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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도 혼 타령, 왜 이상한 것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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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도 혼 타령, 왜 이상한 것을 믿는가? [월요일의 '과학 고전 50']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프레시안>이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 사이언스북스와 함께 특별한 연중 기획을 시작합니다. 매주 월요일 아침 한 권의 '과학' 고전을 뽑아서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서평 대상으로 선정된 고전 50권은 "우리에게 맞춤한 우리 시대"의 과학 고전을 과학자, 과학 담당 기자, 과학 저술가, 도서평론가 등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2015년에 새롭게 선정한 것입니다.

어이없는 일로 아들을 잃은 부부에게 말했다. "K라는 글자가 보이는군요." 그러면서 덧붙였다. "케빈인가요? 아니면 켄인가요?" 그 말을 들은 여성이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케빈이에요." 지켜보던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어찌 이리도 용하단 말인가,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다이아몬드 목걸이 한복판에 K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눈여겨 본 사람은 없었다.

늘 비합리적인 믿음을 비판하고 폭로하는 데 전념해왔다. 과학적 회의주의를 통해 미신을 몰아내고 진정한 과학 정신을 세상에 알려왔다.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는가. 경주용 자전거를 타고 한참 달리는데 커다란 우주선 한 대가 환한 빛을 비추며 나란히 날았다. 자전거를 멈추게 하더니 외계 생명체가 우주선에 타라고 꼬드겼다. 분명히 탔는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퍼뜩, 정신 차리고 보니 다시 자전거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도대체 그 90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마이클 셔머 지음, 류운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최근 국내에도 선보여 많은 정기 구독자를 확보한 <스켑틱>의 발행인이자 편집자 마이클 셔머가 쓴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류운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에 나온 믿거나 말거나한 일이다. 앞의 사례는 NBC <뉴에이지> 토크쇼에 나온 심령술사 제임스 반 프라그의 이야기다.

뒤의 사례는 지은이 자신이 사이클 경주 대회에서 등수를 올리려고 무리하다 본 일종의 환각이었다. 신이하고 기이하다고 여기고, 이런 것들이 현실이라 믿는 사람들이 많다. 이성적이거나 과학적인 설명을 해도 도무지 설득되지 않는 철옹성인 사람도 많다. 그럴 때마다 한마디씩 내뱉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개명천지에 어찌 그 따위를 믿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지은이는 그 답을 알고 있다. 혹세무민하는 심령술사의 정체를 열정적으로 폭로하는 그에게 한 여성이 말했다. 비통한 세월을 살아온 이들의 희망을 짓밟다니 "온당치 못한 짓"이라고 말이다.

지은이가 냉혹한 이성주의나 교조적인 과학주의자가 아니란 것은 이런 이들을 보는 따뜻한 시선 덕이다. 그도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한다. 심령술사와 함께 녹화할 때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그가 성공하기를 바랐던 마음을.

"현실이 견딜 수 없게 압박해오면, 우리는 쉽게 미혹되어, 점술가와 손금쟁이, 점성술사와 심령술사에게서 확신을 보장받으려 한다. 삶의 크나큰 불안들을 완화한답시고 던져진 약속과 희망의 말들이 맹습을 해오면, 우리가 가진 비판능력은 무너지고 만다."

지은이가 보기에 (심령술사, SF 신봉자, 기억 회복 운동, 개인 숭배, 창조론,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같은) 사이비 과학과 마술적 사고는 뭇사람에게 파우스트의 거래를 제안한다. 위안과 희망을 주는 대신 기꺼이 의혹을 버리라고. 왜 그럴까? 그럴 때 비로소 사이비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지게 마련이잖은가.

따지고 보면 믿을 만해서 그런 현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려고 믿는다 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다시 지은이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다. 믿음과 희망에 판돈을 거는 인간들을 비난하지 않고, 바로 과학도 알고 보면 삶의 불안을 이겨낼 희망을 줄려고 애쓴다는 점을 돋을새김한다.

사이비를 버리고 진짜를 믿으라고 넌지시 권유하는 셈이다. 과학자들도 "수수께끼들에 매료되고, 세상에 경이로움을 느끼고, 그처럼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이룩한 인간의 능력에 찬사를 보낸다. 우리는 쌓여가는 노력과 지속적인 성취를 통해 불멸을 추구한다. 우리 또한 영원에 대한 희망이 충족되기를 바"라는 법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얼토당토않은 것을 믿고, 믿으려 할까? 첫 번째 이유는 '코레도 콘솔란스', 즉 내 마음을 달래주기 때문에 믿는단다. "느낌이 좋다, 편안하다, 위로가 된다"면, 그러니까 믿기를 바라는지라 믿는 셈이다. 일례로 죽고 난 다음 펼쳐질 삶을 고민해보자. 사후가 있든 없든, 사후의 삶을 바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고. 그의 말대로 어쩌면 "우리를 더 기분 좋게 하는 것을 믿는 것은 지극히 사람다운 반응"인 법이다.

둘째, 즉석 만족이다. 우리 정서로 보자면 점치러 가거나 사주보는 일을 떠올리면 된다. 맞아서이거나, 믿어서가 아니잖은가. 어찌 보면 가장 값싸면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을 가장 빠르게 들을 수 있어 그곳에 가곤 한다.

셋째, 단순성이다. 즉석 만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바, "복잡하고 예측하기 힘든 세상살이를 단순하게 설명해주면, 그 믿음에 대해서 아주 쉽게" 만족하게 되는 데다 "삶의 복잡한 미로를 시원하게 관통하는 단순한 길"을 얻었다 착각하기 쉽다.

넷째, 사이비들이 말하는 바가 "도덕과 의미에 대해 단순하고 즉각적이고 위안이 되는 규범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그리고 앞엣것들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영원히 마르지 않는 희망 탓이라 한다. 인간이야말로 "언제나 더 나은 수준의 행복과 만족을 찾아 앞날을 내다"보려 하는 종이지 않던가.

지은이는 진화의 관점으로도 사이비 과학과 마술적 사고를 믿으려는 경향을 설명한다. 인간은 패턴을 추구하고 인과 관계를 찾아내도록 진화했다. 패턴을 찾을 적에 제일 중요한 일은 의미 있는 것과 의미 없는 것을 구별하는 데 있다, 인간의 뇌는 이 일을 능숙하게 해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두 가지 유형의 사고 오류를 저지르는 데, Ⅰ형 오류는 거짓을 믿는 것이고 Ⅱ형 오류는 참을 거부하는 것이다. 당연히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는 이에 맞서는 두 가지 적중 유형이 있다. Ⅰ형 적중은 거짓을 믿지 않고, Ⅱ형 적중은 참을 믿는다. 인간의 믿음 엔진은 이 오류와 적중을 번갈아 저지르며 진화했다.

지은이는 이 믿음 엔진의 진화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노라 말한다. 하나는 자연 선택이다. "주변 환경에 대한 불안을 마술적인 사고를 통해 덜게도 해"주는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 두 번째는 스팬드럴이다. 스티븐 굴드나 리처드 르원틴이 말한 대로 "진화되면서 어쩔 수 없어 만들어진 부산물"로 보자는 뜻이다. 이상의 것을 종합해보면, UFO, 외계인 납치, ESP, 심령 현상을 믿는 이들은 Ⅰ형 오류를 저지른 셈이고, 창조론자와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는 Ⅱ형 오류를 저지른 셈이다.

마이클 셔머의 글을 읽으며 크게 공감하는 대목은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정리하는 부분이다. 창조론자와 법정 투쟁을 하면서 윌리엄 오버턴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과학의 본질적 특징을 "(1) 과학은 자연 법칙의 인도를 받는다. (2) 과학은 자연 법칙을 기준으로 설명해야만 한다. (3) 과학은 경험 세계에 비추어 시험 가능하다. (4) 과학이 내린 결론들은 시험적이다 (…) (5) 과학은 오류 가능하다"라고 정리했다고 한다.

이 특징을 부인하려는 어떤 의도나 음모도 이성과 과학의 이름으로 부정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시종일관 지은이의 태도에 믿음이 갔던 데는 (4), (5)번 항목도 힘주어 말하는 대목이었다. 진정한 회의주의는 사이비 과학과 마술적 사고에만 맞서지 않는다. 오늘의 과학적 결과물이 유일한 진리인양 떠벌이는 것도 비판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가짜 신상을 과학의 신상으로 대체하는 일밖에 되지 않을 터다. 지은이는 확실하게 말한다.

"과학에서는 최종적인 정답이란 없다. 오직 다양한 정도의 확률만 있을 뿐이다. 과학적 '사실'조차도 잠정적으로 동의를 표하는 게 합리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만 확증된 결론일 따름이며, 그렇게 이루어진 합의는 결코 최종적이지 않다. 과학은 일련의 믿음들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박과 확증에 열려 있는 시험 가능한 지식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탐구의 과정이다."

이상한 것들을 믿는 것은 거짓 희망이라는 동아줄에 매달려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과학은 그 동아줄이 썩었다고 얘기하고, 설혹 가혹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더라도 이성의 힘으로 진짜 동아줄을 엮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의 위대함은 여기에서만 비롯하지 않는다. 자신을 절대의 자리에 놓지 않는 정신에 있다.

거짓 믿음만 회의의 대상이 아니다. 과학도 회의와 반증의 대상이다. 우상이 되는 순간,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 책을 덮으며 나도 감히 회의주의자라 말하겠다고 결심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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