부를 표절의 의도가 있는가, 아닌가를 따져서 단죄해야 한다는 주장을 누군가가 내세운다면, 나부터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동의하지 않는 지점. 황정아는 표절에서 의도성의 여부를 파고들지만, 문학 작품의 평가에서 의도성은 중요하지 않다. '의도의 오류'(intentional fallacy) 등의 개념을 통해 신비평을 비롯한 여러 현대 비평 이론이 이미 밝혔듯이, 작품의 의미는 작가의 의도와 같지 않다. '작가를 믿지 말고 작품을 믿어라'는 유명한 격언이 나온 배경이다. 표절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표절을 하려는 의식적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작품에 표현된 문장이 다른 작가의 작품과 결과적으로 아주 유사하거나 심지어 동일하다면, 그것은 표절이다. 물론 문장 차원의 표절 판단과 작품의 모티프, 서사, 구성 등의 표절 여부에 대한 판단은 구별해야 한다. 후자의 경우는 더욱 조심스럽게 따져야할 문제다.

6

창비 편집위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반갑다. 하지만 내 편견인지 모르겠지만, 김종엽과 황정아의 글은 그간 창비가 내놓은 입장의 반복에 가까운 인상이다. 비판자들에게 '자비의 원칙'을 요구하기 전에, 그 원칙을 자신들에게 먼저 적용하여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길 바란다. 그래서 좀 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길 바란다. 그럴 때 '생산적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오길영 충남대학교 교수가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블로그에 올린 글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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