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해법, '충 자 돌림 왕들'과 달라야 하는 이유
왕이란 '천명'으로 포장된 사적 권력에 불과하지만, 현대 들어와서도 종종 민중과 고락을 함께했던 민족의 지도자로 묘사된다.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민족주의는 '민(民)이 주체가 되는 족(族)'이라는 올바른 민족 개념에 입각한 것이 아니다. 역사 속에 존재해 온 다양한 계급과 계층을 민족이란 이름 아래 뭉뚱그려 버린 파시즘적인 이데올로기이다.
하나의 사례로 고려 시대 원 간섭기의 '충(忠)' 자 돌림 왕들이 있다. 충렬왕부터 충정왕까지 모두 여섯 명이다. 중국 황제들처럼 조(祖)나 종(宗)이 들어간 묘호를 받던 선왕들과 달리 그들은 원이 내려준 충 자 돌림의 시호를 받았다. 그 의미는 당연히 원 황제에게 충성을 다했다는 것이리라. 이처럼 죽은 뒤의 호칭부터 한 등급 강등된 왕들이기에, 우리는 종종 그들을 원 간섭기 고난 받던 백성과 동병상련하던 불쌍한 군주들로 인식하곤 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충 자 돌림 왕들이 원의 강요에 의해 원의 공주와 혼인하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고려는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그 혼인은 사실 원의 강요가 아니라 고려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그럼으로써 충 자 돌림 왕들의 국제적 지위는 격하되기는커녕 더 올라갔다.
충 자 돌림 왕의 기원은 고려의 마지막 종 자 돌림 왕인 원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종이 태자이던 시절 고려는 무신 정권의 지휘 아래 몽골의 침략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러던 1258년 무신 김준이 고려의 최고 권력자 최의를 죽였다. 이로써 대몽 항쟁을 주도하던 최 씨 정권이 무너지고, 고려 조정 내에서 몽골과 화친을 맺으려는 움직임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몽골 대칸 몽케도 고려의 왕 대신 태자가 입조하면 화의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듬해 고려 태자는 몽골로 출발했다.
그런데 태자가 중국의 고도인 경조부(지금의 산시 성 시안)를 거쳐 몽골의 수도인 카라코룸으로 가던 중 문제가 생겼다. 몽케가 죽은 것이다. 몽골 제국의 대권 계승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후계자가 바로 섰다면 별문제가 없었겠지만, 공교롭게도 다음 대칸 자리를 놓고 몽케의 두 동생인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가 맞섰다.
태자는 물론이고 몽골 제국의 제후조차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가운데 누구한테 줄을 서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그때 태자는 몽골 초원을 장악한 아리크부카보다는 중국 쪽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쿠빌라이를 화친 협상의 파트너로 선택했다. 그리고 발길을 남쪽으로 돌려 때마침 남쪽에서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던 쿠빌라이와 만났다.
태자는 소매가 넓은 자줏빛 비단 도포에 물소 띠를 두르고 상아홀을 든 채 폐백을 받들고 길가에서 쿠빌라이를 알현했다. 쿠빌라이는 깜짝 놀라면서 흥분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고려는 만 리나 되는 나라로, 과거 친히 정벌에 나섰던 당 태종조차도 굴복시키지 못한 나라다. 이제 그 나라의 세자가 스스로 와서 내게 귀부하니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
'당 태종조차도 굴복시키지 못한' 나라는 고구려다. 쿠빌라이는 고구려와 고려를 같은 나라로 여겼으며, 그런 위대한 나라의 태자가 아리크부카 대신 자신을 선택한 것을 '하늘의 뜻'으로 포장하며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덕분에 태자는 쿠빌라이로부터 제국의 제후에 준하는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고려에서 고종이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쿠빌라이는 서둘러 태자를 고려로 돌려보내 왕위를 잇게 했다. 태자가 돌아가던 도중 서경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하루빨리 강화도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라고 재촉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자신에게 입조한 태자가 고려의 왕이 되어야 내전에서나 고려와의 관계에서나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태자가 즉위한 1260년,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를 제압하고 몽골의 대권을 장악했다. 고려와 몽골의 전쟁은 사실상 끝나 고려는 몽골의 제후국이 되었다. 그때부터 고려는 몽골의 연호를 쓰기 시작했고, 쿠빌라이는 원종을 번국의 신하로 여겨 조서를 통한 원격 통치를 시도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전쟁이 완전히 종식되고 상하 관계가 안정적으로 작동하려면 한 가지가 더 이행되어야 했다.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서 나와 본래의 수도인 개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원종이 귀국한 1260년부터 10년 동안 이 문제는 끈질기게 이어졌다. 쿠빌라이는 때로는 강하게 질책하고 압박하면서, 때로는 여유롭게 회유하면서 고려 조정의 출륙을 재촉했다. 그러나 원종은 온갖 핑계를 대며 환도를 차일피일 미뤘다. 그것은 원종의 뜻이 아니라 무신 권력자인 김준의 의지였다. 김준은 몽골의 간섭이나 병력 차출에는 협조했다. 그 당시 몽골은 남송을 정벌하는 데 고려의 군사를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고려군이 몽골에 파견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준은 강화도를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그곳이 무신 권력의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1268년, 쿠빌라이는 참다못해 김준을 몽골로 소환했다. 김준은 바쁘다는 핑계로 소환에 불응했지만 몽골의 압박은 거셌다. 그런 와중에 내란이 일어나 김준의 부장이던 임연이 김준을 죽였다. 새로 집권한 임연도 무신이었기에 친몽골로 돌아서지는 않았다. 그 역시 강화도성을 사수하고 몽골에 저항하려 했다. 이듬해에는 환도를 서두르는 원종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원종의 동생인 안경공 왕창을 허수아비 왕으로 옹립하기까지 했다.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쿠빌라이는 임연에게 폐위된 원종과 함께 몽골로 들어와 왕을 바꿀 만한 이유를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지 않으면 무력으로 응징하겠다는 위협이 이어졌다. 그러자 임연은 어쩔 수 없이 원종에게 왕위를 돌려주었고, 원종은 몽골에 들어가 무신 정권을 제거하기 위한 쿠빌라이의 지원을 요청했다. 내가 아는 한국사에서 현직에 있는 왕이 제 발로 다른 나라를 찾아간 사례는 원종이 유일한 것 같다. 러시아 영토로 간주되는 서울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던 조선의 고종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때 원종은 파병을 요청하는 것 외에 왕권을 확실하게 보장받기 위한 비장의 제안을 한다. 당시 몽골에 체류 중이던 세자(훗날의 충렬왕)와 몽골 황실의 공주를 혼인시키자는 것이었다. 세계 최고의 가문과 사돈을 맺음으로써 일거에 '넘버 2'가 될 수 있는 파격의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파병 요청은 받아들이면서도 통혼은 유보했다.
원종은 포기하지 않았다. 무신 정권을 타도하고 개경으로 환도한 뒤인 1271년에 다시 한 번 통혼을 재촉했다. 그러자 쿠빌라이가 이를 받아들여, 세자는 3년 후 쿠빌라이의 막내딸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한 뒤 귀국해 왕위에 올랐다. 쿠빌라이는 1271년 국호를 중국식 왕조 이름인 대원으로 정했으니, 이제 고려의 왕은 원 황제의 부마가 된 것이다. 그 후 고려의 세자가 원 황실에서 황실의 공주와 혼인한 뒤 귀국해 왕이 되는 관행은 계속되었다.
세자 시절인 1272년, 몽골에서 귀국하는 충렬왕은 몸소 몽골식으로 변발을 하고 몽골식 호복(胡服)을 입고 있었다. 고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충렬왕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그러한 습관을 바꾸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하들이 자기처럼 변발을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충렬왕의 태도는 원이 강요한 것이 아니다. 원종이 태자 시절 쿠빌라이와 만났을 때 받아 낸 약속 가운데 '불개토풍(不改土風)'이란 조항이 있었다. 고려의 풍습은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고려의 영토와 주권을 인정해 준다는 뜻 외에도 고려의 의복이나 관습을 몽골식으로 바꾸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원종도 죽을 때까지 변발이나 몽골식 복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충렬왕은 고려의 왕이자 몽골 황실의 일원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몽골식 풍습을 받아들인 것이다.
원을 중심으로 한 세계 제국 체제에서 고려는 확실히 독보적 지위를 지닌 제후국이었다. 몽골의 침략을 받고 복속한 나라 가운데 고려처럼 영토와 주권을 유지하면서 제후국 노릇을 한 곳은 찾기 어렵다. 이러한 사실은 원의 황제가 1310년에 보낸 조서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짐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 백성과 사직을 소유하고 왕 노릇하는 것은 오직 고려뿐이다. 우리 선조대로부터 신하로 복속해 온 지 근 100년에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대를 이어 우리 황실과 장인 사위 관계를 맺고 있으니 우리의 훈척(고려 왕실)은 마땅히 부귀를 누려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종종 역사책에서 '가련하게' 묘사되어 있는 충 자 돌림 왕들의 실제 모습이다. 그들은 왕에게 필수적인 절대 주권의 핵심 부분을 양도하고,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을 처단하고, 침략군의 앞잡이가 되어 내키지 않는 일본 원정을 떠나보내고, 수십만 백성을 몽골 사람의 노예로 끌려가게 하는 등의 매국 행위를 대가로 이처럼 달콤한 지위를 얻었다. 병자호란 때의 피해자 코스프레가 부풀려진 인조도 나중에 다룰 예정이지만, 이런 왕들은 결코 백성과 고난을 나눈 자들이 아니었다.
초강대국 곁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현실은 고려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에 있는 데다 나라가 분단되어 있는 지금이 더 어려우면 어려웠지 결코 못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강대국 사이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온 나라를 들쑤셔 놓고 있는 사드 배치 문제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고려의 '충 자 돌림 왕들'은 백성들의 목숨 값으로 안전과 부귀를 샀다. 모든 백성이 왕의 노예인 전제군주국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은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국가다. 따라서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해법이 나오는 게 당연한 일이다. 대통령과 정부, 그리고 국회에 있는 지도자들이 역사는 확실히 발전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게 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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