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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진짜 독립 영웅은 간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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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인도의 진짜 독립 영웅은 간디가 아니다 [유라시아 견문] 수바스 찬드라 보스 : 남국의 열혈남아
도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대영제국의 위신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렇다고 인도인의 마음이 국민회의로 쏠렸던 것도 아니다. 1942년 '인도를 떠나라(Quit India)' 운동 이후 국민회의는 유명무실했다. 간디와 네루 등 지도부가 수감되면서, 사실상 활동 중지 상태였다. 종전 당시 인도인들의 영웅은 국민회의가 아니라 인도국민군이었다.

대영제국에 협력하며 유라시아를 동분서주했던 그 인도군(Indian Army)이 아니다. 그 반대편에 섰던 이들이다. 그래서 최초의 '국군(India National Army)'이기도 했다. 대영제국에 무력으로 도전했던 또 다른 군대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미얀마를 거쳐 벵골로 진입해 콜카타를 점령하고자 했다.

대영제국과 대일본제국이 최후의 일합을 다투었던 임팔 전투에서도 일본 편에 섰다. 종전 직후 인도 총독부는 이들을 군사 재판에 회부했다. 장교 300명을 반역죄로 기소했다. 그러나 인도 민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들이야말로 인도 독립을 위해 헌신한 민족 영웅이라며 총궐기한 것이다. 총독부는 인도인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결국 전원이 석방된다. 영국이 더 이상 인도를 통치할 수 없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 인도국민군의 지도자가 수바스 찬드라 보스이다. 인도의 제2차 세계 대전사를 복기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40도를 넘어 50도까지 치오르는 남국의 열기를 뿜어냈다. 격정적이고 격렬했다. 감정적으로 가장 몰입되었다.

그는 1897년, 벵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였다. 영국식 법치를 인도에 이식하는 식민지 엘리트였다. 그러나 악질 친영파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인도인을 위한 인권 변호도 했다고 한다. 보스는 자신의 삶에 부친의 영향이 컸다고 회고했다.

그는 소싯적부터 총명했다. 인도 최초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콜카타 대학에 차석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특유의 다혈질은 대학 시절부터 불을 뿜었다. 영국인 교수들의 인종 차별에 반발하여 학생 시위를 주도했다. 주동자로 정학 처분도 받았다. 겨우 학사를 마치고는 제국의 본산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특히 근대 유럽의 국제 관계를 깊이 연구했다고 한다. 군사력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친구들이 주권재민과 법치주의와 의회제와 국제법 등의 '선진성'을 달달 외고 있을 때, 그는 근대 국가=군사 국가라는 본질을 직시했다. 가르치는 대로 배우는 모범생이 아니었다. 자기 주도로 학습했다.

그래도 인도 고등문관시험에는 응시했던 모양이다. 시험에도 합격했다. 그런데 식민지 지배의 하수인이 되는 길이라며 자격을 반환했다고 한다. 진술이 엇갈리는 대목이다. 2차 자격 고사인 승마 시험에 떨어졌다는 설이 있다. 아무래도 후자가 사실이지 싶다. 거짓말을 했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자신의 과거를 미화시키는 기억의 왜곡은 흔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보스처럼 유명한 정치인들에게는 더더욱 빈번한 일이다.

자의든 타의든 이로써 보스의 인생은 크게 갈렸다. 식민지 관료는커녕 그 반대편,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인도로 귀국한 것이 1921년. 곧바로 국민회의에 투신했다. 출중한 능력에 개인적 매력까지 발산하며 1927년에 국민회의 사무총장에, 1930년에는 콜카타 시장에 취임한다. 앙팡 테리블, 30대부터 거침없이 출세가도를 달린 것이다.

그러나 유독 간디와는 합이 맞지 않았다. 비협력과 불복종의 유효성에 회의를 품었다. 간디의 비폭력주의가 위대한 철학일지언정, 현실의 국제 정치에서는 통용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영국이 무력으로 지배하고 있는 이상, 인도 또한 무력에 의해서만 독립할 수 있다고 했다. 양자의 불화는 예견된 것이었다.

1930년대부터 보스는 독자 노선을 걷는다. '30대 기수'의 전위에 섰다. '전진동맹'을 결성하여 국민회의 내부의 좌파, 급진파로 세를 키워갔다. 1938년에는 국민회의 의장까지 거머쥔다. 마흔 남짓에 인도를 대표하는 정당의 당수가 된 것이다. 처음에는 간디가 아량을 베풀었다. 노선 투쟁 격화를 우려하여 보스를 의장으로 세운 것이다. 당시만 해도 국민회의는 1인 지배 정당에 가까웠다. 간디가 지명하면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그래서 1936년과 1937년에는 네루가 연임할 수 있었다. 간디가 네루의 후임자로 보스를 낙점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권을 쥐자마자 보스는 자신의 색깔을 드러냈다. 취임 연설부터 영국에 대한 최후통첩 의사를 밝히며 독립 노선을 강화했다. '인도 독자의 사회주의'도 제창했다. 동시대 소련과 독일, 이탈리아의 약진을 주시하고 있었다. 청년, 농민, 빈곤층의 지지가 상당했다.

그러나 간디는 우려했다. 공산주의와 전체주의에 적대적이었다. 소련이나 독일에 접근하기보다는 대영제국의 품에서 자치를 확대해가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사회주의적 근대화'에도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주지하듯 간디는 근본주의자였다. 산업화와 근대 문명 자체에 비판적이었다. 자립 경제와 마을 자치만이 인도가 가야할 길이라고 했다.

그러나 간디와 보스의 불화는 노선차이라기보다는 기질 차이가 더 컸다. 네루 또한 소련식 사회주의에 우호적이었다. 다만 네루는 간디에 고분고분했다. 불만이 있어도 속으로 삭히는 편이었다. 대장정 이후 마오쩌둥처럼 소금 행진 이래 간디는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누렸다. 누구도 그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다. 네루 또한 자신을 간디의 충복이자 후계자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보스는 달랐다. 자신만만하고, 야심만만했다. 기개가 넘쳐흘렀다. 스스로를 간디의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일흔 꼰대가 아니라 40대 젊은 피가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39년 의장 선거에서 양자는 정면으로 충돌한다. 간디가 추천하는 후보와 보스가 표 대결을 펼친 것이다. 의장 선거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차세대의 도전이자 당내 민주화 운동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최대 주주로 전권을 행사하던 간디의 뜻을 꺾고, 일반 당원의 지지를 얻은 보스가 크게 이긴 것이다.

간디는 곧장 보스의 승리를 자신의 패배라고 선언했다. 보스로서는 치명타였다. '보스=반(反) 간디'의 프레임을 발신하는 불신임 표명이었기 때문이다.

간디의 발언을 신호탄으로 간디 추종자들의 보스 흔들기가 끊임없이 시도되었다. 친간디 패권주의가 횡행했다. 결국 당선 3개월 만에 의장직을 사임한다. 사실상의 낙마, 쫓겨난 꼴이다. 심지어 3년간 당직 보류 처분까지 받는다.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것이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만은 보스도 간디에 못지않았다. 오뚝이처럼 일어난다. 다만 더 이상 당내 쇄신과 정풍 운동을 추진하지는 않았다. 백의종군했다. 당 밖에서, 인도 밖에서, 새 길을 찾았다.

▲ 간디와 보스. ⓒwikimedia.org

탈출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보스는 솔깃했다. 그토록 고대해마지 않던 대영제국의 난국이 닥쳤다며 환호했다. 인도가 독립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열린 것이다. 반가운 소식이 줄을 이었다.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가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다고 했다. 독일 전차 부대의 영국 상륙이 임박했다고도 했다.

인도 역시 때를 맞춤하여 무장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고 여겼다. 국민회의를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은 여전히 간디였다. 그의 거처를 찾아가 무장 봉기를 일으키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간디는 거절했다. 그러기는커녕 영국을 도와 파시즘을 물리쳐야 한다고 했다. 보스는 간디의 독선(獨善)에 깊이 절망했다.

게다가 1940년 7월 또 다시 투옥된다. 인도 총복부가 보스의 봉기 낌새를 포착한 것이다. 이번만은 보스가 간디를 따랐다. 간디처럼 죽자 살자 단식 투쟁에 나섰다. 보스 역시 두 차례나 국민회의 의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옥중 아사는 총독부로서도 난처한 사태였다. 결국 가택 연금으로 방침을 바꾼다. 그 틈을 이용하여 대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콜카타의 자택을 떠난 보스는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했다. 파슈툰 족으로 분장했다. 면도도 하지 않고 수염도 길렀다. 파슈툰 족은 오늘날 파키스탄의 서북부와 아프가니스탄의 동남부에 살고 있는 민족이다. 그러나 파슈툰 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경찰 검문을 피하기 위해서 귀머거리, 벙어리 시늉을 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소련이 가까웠다. 소련령 중앙아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이번에는 이탈리아 외교관으로 변신했다. 여권도 위조했다. 가명으로 신분을 세탁하여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당시만 해도 보스는 소련만이 인도를 영국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념적으로도 친근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냉담했다. 보스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영국과 군사적으로 적대할 뜻이 조금도 없었다.

▲ 히틀러와 보스. ⓒwikimedia.org

결국 그의 최종 목적지는 베를린이 된다. 1941년 4월 2일에 도착했다. 나치 독일이 절정을 구가할 때였다. 북해부터 지중해까지, 대서양부터 흑해까지 히틀러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었다. 며칠 후에는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까지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유럽 전체가 독일 휘하에 들어가고 있었다. 북아프리카에서도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이 영국령 식민지를 '해방'시키고 있다고 했다.

보스의 눈앞에서 19세기와는 전혀 다른 신세기가, 20세기가 펼쳐지고 있던 것이다. 그가 파시즘에 우호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독일 역시 또 다른 제국주의일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군사력만큼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 힘을 한층 더 고귀한 목적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인도와 아시아/아프리카의 해방을 위해서? 그는 고무되었다.

보스는 전심전력으로 독일을 설득했다. 거듭 보고서를 작성하여 독일 외교부에 타전했다. 추축국과 인도의 협력에 관한 것이었다. 독일이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서북 지역으로 진출하면 내부에서 인도인들이 봉기할 것이라고 했다. 현대화된 5만 군대만 있으면 인도 탈환이 충분하다고 했다.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인도 망명 정부 수립과 서북 변경 지대의 부대 창설을 요청했다. 혹여 인도에서 영국이 건재하다면, 언제든 기력을 회복하여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며 조속한 행동을 촉구했다. 독일의 신질서와 인도의 운명은 불가분이라며 힘주어 역설했다.

75년 전 보스의 보고서는 흥미진진했다. 빨려 들듯 읽어갔다. 유라시아 전체의 판세를 읽는 통찰이 번뜩였다. 대영제국의 심장인 인도를 정복해야 중동과 동남아시아의 민중들이 추축국을 지지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은 전혀 허황한 말이 아니었다. 광대한 제국을 경영하고 있던 영국으로부터의 해방에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환호할 것이라는 주장 또한 설득력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오류가 하나 있었다. 독일과 인도 사이에는 소련이 있었다. 독일과 소련의 불가침 조약이 지속될 것이라고 전제했다. 보스가 전망한 독일의 인도 진출 또한 소련의 묵인 아래 가능한 것이었다. 혹은 독일과 소련이 동시에 대영제국을 분쇄하는 그림을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사는 그의 희망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독일과 소련은 합작은커녕 서로가 서로를 소진시키는 육박전에 들어갔다. 독-소전, 제2차 세계 대전 최대의 지상전이 전개된 것이다. 이 소식에 보스는 좌절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인도 민중들도 나치 독일을 지지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전도유망한 정치인들이 그러하듯 보스 또한 자신을 과대평가한 것 같기도 하다. 무솔리니와 회동하고, 히틀러와도 접견했지만 그는 일개 망명객에 불과했다. 대등하게 전술 전략을 논할 처지가 아니었다. 히틀러는 대놓고 불만을 표출했다. 자신은 당신과 같은 선전 선동가가 아니라 군인이라며, 인도 해방은 소련군의 시체를 밟고 난 후에나 가능하다며 역정을 냈다.

실은 히틀러는 속 깊이 아시아인을 멸시했다. <나의 투쟁>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바, 아시아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영국이 인도를 떠난다 해도 20년이 못되어 다시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했다. 당장 인도 자유 정부를 승인해달라는 보스가 성가셨을 것이다. 소련을 점령한 이후에 다시 논의하자며 서둘러 자리를 파했다. 다만 라디오 방송국 설립만은 지원해주었다. 독일이 침략국이 아니라 해방군이라는 선전용으로 보스를 활용했다.

그럼에도 보스는 방송에 사력을 다했다. 심혈을 기울여 원고를 작성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했다. 곧 추축국이 대영제국을 해체시킬 것이다. 대영제국을 사수하는 국민회의를 따라서도 안 된다. 즉각 무장 봉기 조직을 만들어 추축국과 협조하여 인도를 해방시켜야 한다. 영국은 결코 인도를 독립시켜 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분할 지배를 획책하여 인도를 여럿으로 쪼갤 것이라며 (정확하게) 예측했다. 영국이 떠난 자리는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미얀마로 사분오열 되었다. 냉전기 남아시아는 항상적인 준전시 상태, 대분할 체제였다.

독일의 원조를 통한 인도 독립의 꿈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아프리카와 중동 전선에서 영국이 독일과 이탈리아에 재역전해갔다. 역설적으로 뭄바이와 카라치에서 출항한 인도군의 공헌 때문이었다. 보스의 구상 또한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반등의 계기가 열린다. 이번에는 유라시아 동쪽 끝이었다. 1941년 12월 일본이 대동아전쟁에 나선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연전연승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대영제국의 동쪽 날개가 무너지고 있었다. 보스는 더 이상 유럽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베를린을 떠났다. 도쿄로 향했다.

▲ 도조 히데키와 보스. ⓒwikimedia.org

돌격

콜카타에서 베를린까지는 유라시아의 육로를 이용했다. 베를린에서 도쿄까지는 인도양의 해로를 따라갔다. 히틀러가 선심을 써주었다. 당대 최강 독일 잠수함을 태워준 것이다. 1943년 2월 8일, 보스는 U-180을 타고 프랑스 서북 해안에서 출항했다.

마다가스타르 섬에 도착한 것이 4월 26일이다. 여기서 일본 해군의 잠수함으로 갈아탄다. 수마트라 항에 도착한 것은 5월 6일이다. 인도네시아는 이미 네덜란드로부터 '해방'되어 있었다. 보스는 장차 인도네시아의 초대 수상이 될 수카르노와 회동했다.

동북아와 동남아의 하늘길은 일본이 접수한 상태였다. 인도네시아에서 일본으로 가는 길은 한결 수월했다. 전투기에 탑승하여 도쿄에 도착한 것이 5월 16일이다. 꼬박 100일이 걸렸다.

도조 히데키를 만난 날은 6월 12일이다. 보스는 재차 무장 투쟁을 통한 인도 독립을 역설했다. 히틀러와 달리 도조는 호의적이었다. 보스의 사람됨에 찬사를 표했다. 남자 중의 남자, 상남자라며 한껏 치켜세웠다. 6월 16일 대일본제국 내각회의에 특별손님으로 초청된다. 그 자리에서 인도독립연맹 총재이자 인도국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일본-인도 연대가 공식화된 것이다.

보스는 더 치고 나갔다. 10월 2일 자유인도 임시정부를 선포한다. 본인이 임시 수반으로 외교와 전쟁 업무를 총괄했다. 초대 임시내각 11명 가운데 8명이 인도국민군 장교로 구성되었다. 전시 내각 격이었다. 국제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일본과 독일, 이탈리아 등 9개국이 승인했다. 보스는 인도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영국에 정식으로 전쟁도 선포했다. 11월에는 도쿄에서 열린 대동아회의에도 참석하여 일장 연설을 펼쳤다.

인도국민군의 본거지는 일본 점령 하의 싱가포르였다. 보스는 특유의 카리스마를 발휘하여 인도국민군을 직접 모집했다. 동남아시아 전선에 인도군으로 파병되었다가 일본군의 포로가 된 이들을 집중 포섭했다.

영어와 힌디어로 번역된 보스의 연설이 동남아 곳곳에 퍼져나갔다. 일본군은 여러분을 전쟁 포로로 여기지 않는다. 동료이자 친구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모든 아시아인들의 해방을 원한다. 그래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일본은 인도 해방을 지원하기 위한 만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적극 회유하고 권장했다.

효과도 상당했다. 보스는 이미 명성이 자자한 국민회의 의장 출신이었다. 싱가포르에서만 전쟁포로 6만5000명 가운데 2만 명이 인도국민군에 참여했다. 보스는 이들을 세 개 부대로 나누었다. 각 부대의 이름을 간디, 네루, 아자드(Azad)라고 지었다. 아자드는 자유라는 뜻이다. 10월 2일에는 인도국민군의 가두 행진도 펼쳐졌다. 10월 2일은 간디의 생일이다. 여기서 인도국민군이 불렀던 군가는 훗날 독립인도의 애국가가 된다.

보스는 이들을 이끌고 미얀마(당시 버마)의 랭군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아웅산과도 조우했다. 이들은 일본군과 함께 임팔 전투에 앞장섰다. 보스는 영국군의 저항을 뚫고 벵골에 진입하면 동인도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자신했다. 끝내 콜카타를 점령하면 일생 그의 무장 투쟁 노선을 반대했던 간디 선생도 기뻐해주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평생의 숙원 달성이 목전에 달한 듯 했다. 커다란 착각이었다.

▲ 일본 잠수함의 보스. ⓒwikimedia.org

의혹

대일본제국의 파산과 함께 보스의 소원 또한 산산이 조각났다. 목숨까지 잃었다. 패전이 임박하자 그는 소련에 협력을 요청하기 위하여 만주로 갈 작정이었다. 영국, 미국보다는 소련이 자신의 안위를 보호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만에서 대련으로 향하는 전투기에 탑승한 것이 8월 19일이다. 현금과 보석이 가득 담긴 여행 가방 둘도 실었다. 또 다시 망명길에 오르는 보스를 위하여 동남아 인교(印僑)들이 십시일반 모은 것이었다. 기구한 그의 운명에 눈물을 훔치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륙 직후 좌측 프로펠러가 떨어져나갔다. 본체는 바닥으로 떨어져 두 동강이가 났다. 폭발음이 일고, 화염이 뒤덮었다.

보스는 3도 화상을 입었다. 대만 육군 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했지만, 무더위에 화상은 더욱 심해졌다. 그의 최후는 의연했다고 한다. 일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음에 여한이 없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은 카레였다. 첫 숟갈을 뜨고 맛있다며 희미하게 읊조렸단다. 세 숟갈 째를 먹고는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다. 8월 20일, 타이베이에 있는 한 절간에서 화장을 했다. 보스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8월 23일이다. 그의 유골 중 일부가 일본에 전해져 한 절(蓮光寺)에 보관되어 있다.

헌데 당시부터 그의 사망 진위 여부에 말이 많았다. 인도 총독부도, 연합국의 동남아 사령부도 일본의 발표를 믿지 않았다. 정황부터가 석연치 않다. 패전국이 된 일본(대만과 만주)을 경유하여 승전국인 소련으로 가려고 했다? 비행기에 동석했던 복수의 일본인들이 생존했다는 점, 인도 임시정부가 보유하고 있던 자산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점, 사건 직후부터 시베리아 등지에서 보스를 보았다는 증언이 속출했다는 점. 게다가 소련-인도 정상 회담의 비공개 만찬에서 흐루시초프가 네루에게 보스를 송환하겠다고 말했다는 통역자의 증언까지 나왔다.

인도 정부로서도 외면만은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간 세 차례나 조사위원회를 꾸렸다. 1956년, 1970년, 그리고 2006년이다. 처음 두 보고서는 대동소이하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것이 사실이며, 생존 가능성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세 번째 보고서가 미묘하다. 위원회가 조직된 해가 1999년, 인도인민당(BJP)이 여당이었을 무렵이다.

의미심장한 내용들이 있다. 비행기 사고는 연합군, 특히 영국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일본군이 꾸며낸 것이라고 했다. 일본에 모셔진 유골 또한 보스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보스가 언제 죽었는지, 원인은 무엇인지 설득력 있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고서가 제출된 2006년에는 재차 국민회의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국민회의 정부는 이 보고서를 채택하지 않았다. 인도국민군과 보스가 부각되면 될수록, 인도독립운동사에서 국민회의와 간디-네루가 누리던 독점적인 위상에 흠집이 가기 때문이다. 보스의 최후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마하트마와 네타지

간디가 마하트마였다면, 보스는 네타지(नेताजी, Netāj)였다. 지도자, 혹은 총통이라는 뜻이다. 석연치 않은 죽음에도, 혹은 바로 그런 탓에 보스는 인도 민중들의 기억에 뚜렷한 이름을 새겼다. 현재 인도의 국회의사당에는 세 사람의 초상화가 있다. 간디와 네루 그리고 보스이다.

처음에는 둘만 있었다. 보스가 포함된 것이 1978년이다. 델리가 자랑하는 웅장한 레드포트에도 보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영국 국왕 조지 5세의 동상이 있던 바로 그 자리를 네타지가 꿰찬 것이다.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네타지 스바스 공대도 있다. 실은 양곤에서 콜카타로 이동했던 작년 11월, 인도에 첫 발을 내딛은 곳도 네타지 스바스 찬드라 보스 국제 공항이었다.

그가 살았던 콜카타의 저택은 박물관이 되어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으로 탈출할 때 사용했던 자동차도 구경할 수 있었다. 벵골에는 지금도 '전진동맹'이라는 정당이 있다. 인도공산당과 더불어 벵골 좌파의 양대 축을 이룬다. 동남아프리카의 인교들은 간디를 기억하지만, 동남아시아의 인교들은 보스를 더 높이 기린다.

마하트마의 이상이 숭고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도덕의 재건, 영성의 진화를 도모했다. 세속화=근대화의 공식을 허물고 영성의 근대화를 추구한 선각자였다. 그러나 너무 앞서 가셨던 것 같다. 초역사적이고 탈역사적이었다. 그래서 인도다운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어진 때에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역사적 인물'도 필요한 법이다. 20세기 인도의 지상과제는 독립과 건국이었다. 무력의 수반 없이 새 나라가 세워진 바를 알지 못한다. '입(立)'의 전제는 '파(破)'이다. 인도 총독부, 대영제국은 타파되어야 했다. 20세기는 난세를 치세로 전환시키는 영웅들의 시대였다. 그런 점에서 보스는 미얀마의 아웅산, 베트남의 호치민,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신중국의 마오쩌둥, 북조선의 김일성, 이집트의 나세르에 견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식민지 지배에 맞서 떨쳐 일어나 무장 투쟁을 펼친 '민족적 사회주의자'의 한 명이었다.

뭄바이에 머물고 있던 1월 말, 모디 총리는 전격적으로 보스와 관련된 비공개 문서 100점을 공개했다. 그 중에서도 당시 영국 총리였던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의 발언이 가장 인상적이다. 영국이 인도를 포기한 것에 국민회의와 간디가 미친 영향은 극히 미미했다고 말했다. 보스가 조직한 인도국민군의 역할이 훨씬 컸다는 것이다. '국군'의 존재를 알게 됨으로써 인도군 또한 더 이상 영국의 뜻에 따라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북아프리카에서 동남아시아까지 실전 경험을 두루 익힌 인도군이 250만이었다. 이들이 '인도 국군'으로 각성하여 총독부로 총구를 돌려 총공격에 나서기 전에 서둘러 떠나야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진술이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군사력이 미비했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 등에서 영국은 더 오래 눌러 앉았다. 보스의 공이 그만큼 컸다고 하겠다.

장차 인도가 부상하면 할수록, 보스의 이름은 더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인도판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사는 물론이요 20세기사 전체의 재인식을 촉발하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그간의 세계 대전사도 냉전사도 지나치게 '승자 중심'으로 기록되고 기억되고 있다. 인도의 경험을 유력한 방편으로 삼아 20세기 유라시아사를 재구성, 재서술할 만하다.

영국이 황급하게 인도를 떠났다고 하여 대영제국과 제2차 세계 대전의 유산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무책임한 방기야말로 파국을 한층 가중시켰다. 분단과 분할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동아시아 대분단 체제에 버금가는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를 살펴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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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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