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 지지자들은 16년 만에 펼쳐진 '여소야대' 정치지형에 환호하며 잠을 설쳤습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로 이어진 8년의 실정에 대한 이 명백한 심판은 한국 유권자들의 역동성을 다시 한 번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선거가 정치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달라진 정치지형이 지금과 다른 정치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선전과 국민의당 돌풍은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오만과 퇴행의 반사이익에 기댄 성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新) 3당체제'에는 불안정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선거는 끝났습니다. 냉정하게 이번 총선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다시 일상의 정치를 복원하는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사단법인 <다른백년> 창립준비모임이 오늘(14일) 2시부터 토론회 <4.13 총선에 나타난 민심과 형후 정국 전망>을 엽니다. 이에 앞서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의 발제문을 싣습니다.
한편 정당투표에서 전국은 물론 서울에서도 국민의당이 더민주에 앞서거나 거의 같은 득표에 성공한 것은 그 동안 제1 야당으로서 더민주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일정한 심판이자, 야당의 정권 교체 역량에 대한 회의가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서 박근혜 정권 심판, 더민주에 대한 경고 다음으로 나타난 가장 중요한 신호는 지난 30년 동안 지속되어온 지역주의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대구에서 김부겸의 당선, 부산경남에서 더민주의 5석의 의석, 호남에서 이정현의 당선이 그것이다. 호남에서 국민의당 압승의 반, 영남에서 새누리의 압도적 당선은 여전히 지역주의의 결과이지만, 이제 균열이 시작되었다. 호남의 반수 이상의 사람들과 영남의 30% 이상은 이제 지역 연고자보다는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정치를 원한다. 87년 이후 한국 정치를 지배해온 영호남 지역주의 모두가 균열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87년 체제가 확실히 무너지고 있다.
더민주의 선전이나 국민의당의 약진은 모두 당 차원의 정책이나 리더쉽, 혹은 공천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박근혜 정권에 대한 거부감에 의한 반사적 이익을 얻은 것이다. 이번 선거는 특정 정책을 둘러싼 쟁점이 거의 없었던 선거였다. 여야 3 정당 모두 비전, 의제, 담론도 없는 사실상 최악의 공천이었다. 그리고 선거 과정에서도 더민주와 새누리, 국민의당의 차이가 무엇인지 부각되지 않았다. 새누리, 더민주 모두 사람들을 투표장으로 갈 유인을 제공해주지 못했다. 새누리당 지지자들의 실망, 청년층을 끌어들일 수 있는 공약이나 공천 등이 없었으나 이 정권에 대한 불만이 너무 컸고, 정권교체의 필요성을 너무 심각하게 느꼈기 때문에 선거에 미래지향적인 의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투표율이 상승했다. 정당정치의 안정적 기반도 없었으므로 선거는 정부의 실정에 대한 비판과 향후 대선에 대한 기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선거였다. 정책이 쟁점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투표는 '회고적'이 되었다.
1988년 직후, 2000년 직후와 마찬가지로 정말 드문 여소야대의 정국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더 민주당과 호남의 고리가 끊어짐으로써 더민주는 이제 지역정당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더민주 기반과 정체성, 그 진로는 어떻게 될까?
수도권과 호남에서 국민의당의 높은 지지율은 더민주에 대한 심판, 정권교체의 기대, 새누리에 대한 반발이 모두 결합되어 있다. 국민의당의 성공이 부분적으로 안철수의 리더십, 천정배, 정동영 등의 호남정치론 등에 기초한다고 하더라도, 미래지향적인 점보다는 '반사적' 성격이 크기 때문에 독자적 정체성을 가진 정당으로 계속 살아남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래서 이 선거의 구도를 더민주, 새누리, 국민의당, 3당 체제가 확립된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국민의당이 정치사회를 주도하기 어렵다. 정책적 내용이나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여당이 수구보수와 개혁적 보수로 차별화되면 국민의당과의 정책적 차별성이 거의 사라지고 이 당의 입지는 더욱 없어질 것이며,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호남 개혁 세력의 요구가 거셀 것이기 때문에 설사 새누리당과의 정책적 야합을 하려 한다 해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선거로 한국의 대중들의 역동성, 민주화의 성과가 소진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입증되었다. 민주화를 완전히 거꾸로 돌리려는 이명박, 박근혜의 시도가 전면적으로 비판과 견제를 받게 되었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새로운 변화는 바로 영남에서 야당 후보의 당선, 특히 대구에서 김부겸의 당선이다. 이것은 우리 정치가 지역주의에 벗어나, 정책정치, 계급정치로 나아갈 수 있는 가장 미래지향적인 변화의 조짐이다. 그러나 현 선거제도의 한계 때문에 정의당, 녹색당, 민중연합당 등 진보정당이 지역구는 물론 비례대표의 의석도 별로 얻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들 정당이 지역에서 의미 있는 의석을 얻거나 원내 교섭단체가 되어 명실상부 3당 체제가 될 때, 한국 정치는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이번 총선에서 투표하지 않았던 40%의 유권자를 정치로 끌어내는 일과 동시에 진행될 것이다.
이제 여소야대 정국에서 더민주과 국민의당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퇴행을 정리하고 망가진 사회와 정치를 복원하는 일에는 협조를 해야 할 것이며, 차기 대선,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정치를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할 것이다. 비록 완전한 3당 체제는 아니지만, 오랜만에 찾은 여소야대 정국은 합의제 민주주의를 실험할 수 있는 매우 좋은 장이다. 더민주은 과거 다수당이 되고도 제대로 개혁입법을 통과시키지 못했던 과거를 철저히 복기하여 개혁입법 작업을 하나하나 추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민의당은 어설픈 중도로 개혁의 발목을 잡기보다는 사안별로 더불어민주당과 연대를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정당은 여전히 사회적 갈등, 균열구조를 거의 반영하지 못한다. 문재인, 김종인 두 지도력이 이번 총선에서 수행한 역할을 무시할 수 없지만, 더민주의 지도력 부재는 여전히 남아 있는 걸림돌이다. 결국 정당 리더십의 형성, 그리고 정책정당으로의 변신을 위한 치열한 내부 논쟁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퇴행에도 불구하고 다시 야당을 밀어준 유권자들과 이번에 투표에 참가하지 않은 40%에 호응하는 정치다. 이 호응은 지역, 직능집단이 스스로 정치화될 수 있는 싹을 마련하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가 시민사회를 키워야 하고, 시민사회가 자력화되어 장차 정치를 통제해야 한다.
정치의 가장 큰 야망은 사람들에게 질서가 아니라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어야 한다.(로베르토 웅거, 이재승역, <주체의 각성 – 사회개혁의 철학적 문법>, 앨피, 2015, 342) 정치는 곧 신민(新民),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어야 하고('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신민 재지어지선(大學之道在明明德在新民在止於至善)'은 <대학> 상장의 삼강령을 말한 것으로,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고,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데 있다'는 내용), 백성이 ('스스로') 새롭게 되어야 정치가 바로잡힌다. 그것은 정당이 선거라는 정치 행위를 통해 정치적 변화의 가능성, '유권자'들의 주체적 개입의 필요성과 의미, 민의 힘을 통해서 '일정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고, 동시에 선거를 통해 변화시킬 수 없는 그 무엇, 선거라는 표층 아래에서 움직이는 실제의 권력구조를 엿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진정한 변화를 위해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며,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는 이중적 의미에서 대중교육이다. 변화와 잠재력에 대한 자각이며, 그 한계에 대한 자각이다.
이번 선거에서 '시민'의 징후가 잘 드러난 곳은 영남이었다. 그러나 영호남과 수도권 유권자 모두 선거참여를 통해 국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변화를 강제하고 주도하기 위해서는 선거 때만의 정치가 '선거 이전의 정치', '시민정치', '연성정치'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더 깊이 자각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것은 다수가 된 야당들 간의 정책 경쟁이다.
지난 8년 동안의 퇴행의 역사를 끝내고 이제 전진의 역사를 만들어야할 때다. 지난 87년 체제 30년의 한계를 넘어서서 민주주의를 질적으로 심화시킬 때가 되었다. 지난 70년의 분단, 100년의 '뒤틀어진 근대화'의 역사를 넘어서서, 평화, 균등, 인간화가 보장되는 '다른 백년'을 시작해야할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와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사회의 자생성과 복원력, 연대의 정신에 기초해서 정치와 국가를 다시 세우는 일로 나아가야 한다. 낡은 것들은 이제 청산될 조짐이 보이나, 새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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