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총선 이후 호남의 국민의당 지지를 놓고서 갑론을박이 많습니다.
주로 더불어민주당, 특히 문재인 전 대표 지지자는 이번 호남의 선택이 "지역 이기주의"이자 "호남 고립"을 자초한, 앞으로 대선의 "야권 분열"을 예고하는 "잘못된 선택"이라는 주장합니다.
이를 놓고서 자신을 "호남 누리꾼"이라고 소개하는 윤중대 씨는 호남의 국민의당 지지가 '잘못된 선택'이라는 이들의 주장에 숨어 있는 자가당착의 논리를 꼬집었습니다. (☞관련 기사 : 안철수 찍었으니, 망월동에 콘크리트 부으라고요?) 이 글에 진중권 동양대학교 교수가 "노골적인 클리엔텔리즘"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관련 기사 : )
이 공방을 본인을 "재미 커뮤니케이션 평론가"라고 밝힌 재미동포 레이 오 씨가 기고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진중권 교수의 발언이 "호남과 호남 사람에 대한 혐오를 교묘하게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4.13 총선에서 드러난 호남 민심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이 반박을 두 번으로 나눠서 싣습니다. <프레시안>은 이 토론을 계속 이어갈 예정입니다. ([email protected])
4월 총선, 유권자들은 여의도 밥을 먹고 사는 정치인과 평론가를 위해 두 개의 반전을 마련했다.
첫 번째 반전은 수도권에서 대패한 새누리당의 원내 1당 지위 상실이었고, 두 번째 반전은 호남을 독점했던 더불어민주당의 참패와 국민의당 완승이었다. 국민의당에 뒷발이 걸린 새누리당의 페이스가 꼬이는 바람에 얼떨결에 제1당의 자리를 차지한 더민주당의 일부 극성 지지자와 야권 정치 논객은 일제히 호남인을 향해 비난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유명 인사가 바로 진중권이다. 정작 호남이 노무현과 민주당에 몰표를 줬을 때 "전라인민공화국"이라고 조롱하던 진중권은 호남 유권자 다수가 이번에 국민의당에 표를 주자 이를 '저열한 지역주의'라고 꾸짖는다. 사리에 맞지 않다.
호남 몰표를 비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몰표를 읍소하고, 협박하는 진중권의 이중성을 지적한 <프레시안>의 한 호남 누리꾼에게 답하는 진중권의 방식은 교묘하고 치졸하다. 몰표를 줬다고 욕하고, 몰표를 안 줬다고 욕하는 자기 모순에 대한 지적은 모른 척 입을 씻고 엉뚱한 반론을 펼친다. 호남 지역주의를 꾸짖는 지식인들 태반이 영남 호적이며, '경북' 소재 대학 교수 진중권 같은 인사라는 대목만 골라내어 "호적을 제 정체성으로 알고 살아 왔으니 남들도 다 그럴 거라 믿는 호적 결정론"이란 식으로 핵심을 피해 반박하는 것이다.
특정 지역 유권자들의 호적과 정치적 선택을 엮어 "전라인민공화국"이라는 상상의 이적 단체를 창조해낸 진중권이 정작 본인의 출신지나 직장 소재지가 언급되는 것에 대해서는 극렬하게 반발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한 호남 누리꾼의 호적 결정론과 부패한 호남 지역주의를 준엄하게 꾸짖은 진중권의 이 칼럼은 공교롭게도 <프레시안>이 아니라 대구-경북의 유력 지역 신문에 게재되었다.
왜 진중권은 호남 누리꾼 윤종대의 글을 읽었을 <프레시안> 독자들에게 답을 하지 않고, 절대다수는 그런 글이 존재하는지도 모를 대구-경북 신문 구독자 앞에서 '호남 까기'를 시전한 것일까? 그날 뜬금없이 진중권의 칼럼을 읽은 대구-경북 독자들은 전후 맥락도 모른 채 진중권의 고자질만 듣고 어떤 호남 사람이 지역 감정 유발 선동을 했다는 왜곡된 메시지만 기억에 담게 되지 않을까?
진중권도 즐겨 인용하는 미디어 학자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가 메시지"라고 했다. 어떤 미디어냐에 따라 같은 메시지도 다르게 해석된다는 것이 맥루언의 통찰이다. <프레시안>이 아니라 일베가 본사를 둔 그 곳, "대구 경북 1등 사랑"을 사시(社是)로 하는 지방 신문을 이용해 답변을 한 진중권의 선택은 그의 메시지를 해석하는 데 있어 빼놓아서는 안 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맥루언의 관점에서 보자면 진중권의 그 발언은 명백하게 대구-경북 지방 독자들을 대상으로 설계(?)한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설마 진중권은 마셜 맥루언도 일종의 호적 결정론자라고 생각하려나?
한국에서 지역 문제를 논할 때 논객이 자신의 출신 지역을 밝히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다. 미국의 공론장에서 인종 문제를 논할 때 자신의 인종을 감추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나는 20년 가까이 미국에 둥지를 틀고 살아온 호남 출신이다). 미국의 공론장에서는 논객의 인종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의 메시지가 해석되는 방식, 받아들여지는 방식이 달라지기도 한다.
얼마 전 오바마 대통령은 임기 중 마지막이 될 백악관 출입 기자 만찬을 열어 농담을 던지며 유력 정치인을 비판하기도 하고, 이날 사회를 맡은 코미디언 래리 윌모어에게 역시 풍자의 대상으로 까임을 당하기도 하는 자리를 가졌다. 대통령을 면전에서 조롱할 수 있는 영예를 누린 이날 래리 윌모어는 오바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듬뿍 표현했지만, 정작 마무리에서 구설수에 올랐다. 래리 윌모어는 오바마 대통령의 역사적 의의를 이렇게 정리했다.
"내가 어렸을 때 그 시절 미국은 미식축구팀의 쿼터백 자리에 흑인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단지 피부색 때문에 흑인은 미식축구 팀을 이끌어갈 만큼 유능하지 못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지금은, 오바마의 시대에 한 흑인이 자유 세계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할게요. 이봐, 배리, 네가 해냈구나! 나의 니가(nigga)."
전 국민이 시청하는 생방송 카메라 앞에서 미국의 현직 대통령을 '깜둥이'라고 부르다니, 정작 오바마는 쿨하게 받아들이고 웃으며 포옹으로 격려했지만 래리 윌모어의 경솔함을 지적하는 언론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만약 이날 n자가 새겨진 '말 폭탄'을 터뜨렸던 래리 윌모어가 흑인이 아닌 백인 코미디언이었다면 단언컨대 그의 커리어는 화려한 대미와 함께 종결되었을 것이다. 왜냐? 맥루언의 발상에 따르자면, "메신저가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소중합니다(All lives matter)."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도널드 트럼프이다. 전직 KKK 지도자였던 데이비드 듀크나 도날드 트럼프가 "모든 생명은 소중합니다"라는 발언을 지지한 대표적 유명 인사이다. 혹자는, 아마도 2차원적 논리 세계에 살고 있는 진중권은 이리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이 말을 트럼프가 했건, 오바마가 했건 무슨 상관인가? 말 자체로 맞는 말 아닌가?
어떤 메시지를 해석할 때, 우리는 그 메시지가 발화된 전체 맥락을 고려해야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 작년(2015년) 한 해 많은 미국에서 흑인 남성들이 불의하게 공권력에 희생당한 사건이 미디어를 통해 알려지면서 "흑인의 목숨은 소중합니다(Black lives matter)"라는 풀뿌리 사회 운동이 들불처럼 확산되었다.
흑인은 물론 리버럴 성향의 백인들이 이 구호에 동감하고 동조한 반면, 공화당 성향의 보수적, 더 나아가서 인종 차별적인 일부 백인들은 "흑인 생명만 소중하냐? 모든 생명은 다 소중하다"라는 반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유독 젊은 흑인 남자들이 부당하게 차별받고 목숨을 빼앗기는 문제의 시정을 요구하는 평등 구호가 트럼프와 그 지지자에 의해 마치 흑인 우월주의 선동인 것인양 왜곡되고 재해석됐던 결과가 저 "모든 생명은 소중합니다"였다.
사람들에게 "모든 생명은 소중합니다"와 "흑인의 목숨은 소중합니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어떤 결과가 될까? 저 발언을 한 사람들의 인종과 정치적 성향, 인종 차별적 혐오 발언 경력 그리고 "흑인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구호가 나온 배경을 모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를 선호할 것이다.
그러나 마셜 맥루언의 가르침대로 누가 그 메시지를 말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폭스뉴스가 하는 말이냐, 트럼프가 하는 말이냐, 혹은 백인 인종 차별주의자가 하는 말이냐에 따라 발언의 맥락(context)과 의미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리버럴 백인 정치인인 힐러리 클린턴과 버니 샌더스는 공개적인 유세 자리에서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가 아닌 "흑인의 생명이 소중하다"를 지지한다고 공언했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따져보자. 인종 문제를 논하는 사람이 자신의 인종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온당한가? "인종 차별이요? 에이, 요새 누가 인종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고 그러나요? 그런 거 사라졌어요"라고 한 백인 청년이 말하는 것과 흑인 청년이 말하는 것을 같은 무게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후자의 상황이라면 미국 사회가 진일보했다는 징표가 되겠지만, 전자의 상황이라면 여전히 미국의 주류 백인들이 인종 문제를 감추려 한다는 의혹만 가중시킬 뿐이다.
한국의 지역 문제 역시 출신 지역에서 자유로운 3자란 있을 수 없다. 호남의 시민운동가가 호남의 토호 문제를 거론하는 것과 영남 출신의 정치인 유시민이나 충청도의 진중권이 호남 토호 운운하는 것은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후자는 한국식 인종 차별적 비하(racial or ethnic slur)로, 사회 통합을 위해 도덕적으로 단죄해야 할 유사 범죄 행위다.
만약 미국 대학에서 누가 진중권과 비슷한 레토릭으로 인종 비하 발언을 했다면 그 교수는 퇴출되고 여론 재판이라 불려도 좋을 만한 사회적 응징을 받게 될 것이다. 지식인 사회나 비즈니스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사회적 징벌 원리가 작동된다.
최근 인종이나 여성 비하를 서슴지 않는 도널드 트럼프가 각광받는 현상은 공공 장소에서 혐오 발언을 대놓고 할 수 있는 짜릿한 대리 체험을 즐기고 싶어 하는 백인 인종 차별주의자의 반발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 그동안 사회 분위기에 눌려 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그 혐오 발언을 트럼프가 뻔뻔하게 대신 해주니 그가 얼마나 예뻐 보이겠는가?
호남인 비하 발언을 줄곧 쏟아내던 진중권이 노무현재단의 부름을 받아 서울 지역 추모 행사의 사회를 맡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특정 지역의 국민을 차별하는 발언을 하면 오히려 주가가 상승하고 출세를 하는 것이 헬조선의 단면이다.
"천정배는 그나마 호남 성골이에요. 안철수는 (호남 출신) 부인 덕에 호남에서 진골 대접 받는 거라…."
"잽 부시가 멕시코 불법 이민자들에게 나긋나긋한 것은 (멕시코 출신) 부인 때문이지요."
위의 발언은 진중권, 아래의 발언은 트럼프가 한 것이다. 두 가지 발언이 얼마나 다른가? 담고 있는 메시지의 차이가 거의 없다. 충격적인 것은 한 사람은 미국에서 변태 수준의 극렬한 인종 혐오론자로 평가받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한국의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논객으로 높은 평가와 명망을 누린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 지금 트럼프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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