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나는 왜 조선 최초 '디벨로퍼'에 주목했는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나는 왜 조선 최초 '디벨로퍼'에 주목했는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연재를 마무리하며
춘원 이광수가 납북을 당하지 않았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만약 그가 납북을 당하지 않았다면, 정세권 선생은 많은 이들에 의해 기억되는 인물이 되었을지 모른다. 정세권 선생의 셋째 따님 정몽화에 따르면, 이광수는 <그의 자서전>이라는 제목으로 정세권의 자서전을 집필하려 하였다고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었고 이광수가 한국에 있었다면, 정세권 이야기는 많은 이들이 동감하고 알고 있는 내용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다행스러운 점은 그가 비록 잊힌 인물이 되었으나 그가 남긴 역사적 행동과 개발 자체가 워낙 거대하기에 그에 대한 기록과 자료가 아주 외진 곳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건축학계에서는 근대식 한옥집단지구의 작은 한옥을 건축한 집 장사로 기록되어 연구되어 왔고, 역사학계에서는 조선물산장려회의 재정을 담당한 인물로 그리고 한글학/국문학계에서는 조선어학회를 후원하고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탄압을 받은 인물로 연구되었다. 그의 족적이 너무 광범위하기에 그나마 각 분야에서 파편적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그의 도시개발이 경성의 북촌의 많은 지역을 커버할 만큼 광폭적이었지만 도시개발사 도시사 측면에서 그를 접근한 시도는 없었다. 또한 파편적 기록을 총체적으로 엮은 후 그에 대한 다면적 평가를 하려는 시도 역시 드물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부동산 개발이 21세기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시도되지 못하였음을 인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에 대한 평가는 이제 시작이다. 그리고 그 평가는 파편적인 측면에 기초해서는 안 된다. 즉, 나무를 보지 말고 숲 전체를 바라보면서 왜 그가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 전후의 시대적 경제적 사회적 맥락을 지역차원과 도시차원 그리고 국가차원에서 고려해야 한다. 또한 역사에서 잊히고 감춰진 주변인물들(안재홍과 이극로)에 대한 평가 역시 함께 이루어져야 그의 족적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 1935년 조선어학회 표준어사정위원들의 현충사 방문 기념 사진. 앞 줄 맨 왼쪽에 정세권, 둘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에 이극로, 같은 줄 네 번째에 안재홍. ⓒ한글학회

기농 정세권에 대한 필자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정세권은 1920년 회사령이 폐지되자마자 우리나라 최초의 개발회사 '건양사'를 설립하여, 경성에 근대식 한옥집단지구를 곳곳에 건설한다. 이는 포디즘에 기초한 (미국)대형 개발회사들의 대규모 개발과 궤를 같이할 정도로 도시개발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개발은 주택을 (조선)물산장려한 것으로, 일본인의 북촌진출을 막고 중산층 이하의 서민계층이 경성 이내에 살 공간을 제공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토지 매수, 기획, 설계, 시공 그리고 금융에 이르기까지 21세기 부동산 디벨로퍼들도 못하는 일을 이미 100년 전에 진행한 걸출한 대자본가였다. 독립운동사적으로는 그와 건양사/장산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역사시간에 '조선물산장려운동'을 배웠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가 장려운동에 참여했던 시기는 조선물산장려운동의 황금기였다. 이 후 그의 후의로 조선어학회는 회관을 갖게 되었고, 조선어학회 사건을 계기를 그는 재산의 상당부분을 일제에 강제로 빼앗기고 사업이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 이후 6.25 사변 후, 왕십리 일대를 일부 개발한 후 고성군 덕명리로 낙향하여 생을 마감한다.

유족들은 그가 고향에서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고 하나,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매우 활동적인 행동가였고, 경성을 만든 기백으로 고향 덕명리에서 자급자족적 주거환경이 가능한지를 열심히 실험하였다. 그리고 본인의 삶이 죽어서 40년간 가려있고 국가보훈처에서도 사망일을 모를 만큼 잊힌 것에 대해 그는 애석해 하지 않으리라 본다. 이를 아까워했을 인물이라면, 평생 본인이 모은 거대한 자본을 조선물산장려회와 조선어학회에 투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수성가한 성공한 대사업가였고, 독립운동가였으며, 출판인이었고, 사회운동가였다. 그리고 본인이 인식하였을지는 모르나, 서구의 도시이론가에 필적할만한, 경성을 바꾼 도시계획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필자는 2012년부터 근 5년 가까이 정세권이라는 인물에 푹 빠져 있었고 그에 관한 연구에 집중하였다. 이 연구는 필자 단독으로 수행이 불가능한 것이었고 너무나 많은 소중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가깝게는 필자의 지도학생들, 특히 이지은 헤리티지프로젝트 대표(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도시및지역계획학 박사수료생)와 유슬기 씨(동대학원 석사 3학기), 구경하 기자 (동대학원 졸업생)와 정세권이란 인물을 발견한 박호근 씨(미시간대 박사과정)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또한 말도 안 되는 숙제를 불평없이 했던 2013년과 2014년 도시계획사 수강생 모두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정세권 선생님의 둘째 따님 (고) 정정식 님, 막내 따님 정남식 님, 손녀 김재원 님, 정희경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글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또한 잊혀진 인물 소개를 위해 지면을 할애해준 <프레시안>에 감사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2-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김경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부동산/도시계획) 취득 후,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환경대학원)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부동산 금융과 도시/부동산개발이며, 현재는 20세기 초 경성의 도시개발과 사회적기업과 경제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Urban Hybrid (비영리 퍼블릭 디벨로퍼)의 설립자겸 고문이기도 하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