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이 자연재해인 한, 지진이 일어난 후 대처를 문제 삼을 수밖에 없다. 어떤 일이 있었는가는 모두가 알고 비판한 그대로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에서 달라진 것을 찾기 어렵다. 국민안전처는 물론이고 대통령과 행정부 전체가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을 잘못 했느냐고? 지진 후에 빨리 회의를 소집해 보고를 받고 "만전을 기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휴대전화 문자 통보는 늦어졌고 국민안전처 홈페이지는 먹통이었다. 생방송 중이던 경주 주민이 2차 지진이 생기자 방송 진행자에게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웃지 못 할 일도 벌어졌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시스템은 아예 구축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매뉴얼을 만들어 놓았다고, 대비 태세를 점검했다고, 가상 훈련을 한번 했다고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 아니다. 이번 사태로 보건대, 이 땅에 '재난 대비 시스템'은 아직 없다! 공중 보건 위기 대비 시스템은 있을까? 그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다시 요구한다. 제대로 된 대비 시스템을 구축하라. 이번에는 지진이니, '지진용' 대책을 내놓겠다고 하지 말라. 대규모 화재, 또 다른 감염병, 비행기나 배의 사고, 홍수, 제2의 삼풍이나 성수대교 사건, 그 모든 것이 다음에 닥칠 위험이다. 모든 것에 대한 대비 시스템이어야 한다.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첫째, 이상한 말이지만, 시스템 구축을 목표로 해야 한다. 사고가 날 때마다 정치적 정당성 확보, 책임 회피, '민심' 달래기가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메르스 사태 당시 우리가 주장한 것을 되풀이한다.
어느 것이라도 전체 시스템을 정비한 이후, 그것을 작동시키기 위한 장치여야 한다. (…) 구조에서 진단과 처방을 찾아야 한다면 더욱 더 시스템에 주목해야 한다. 공공과 민간, 보건과 다른 분야, 개인과 집단, 중앙과 지방을 망라하는 전체 시스템을 같이 변화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관련 기사 : 메르스 사태 이후, 세월호 참사에서 배우는 것)
'통합형' 재난 대비 시스템이어야 한다는 것을 특히 강조한다. 어떤 재난과 사고든, 수많은 정부 부처, 공공과 민간 조직, 여러 이해당사자가 간여한다. 좀 더 일반적으로 표현하면, 재난과 재난 대비에는 개인, 조직, 사회, 거기다가 자연이라는 네 요소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작용하여 결과를 빚어낸다. 그 어떤 대비와 조치도 통합적이지 않으면 '무효'다.
또 다시 리더십을 강조한다. 재난 관리는 "행동을 관리하는 과정"으로, 모든 상황에 적합한 만능 해답이 있을 수 없다. (☞관련 자료 : ) 펼치면 바로 답을 찾을 수 있는 매뉴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운용하며 판단하는 지도력이 중요하다. 그때 '서리풀 논평'에서 주장한 것을 불러온다.
구조와 시스템을 평가하고 바꿔나가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 수많은 목표와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통합하는 것과 자원을 동원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국가적 수준에서 지도력이 발휘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시간 계획을 가지고 단계별로 나누어(단기-중기-장기) 해야 할 일을 제시하며 필요한 정치적, 사회적 자원을 동원해야 한다.
(…)
지금 같아서는 '제도적'으로 그런 지도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돌아가는 형편으로 볼 때 메르스 이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따라서 세월호 이상으로 사회적, 도덕적 권위와 그에 기초한 지도력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이번에도 절감한 바, 한국의 공적 리더십은 '과시적' 공공성을 실천하는 데에 머물러 있다. 위르겐 하버마스에 따르면 근대 이전 공공성의 특징이었다는 바로 그것. "지위의 상징과 같은 것" "지위의 소유자는 이 지위를 공공적으로 과시한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보다 높은' 권력의 체화로 나타낸다." "과시적 공공성의 전개는 인물의 속성, 즉 표장(表章, 휘장, 무기), 용모(의복, 헤어스타일), 거동(인사 형식, 몸짓), 수사(修辭, 말 거는 형식, 공식적인 인사말 일반)" 등이 오늘 이 땅의 공직자와 리더십을 설명하지 않는가.
그것 말고, "사회적, 도덕적 권위와 그에 기초한 지도력"은 풀뿌리에서 시작되는 운동과 정치적 압력에서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도적 국가와 정부의 무능함과 준비 없음을 다시 확인했으니, 살아남기 위한 '자구'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노파심이지만, 이런 노력을 '외주화' '민영화' '개인화'로 오해하지 마시라. 그보다는 오히려 '공적' 지도력을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 물론, 지도력의 회복은 개인의 회심이나 각성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심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번 지진이 일깨운 또 다른 구체적 교훈은 핵 발전을 중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양보해도, 세계 최고 수준의 핵발전소 밀집 지역은 안전하지 않다. 신설을 중단하는 것은 물론, 에너지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화력 발전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니, 발전소 문제는 단순한 에너지 정책의 범위를 넘는다. 에너지 중독에 기초한 성장 패러다임을 벗어나는 것이 핵심이다. '탈성장'의 대안은 경제는 물론이고 삶의 모든 영역에 관련되는 것으로, 심지어 생명과 건강조차 예외가 될 수 없다.
기왕 이에 이르렀으니, 조금 더 밀고 가자. 지진과 핵 발전소가 겹치면서 또 한 가지, 우리는 인위적 위험으로 가득한 '위험 사회'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근대성의 심화가 새로운 유형의 위험을 탄생시켰다는 것이 '위험 사회론'의 통찰이 아닌가. 세월호와 메르스에 이어, 이번에는 지진과 핵발전소. 근대와 함께 찾아온 새로운 위험들이 연달아(해마다!)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기든스가 말하는 '성찰성'이라는 해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성찰적 근대화). 모든 사회 구성원이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합의에 이르고 신뢰를 쌓아가야 위험과 그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여기에다 (한국에서는 더구나) 위험에 대한 '책임성'을 보태고 싶다. 울리히 벡에 따르면, 새로운 위험들에서는 전통적인 경계, 즉 공간적, 시간적, 사회적 경계가 소멸하고 따라서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책임을 묻기 어렵다.
우리 생각은 좀 다르다. 어떤 위험에서는 공간적, 시간적 경계가 흐려지거나 사라졌지만, 또 다른 위험(예를 들어 후쿠시마 사고)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더 명확해지기도 한다. 특히, 사회적 경계가 흐려졌다는 주장(고도로 분화되고 분권화된 현대 사회에서 위험의 책임을 가리기 어렵다)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모든 사람이 원인 제공자이자 피해자"가 되는 것은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묻기 어려운 것은 단지 법률적 책임일 뿐이다. 위험이 현실이 되고 삶을 파괴했을 때에는 정치 주체들의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고 또 물어야 한다. 가장 현저한 위험인 기후 변화를 생각하면, 책임성의 소재가 그리 흐린 것도 아니다.
다시, '최종 공통 경로'는 깊고 너른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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