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효성이 이제 국민의 영혼까지 넘보고 있다. 비정상적 혼을 정상적 혼으로 정화(淨化)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행정 예고 기간이 끝나자마자 예정보다 이틀 이른 11월 3일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서둘러서 확정 고시했다. 황교안 국무총리와 황우여 부총리는 이날 정부가 10월 12일 행정예고 했던 '중고 교과용 도서 국검인정 구분 고시안'이 확정됐음을 발표했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역사 교과서를 통해서 혼이 비정상인 국민들의 혼을 개조하여 혼이 정상인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인데, 황 총리의 발언으로 보건대 99.9%가 혼이 비정상 상태 아닌가? 혼을 개조한다니, 왕조 시대에도 불가능했던 일일 뿐만 아니라 그것도 0.1%가 99.9%를 개조하겠다는 것이니 만용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누가 비정상인지 따져볼 일이다. 굳이 떠올릴만한 역사적 사례를 들자면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을 황국(皇國)의 충량(忠良)한 신민(臣民)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강압과 회유를 자행했던 식민지기 일제의 전향 공작 정도를 떠올릴 수 있을 뿐이지만 일제도 모든 조선인들의 혼을 충량하게 만들지는 못했던 것 아닌가.
박 대통령이 야당 대표 시절 "(정부가) 역사를 다루겠다는 것은 정부가 정권의 입맛에 맞게 하겠다는 의심을 받게 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고 언급했던 일이나, 역사 교과서 국정화 홍보와 강행에 앞장섰던 새누리당이 두 해전만 해도 검인정제를 지지했다든가, 이른바 '역사 쿠데타'의 주역으로 원성을 사고 있는 황우여 부총리, 김정배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김재춘 전 교육부 차관 등의 인사들조차 과거에는 국정화를 반대하고 검인정제를 지지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이제 입만 아플 뿐이다. 게다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기 위해 사전 TF 구성, 예비비 인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위한 또 다른 구분 고시 등 정부가 저지른 불법, 탈법, 규정 위반 등 허다한 '반칙'을 거론하는 것 역시 입이 아프기는 마찬가지이다.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때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언론이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의 친일 독재 미화와 무수한 오류를 비판했지만 이제 총리가 거꾸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이외의 99.9%의 교과서가 편향되었다고 말해도 그의 발언을 문제 삼는 언론이 몇 안될 정도로 언론 상황이 변해버렸다. 역사학자들의 가장 큰 축제로 연례적으로 개최되는 전국역사학대회장에 보수단체 회원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난입하여 그 자리에 있던 연구자들을 향해 욕설과 폭언을 퍼붓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학회장들을 향해 돌진하는 소동을 피워도 그 사실을 '난입'으로 보도하는 언론이 소수인 지경이 되었다. 그 사건을 아예 보도하지 않거나 또는 그것을 '난입'이 아니라 '보수와 진보의 충돌'로 보도하고, 처음에는 난입으로 보도했다가도 두어 시간 뒤에는 슬그머니 보수와 진보의 충돌로 제목을 바꾸어 다는 것이 2015년 한국의 언론 상황이다. 이와 같은 언론 상황이 황 총리가 기자 회견에서 이미 거짓말이라고 판명이 난 교과서 편향성 주장을 버젓이 다시 반복할 수 있는 배경이다. 우리 사회 이곳저곳에서 '기울어진 운동장' 얘기가 넘쳐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언론의 기울기가 가장 가파르고, 이제 도를 넘어섰다.
아무리 기울어진 언론 운동장, 정부의 민의 조작 의혹과 반칙, 정부와 여당 인사들의 말바꾸기를 지적해도, 또 대다수 국민이 나서서 그러한 행위들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라고 외쳐대도 국민정신을 개조하는 중차대한 일이기 때문에 온갖 불법, 탈법 행위를 자행해서라도 기어코 감행하겠다는 것이고, 또 그것이 정치라고 우기는 형국이다.
(이 글은 <내일을 여는 역사> 2015년 겨울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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