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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된 말 있어도 글 없으면 문화 민족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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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된 말 있어도 글 없으면 문화 민족 아니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감격의 큰사전
1957년 한글학회의 큰 사전 완성을 축하하여 정세권은 '큰 사전 완성을 축하함'이라는 글을 <한글誌>(한글학회 펴냄)에 실으면서 본인의 참여 동기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큰 사전 완성하는) 날을 당하여 지난 일을 돌아보면 실로 감개무량합니다. 삼십 년 전 어느 날 조선물산장려회 회의석상에서 한 선생님을 맞이하여 그 포부를 물어보았더니 그 선생이 말씀하기를 '한 민족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통일된 말이 없으면 문화 민족이 아니요, 통일된 말이 있어도 통일된 글이 없으면 문화 민족이 아니요. 통일된 글까지 있어도 사전이 없으면 문화 민족으로 행세할 수 없다. 우리 민족은 말과 글이 오래전부터 있으나 통일되지 못하였고 사전이 없으니 나는 이 점을 깊이 느끼어 말과 글을 통일하여 사전을 완성하는 것을 일생의 사업으로 하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정세권, '큰 사전 완성을 축하함', <한글>, 한글학회 펴냄, 1957년, 481쪽~482쪽)

정세권이 조선물산장려회에서 만난 '선생님'은 이극로로 추정된다. 정세권은 나름 천재적 두뇌의 소유자였고, 조선물산장려회와 조선어학회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기에 인물의 이름을 기억 못하였을 리 없다. 조선어학회 회원 중 조선물산장려회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대표적 인물은 이극로이며, 위의 문장에서 엿보이는 문제의식과 결의를 가진 인물 역시 이극로다. 다만, 이극로는 1948년 4월 월북 후, 북한 국어학의 중추적 역할을 하면서 상당한 요직에 있었기에, 이승만 정권 시기 함부로 이극로의 실명을 밝히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려웠을지 모른다. 정세권은 '큰사전' 완성을 축하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사전 편찬에 공이 필생의 동지, 이극로에게 있음을 알기에, 그와의 인연을 이러한 방식으로 소개했으리라 본다.

위의 이극로의 발언에 대해 정세권은 처음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힘들어지면, 제풀에 꺾여 활동을 멈추리라 본 것이다.

"그 말씀을 들은 저(우리)의 해석은 그 선생의 생각은 장하나, (본인이) 한 번 (경제적) 곤궁함을 겪은 뒤 취직하여 양복 구두에 손질을 하게 되면 흐지부지 없어질 생각이라 여겨 웃고 말았다." (<한글>, 481쪽~482쪽)

그러나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열정에 정세권은 큰 감명을 받는다.

"그리고 몇 달 뒤 수표정 교육협회 한 칸 방에 매주 일요일이면 광묵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은 선생님 몇 분이 모여 정답게 속살거리기도 하고 화가 나 싸우기도 하거늘, 어떤 날도 한 사람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 (그들이) 싸우는 목표에는 돈이나 명예나 권리란 털끝만큼도 없었습니다. 다만, 민족 만대의 문화, 곧 말과 글을 통일하여 사전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 그들의 속살거림과 논의(싸움)가 지속되면서 선생님의 수는 더욱 늘어갔습니다." (<한글>, 481쪽~482쪽)

이러한 열정에 그는 회관을 지어주고 각종 활동비를 지원하였던 듯하다. 그리고 그는 1942년의 안타까웠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 차고 좁은 방에서 수십 년을 하루처럼 고심 노력한 보수는 흥원 경찰의 악독한 고문과 함흥감옥의 고초였습니다. (…) 오늘까지 생존하여 사전 완성을 보게 된 선생님들은 지난 고생을 이야기하면서 사전 완성을 기뻐합니다만, 옥중 고초로 세상을 떠나신 선생님들은 저승에서 사전 완성을 기뻐하실지 (아니면 그들이) 밟아온 고생을 기억하여 서러워할지 (알 수 없기에) 참으로 답답합니다." (<한글>, 481쪽~482쪽)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생존자들을 찍은 1946년 사진.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정세권. ⓒ조선어학회

조선어학회 사건은 2가지 측면에서 큰 충격을 준 것이었다. 하나는 고문과 고초로 많은 인사들이 피해를 본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십 년여에 걸친 일대 사업 (큰사전 발행)의 요체인 조선어사전 초판을 일제에 압수당해 분실된 것이었다. 그야말로 십여 년의 노력이 일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셈이다.

'큰사전' 편찬은 지난한 과정을 겪으면서 탄생한 것이었고 사전 편찬이 왜 민족적 시대적 과업이었느냐를 이극로는 아래와 같이 회고한다.

"내가 처음 서울에 오자 조선어 교육의 현상을 조사하였다. 왜 그리 하였냐하면 나는 이 언어 문제가 곧 민족 문제의 중심이 되는 까닭에 당시 일본 통치 하의 조선 민족은 (조선) 언어의 멸망이 곧 따라 올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문운동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안 되겠다는 것을 여러 동지들에게 말하였다.

이를 통해 민족 의식을 넣어주며 민족 혁명의 기초를 삼고자 함이었다. 그리하여 먼저 조선 어문을 학술적으로 천명하려면 난마와 같이 불통일된 철자를 통일시키며, 방언으로 되어 있는 말을 표준어로 사정하며, 외국어 고유명사와 외래어의 불통일은 그 표기법을 통일시키지 않고는 사전도 편찬할 수 없기에, 조선어 사전편찬회를 조직하였다." (<고투 사십년 : 지구를 한 바퀴 돈 한글학자 – 이극로 자서전>(이극로, 조준희 옮김, 서울 : 아라 펴냄), 2014년, 185쪽)

즉, 사전 편찬에 앞서서 단어의 철자를 통일하여야 했으며, 방언 등을 표준어로 고쳐야 했고, 외래어 역시 표준화시키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했던 것이다. 또한 각종 전문 용어(물리학, 수학, 천문학, 종교 등)의 처리는 특히 심난한 작업이었다.

여러 난관 속에서 1939년 봄에는 어휘 수집이 대강 마무리되었고, 1942년 가을까지는 어휘 카드의 초벌풀이달기가 대체로 마무리되어, 사전 체제로의 원고 편성의 상당 부분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리의도, '어문규범 갖추기에 쏟은 조선어학회의 노력', <국제어문> 제59집, 2013년, 160쪽) 조판된 것까지 합쳐서 약 6000쪽에 달할 정도로 대단한 작업량이었다. ('한글 보전 '우리말광' 일본 관헌의 압수한 것 다시 찾아서 조선어학회서 간행 준비', <매일신보>, 1945년 10월6일)

큰사전 완성을 목전에 둔 1942년 가을, 10월 1일 발생한 조선어학회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학회를 해산시킨다. 그리고 일제는 조선어학회 인사 33인을 비롯 정세권 등 도움을 준 인물들까지 모두 연행 수감하였고, 사전 원고 및 관계 서류 일체를 압수하였다. 이들 서류와 원고는 재판의 증거물로 사용되어 함흥으로 이송되었다. (<조선어학회 항일투쟁사>(박용규 지음, 서울 : 한글학회 펴냄), 2012년, 171쪽)

감옥에 붙들려 있던 일부 회원들이 풀려나 사전 원고를 서울과 함흥 등지를 백방으로 찾아보려고 하였으나, 이들은 사전 원고를 찾지 못했다. 일제가 각종 중요 문서들을 불태울 가능성이 있었기에, 사전 원고도 유실된 것으로 추정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십수 년의 노력의 결과인 사전 원고의 유실은 많은 이들의 걱정하는 사안이었고 각 방면의 사람들이 이를 찾고자 노력을 하였다.

1945년 9월 8일 기적적인 일이 벌어진다. 서울역 운송부 창고 속에서 사전 원고가 발견된 것이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피고인 자격으로 불복 상고를 하였고 이에 증빙 자료들이 함흥 법원에서 서울고등법원으로 이송되면서 서울역 운송 창고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글 보전 '우리말광' 일본 관헌의 압수한 것 다시 찾아서 조선어학회서 간행 준비')

둘째 따님 고(故) 정정식 님도 그날의 감격을 기억한다.

"우리 집에 사전이 6권 있는데, 1957년에 나온 거에요. 1957년에 우리 한글 사전이 나왔어요. 그런데 (일제 시기에) 조선어학회에서 한글학자들이 (사전 원고를 거의) 다 만들었는데, (사전 원고를) 일본 사람들이 압수해갔어요. (잃어버렸다고 낙심해 있었는데) 서울역에서 원고를 찾았다는 거에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서) 흥분해서 모두 껴안고 울고 그랬어요." (둘째 따님 고 정정식 님 인터뷰, 2015년 9월)

▲ 우리말 큰사전 ‘우리말광’을 소개한 기사. ⓒ매일신보

그리하여 '큰사전' 편찬은 다시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작업이 결코 순탄치 않았다. 큰사전 총 6권 중 첫째 권을 1947년 둘째 권을 1949년 출판하였고, 셋째와 넷째 권 출판 작업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6.25 사변으로 인해 작업이 멈추게 되었다. 다행히 미국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나머지 작업들도 1953년 5월 거의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한글 파동으로 또 한번의 소동을 겪게 된다. 한글 간소화 작업을 정부가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통에 학계의 반발이 일었고, 록펠러 재단의 후원이 정지되는 등 난항이 이어졌다. ('어문규범 갖추기에 쏟은 조선어학회의 노력', 177쪽 / 정재환, '해방 후 조선어학회∙한글학회 활동 연구(1945~1957년)',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 사학과 박사 학위 논문, 2013년, 281쪽~287쪽)

이런 옥고 끝에 1957년 '큰사전' 완질이 발행되었다. 따라서 조선어학회에게 큰사전 편찬은 근 30년에 걸친 투쟁의 산물이었다. 그렇기에 이는 기념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고, 이를 정세권은 아래와 같이 한글학회지에 담담히 표현하였다.
"큰 사전 완성을 축하하는 오늘, 지난 일을 추억하고자 하는 바는 부질없이 읽으시는 여러분의 눈물을 자아내고자 함은 아닙니다. (…) (그럼에도) 이렇게 기쁜 축하에 이 사전을 이룩하도록 오랫동안 고생하던 여러 선생님들이 밟아온 기억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

이제는 사전이 완성되었으니 이 사전으로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워서 십 년이면 십 년만큼 백 년이면 백 년만큼 익혀져서 다른 글이나 말이 아무리 셀지라도 이 한글 문화를 엿보지 못하게 합시다. 만세 이르도록 한국 사람은 한국 문화로 더욱 더 밝아지기를 축하합니다. (4290년 8월)" (<한글>, 481쪽~482쪽)

건축 면허를 빼앗기고 재산을 강탈당한 정세권은 해방 전 일제 말기 개발 사업을 벌일 수 없었다. 그리고 6.25 동란기에 다리를 다치는 개인적 불운을 겪기도 하였다. 이후 왕십리 일대를 개발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며, 인생의 후반기에는 고향인 덕명리에 내려가서 자급자족적인 삶에 대한 실험을 하기도 하였다. (이는 도시계획학계의 유행과도 같은 지속 가능한 개발과도 맥이 닿는다). 따라서 해방 이후 그의 족적을 밝혀줄 객관적 자료가 현재 매우 적은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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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부동산/도시계획) 취득 후,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환경대학원)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부동산 금융과 도시/부동산개발이며, 현재는 20세기 초 경성의 도시개발과 사회적기업과 경제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Urban Hybrid (비영리 퍼블릭 디벨로퍼)의 설립자겸 고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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