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지난 6월 유엔 인권이사회는 한국에서 집회·결사의 자유 상황을 조사한 마이나 키아이(Maina Kiai) 특별보고관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 보고서에서 키아이는 한국의 집회·결사의 자유를 저해하는 중요한 장애물로 한국 정부의 물대포 사용을 지적했다. 백남기 씨 사례를 언급하며, "물대포 사용이 무차별적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특정인을 겨냥해 사용하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1)
또한 키아이 특별보고관은 "한국 시민사회는 생동감 있고 다양한 분야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정부는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집회 자체를 볼 것이 아니라 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국민의 기본권인 집회·결사의 자유가 물대포에 유린되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2)
어찌 됐건 한국 정부 덕분에(?) 물대포가 국가폭력의 상징물로 떠올랐다.3) 만약 이러한 흐름을 살려 물대포 사용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산되고 나아가 물대포 추방으로까지 이어진다면, 세계 인권 운동이 한 단계 전진하는 중요한 발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발판을 다지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한국 물대포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2. 한국 물대포의 기원, '조방' 살수
세계에서 시위진압용으로 물대포를 처음 사용한 것은 1930년대 독일인 것으로 알려졌다.4) 그러나 기록상으로 보면 한국이 뒤지지 않는다. 한국 최초의 물대포 사용은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방낙지'로 더 유명한 바로 그 '조방(조선방직)'에서5) 1930년 1월 낙지 먹물처럼 물대포가 처음 뿜어졌다.
조선방직은 1917년 야마모토를 위시한 일제 자본가들이 지금의 자유 시장 일대 4만여 평 땅에 세운 국내 최초의 기계식 면방직 공장이었다. 하지만 2000명이 넘는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착취구조는 그들이 찍어내는 방직물만큼이나 치밀했다. 12시간이 넘는 혹독한 노동 시간과 형편없이 낮은 임금은 기본이었고, 벌금제와 강제 저축, 기숙사비 등을 통한 이중착취까지 이루어졌다. 더욱이 한 방에 13명씩 집어넣고 출입을 통제하는 기숙사 환경은 감옥과 다를 것이 없었다. 1920년대 말 세계 대공황의 여파까지 밀려오면서 노동자들은 더는 버티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6)
1930년 1월 10일 오전 2000여 명의 조선방직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하루 8시간 노동제 실시, 해고제 폐지, 취업 중 부상자에 대한 위자료 지불, 직공에 대한 벌금제 폐지, 식사 개선,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 대우 폐지" 등을 내걸고 총파업에 들어갔다. 경찰과 사측이 파업을 분쇄하는 방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제는 신속하게 경찰을 투입했다. 파업 지도부를 검거한 후, 노동자의 절반이 거주하는 기숙사의 출입문을 폐쇄하고 감금함으로써, 파업 대열을 분리시켰다.7)
기숙사에 사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집단 단식농성으로 맞섰다. 물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농 속에 든 새와 같이 감금된 710여 명의 여공들은 심신이 피로하여", 곧 한계지점에 봉착했다. "그중에는 정신 이상이 생긴 여공도" 있었다. 사측은 찬밥을 주며 이들을 조롱했다. 분노한 노동자들은 단식 사흘째 되는 아침, "정문으로 몰려나와 굳게 닫힌 문을 깨뜨리고" 탈출을 시도했다. 노동자들의 돌출 행동에 놀라 "경찰관이 출동하는 한편", "경비대에서는 소방용 펌프 수십 개를 가지고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1월 한겨울 아침에 뿌려진 물대포는 총칼만큼이나 치명적이었다. 사상자가 대거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파업단 본부원이 나아가 위무(慰撫)"하고 시위대열을 일단 진정시켜 기숙사로 들여보냈다. 사측은 물대포로 강제해산시킨 것에 그치지 않고 "강제로 일을 시키"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기숙사의 여성 노동자들은 "반항하는 뜻으로 옷을 벗고 자리에 누워" 저항했다.8)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절규에 조선 사회 여론도 들끓었다. 그러나 일제 경찰과 조선방직 자본가들의 탄압을 극복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교섭 끝에 노동자들은 사측에서 제시한 "작업 도구의 무료 지급, 벌금제 폐지, 식사 개선" 등의 3개 조항을 수용하며 파업을 시작한 지 10여 일 만인, 1월 21일 공장으로 돌아갔다. 사실상 패배로 끝난 파업의 후폭풍은 물대포보다 거셌다. 주동자들은 검거되었고,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가운데 400명 이상이 해고됐다. 그러나 이 '조방파업'은 일제 강점기 동안 벌어진 국내 최대의 파업 중 하나로서, "민족 차별과 계급 착취, 인권 유린이라는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일제의 악랄한 모습"을 전(全) 조선 사회와 역사 앞에 폭로했다.9) 특히 파업을 주도한 간부의 말처럼 이중, 삼중의 억압을 받고 있던 여성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크게 고취시켰다.10)
"세상에서 흔히 여자는 다 어리석고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자이고 약한 인간이라고 하고 더욱이 우리 같은 여공들은 사람같이 보지 않고 무시하지만, 이번의 동맹파업을 일으킨 뒤로 우리 여공들의 단결된 굳센 힘은 회사 중역들을 놀라게 하였다."11)
3. 또 하나의 '살수대첩', 1960년 4월 19일
이후 기록상으로 물대포가 다시 등장한 것은 1960년이었다.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민중들이 경무대(청와대)로 향하던 역사적인 그날, 바로 4월 19일이었다.
"드디어 다음날인 4월 19일이 되자 오전 일찍부터 서울대학교 학생들을 필두로 하여 각 대학생과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시내 곳곳에서 '3‧15 부정선거를 시정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을 시작했다. 행진대오는 이승만이 있는 경무대관저로 향했다. 경찰은 "경무대로 향하는 경로인 중앙청서측 해무청 전면, 통의동 파출 전면을 강력한 저지선으로 하여,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소방차의 살수준비, 최루탄의 발사준비"를 했다. "오후 0시 30분경에 이르자 사방에서 집결한 시위대원들이 해산에 불응하고 오히려 전진을 시도"하였고, 이에 다급해진 경찰은 "경찰기동대 제3중대원에게 무장을 시켜 공포탄을 보급함과 아울러 소방살수와 최루탄 및 공포탄의 발사"를 지시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도리어 시위대원의 반발만 일으켰을 뿐이고 드디어 저지선은 돌파"되었다.
경무대 어귀에서 다시 무장한 경찰은 "집결하여온 시위대원들과 대치하게 되었던바, 시위대원들은 여전히 대통령을 면담코자 전진을 시도"하였는데, 이에 다시 "시위군중에게 소방수를 살수하고 최루탄을 발사"하였다. 한번 쏟은 물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이 물대포는 이승만 정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역사를 안겼다. 분노로 가득 찬 시위대는 경찰이 살수하고 있던 소방차를 탈취해 경무대경찰서로 진격했다. 당황한 경찰들은 실탄을 발사했다. 그렇게 역사적인 '피의 화요일'은 시작됐다.12)
4월 19일 경찰의 살수는 민중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 핏물은 결국 독재정권을 삼켰고, 한국 민주주의의 생명을 살리는 수혈이 되었다.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 사건 이후로는 물대포를 사용한 시위진압 방식은 사라졌다. 군사정권 시절 곤봉과 최루탄으로 무장한 시위진압대에게 더 이상 물대포는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80년대 말 민주화 바람을 비집고 등장한 노태우는 과거 정권과의 차별화를 위해 곤봉과 최루탄을 대체할 장비를 찾아야 했다. "시위지역 일대의 애꿎은 일반시민들이 최루가스로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겠다며, 1989년 이스라엘로부터 대당 4억2000만 원을 지불하고 살수차 두 대를 사들였다.13) 90년대 초가 되면 물대포는 대규모 집회의 단골손님처럼 등장했다. 이는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었다. 세계 곳곳에서 물대포가 국가 폭력의 상징으로 떠올랐다.14)
그나마 다행히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거치면서 시위와 경찰대응의 물리적 강도도 낮아졌다. 2000년대 들어서는 '촛불집회'와 '폴리스라인'으로 불리는 보다 평화로운 형태로 발전하는 듯했다. 그러나 경찰은 평화로운 집회 문화가 정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회 규모가 커지자 차벽을 치기 시작했다. 2002년 미군장갑차에 사망한 여중생 추모 촛불행렬을 막기 위해 처음 세워진 경찰차벽은 이후 대규모 집회 때마다 단골손님처럼 등장했다. 그리고 2005년 한국 물대포의 기원지인 부산에서 다시 물대포가 등장했다.15)
2005년 11월 부산에서는 APEC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에 맞서 전국에서 모인 약 2만여 명의 시민들이 '반 부시, 이라크전쟁 반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를 외치며 집회를 열었다. 세계정상들이 모이는 자리였던 만큼 집회를 막고자 하는 정부의 대응도 강경했다. 140개 중대 1만 6000여 명의 경찰력이 동원되었으며, 차벽도 모자라 컨테이너 90여 개를 2층으로 쌓아 부산 BEXCO 회의장으로 가는 길목을 막았다.16) 이는 시위대를 자극했다. 컨테이너 박스에 갇힌 민주시민의 권리는 그 벽을 넘고자 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경찰은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다.17)
특히 위 사진에서 보듯이 경찰이 시위대 중 한 사람을 집중 조준하여 물대포로 가격하는 장면은 외신기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마치 천안문 항쟁 당시 탱크 앞에 선 왕웨이린을 연상케 하는 이 장면은 일본을 비롯한 많은 해외 언론에 보도되었고,18) 이후 G20과 같은 세계정상회담이 있을 때마다 세계 각국의 누리꾼들에게 회자되었다.19)
5. 2008년 촛불을 끄기 위한 이명박 정부의 발악
2008년 이명박 정부는 정식 출범 전인 인수위 시절부터 건강보험당연지정제 폐지 등을 논의하며 국민들의 뜻에 역행하는 정책들을 밀어붙였다. 조금씩 축적된 국민들의 분노는 결국 정부 출범 100일도 안 돼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운동으로 분출됐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물론 유모차까지 나온 촛불집회는 점점 커져 5월 말이 되면 연일 수십만이 모이는 규모로 발전했다. 촛불은 횃불이 되어 이명박 정부의 반성 어린 응답을 촉구했으나, 돌아온 것은 광화문 네거리를 가로막은 '명박산성'(컨테이너 박스)이었다.
촛불시민들은 명박산성 따위에 굴하지 않았다. 밤을 지새워 촛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 이름만으로도 뜨거운 '6월'로 촛불이 이어지는 것이 두려웠는지 5월 25일 새벽 4시 20분경 경찰은 드디어 살수차를 가동했다. 그리고 한 시민을 향해 물대포를 발사했다.20)
그러나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결국 촛불은 6월을 밝혔다. 경찰은 6월 1일 새벽 다시 살수차를 출동시켰다. 살수차 3대가 촛불 문화제 후 서울 효자동 일대에서 시위를 이어나가던 시민들을 향해 물을 뿜어댔다.21)
30대 중반의 한 남성이 눈에 물대포를 맞고 연대 세브란스 병원으로 후송됐다. 당시 현장에 함께 있었던 피해자의 형은 언론을 통해 "망막에 출혈이 심해 전혀 안 보이는 상태로 내일(6월 2일) 아침 8시 30분에 결과를 보고 수술을 결정"할 것이라며 의료진의 소견을 전했다. 누워있는 동생의 모습에 분을 삭이지 못한 형은 이후 인터뷰에서 "경찰이 면상을 보고 정면으로 쐈다"며 경찰의 강경 진압을 성토했다. 또한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평화적인 시위에 참여한 무방비 상태의 시민을 경찰이 폭력으로 진압했다"며 "살수차는 분명한 무기"라고 지적했다.22)
병원에 실려 간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물대포를 맞고 실신하여 중구 백병원으로 후송된 사람도 있었다. 그는 언론을 통해 "고막의 3분의 1 이상 크기의 구멍"이 났다며 응급실 의사의 진단 소견을 전했다. 그리고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나의 왼쪽 귀는 듣는 대신 말을 하고 있다"며 자신의 블로그에 "국민을 위해야 할 경찰이 국민에게 얼마나 잔인한지를, 그리고 국민을 대대적으로 무시하는 대한민국 공권력의 현실을" 폭로했다.23)
이처럼 명확한 피해 상황이 발생했음에도 당시 서울경찰청 명영수 경비과장은 "물대포는 경찰 사용 장구 가운데 가장 안전하다"면서 "물대포 맞고 부상당했다면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24) 경찰 측의 이러한 변명은 더 큰 공분을 사,25) 6월 10일 전국 100만 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촛불을 들었다. 결국 이명박 대통령은 "6월 10일 시가지를 가득 메운 촛불의 행렬을 보면서 국민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제 자신을 자책했다"며26)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해야 했다.
6. 급기야 살수(殺水)가 돼버린 박근혜 정부의 살수(撒水)
2015년 11월 14일 박근혜 정부의 노동정책,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소홀, 농민문제, 빈곤문제 등에 항의하며 전국에서 13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 시민들이 '민중총궐기' 집회를 열었다. 주최 측에서는 사전에 행진 신고를 했지만 경찰에선 교통 불편을 이유로 거부했다. 경찰은 당연하다는 듯이 차벽으로 집회를 막아섰고 물대포를 설치했다. 키아이 유엔특별보고관의 말처럼 "물대포와 차벽의 사용은 이 자체를 이유 없는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평화적 집회 참가자와 경찰 간 긴장을 고조"시켰고, "이러한 방식의 공격은 또 다른 공격을 유발"시켰다.
이날은 역사상 가장 많은 살수차가 동원됐고, 가장 많은 양의 살수가 이루어졌다. 총 19대의 살수차가 배치됐고, 시위대에게 경찰이 뿌려댄 물은 총 202톤에 달했다.27) 부상자의 속출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보건의료단체연합 의료지원팀이 직접 응급치료를 했거나 확인한 물대포로 인한 부상자만 30여 명이었다. 일일이 다 기록하지 못한 눈의 손상이나 타박상, 피부발적 등 비교적 경미한 환자까지 따지면 100명이 훨씬 넘었다. 그러나 의료지원팀이 진료한 환자들은 집회 중 발생한 환자들의 일부였을 뿐이다. 곧바로 응급실로 호송되었거나 스스로 의료기관으로 찾아간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28)
이날은 단지 살수의 양만으로 물대포의 역사에 남길 거부했다. 경찰의 '살수(撒水)'는 급기야 '살수(殺水)'가 되어 한 농부를 쓰러뜨렸다. 경찰은 5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사람의 머리를 향해 조준 직사했고, 쓰러진 사람을 구출하러 온 사람들에게까지 물대포를 쏘아댔다.29)
그리고 그렇게 쓰러진 백남기 씨는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진단명은 외상성 경막하출혈(traumatic SDH), 즉 '외상'에 의한 '뇌출혈'이다.(백남기 씨는 9월 25일 끝내 세상을 등졌습니다. 편집자 주)
7. 나가며
2015년 10월 19일 러시아에서 열린 세계의사회 총회에서는 마치 한국의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듯이 다음과 같은 공식 입장을 채택했다. "심각한 어려움과 생명과 건강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정부는 시위 진압 물질의 사용을 어떠한 경우라도 자제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는 경찰과 기타 안전요원들이 시위 진압 물질을 사용할 때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사용하도록 하기 위하여, 고농도 노출로 괴로워하는 이가 있다면 어느 누구든 신속히 대피시킬 것, 사람을 향해 조준하여 사용하지 말 것, 물질을 과도하게 사용하지 말 것 등에 대해 교육해야 한다", 또한 "정부는 시위 진압 물질을 잘못 사용하여 개인의 생명이나 안전을 위협한 이를 처벌하여야 한다."30)
이러한 세계의사회의의 시위진압에 대한 입장에 한국의 과거 물대포 피해 사례가 실제 얼마나 영향을 주었을지는 알 길이 없으나, 영국에는 분명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2015년 7월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물대포 사용을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 영향을 준 '위해성 무기의 의학적 영향 검토 과학자문위원회(Scientific Advisory Committee on the Medical Implications of Less-Lethal Weapons)'가 발표한 보고서에는 주요 '외국' 사례로 한국을 언급하고 있다. 2010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물대포를 맞아 실명한 디트리히 바그너(Dietrich Wagner)씨 사례와 함께 "한국에서는 경찰 물대포로 인한 고막 천공과 뇌진탕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고 명시했다. 한국의 피비린내 나는 교훈을 지구 정반대 편의 영국 정부가 받아들인 것이다.31)
세계에서 이러한 의미 있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던 시점, 정작 당사국가인 한국 정부는 더 강력한 물대포를 준비했고, 결국 세계 최악의 물대포 피해 사례였던 바그너 씨의 실명보다 심각한 피해 사례를 만들어냈다. 사건 발생 후의 대응 역시 세계 최악의 사례로 남을 만했다. 백남기 씨의 딸 백민주화 씨가 유엔인권이사회에서 폭로했듯이 백남기 씨가 200일 넘게 사경을 헤매고 있는 동안 "어떤 사과도, 수사기관의 조사도, 정의도 없었다."(故 백남기 씨가 사망하기까지 317일, 경찰은 어떤 사과도 조사도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백 씨를 부검하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오히려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에게 8년 형을 구형했으며, 500명 이상의 집회 참가자들을 체포했거나 그들에게 소환장을 발부"했다.
백민주화 씨는 지난 6월 17일 유엔인권이사회에서 2분간의 발언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제 아버지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고 싶다"며 "5초"의 시간을 구했다. 그리고 조용히 아버지가 물대포에 맞고 있는 사진을 들어 보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를 대표해 나온 외교부 유대종 국제기구국장은 "우리의 법률이 국제 인권기준에 부합하도록 한국 정부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며 그날 집회에서 "엄격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물대포를 네 번만 사용했다"며 제3세계 독재국가 같은 항변을 늘어놓았다.32)
사실 이젠 백남기 씨의 목소리도 박근혜 정부의 사과도 듣기 어려워 보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백남기 씨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만드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는 백남기 씨와 같은 억울한 죽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경찰의 공권력 남용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일, 나아가 이를 발판으로 물대포를 부끄러운 역사의 유물로 만드는 일 말이다.
* 이 글은 2016년 6월 28일 국회에서 열린 '집회에서 물대포사용 문제와 경찰의 집회대응 개선을 위한 국제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필자의 토론문을 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필자 주.
각주
1) Statement by Maina Kiai, Special Rapporteur on the rights to freedom of peaceful assembly and of association, 32nd session of the Human Rights Council, Agenda item 3, 17 June 2016, Geneva
2) 2016년 6월 17일 자 <경향신문> '유엔 '한국 집회·결사 자유 보고서' 파장 "세월호 진상규명 요구를 '반정부'와 동일시해선 안돼"'
3) 한국 정부의 물대포 사용은 BBC를 비롯한 해외언론에서 여러 차례 다룬 바 있으며, 영어판 위키피디아 'Water Cannon'에서도 시위진압에 물대포를 사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국가로 한국이 언급되고 있다
4) 9 August 2011, The Guardian, 'Use of water cannon on rioters backed across political divide'
5) 옛날 조선방직이 있는 곳이라 하여 지금도 부산 범일2동 일대를 조방 앞이라 부르고 있다. 이 일대에서 독특한 방식의 낙지볶음 요리가 등장했는데, 이를 조방낙지라고 한다.(박훈하 외, 2010년 부산학교양총서-부산의 음식, 생성과 변화, 부산발전연구원, 2010, p.118~121 참조)
6) 2016년 6월 2일 자 <부산일보> '류승훈의 부산 돋보기' 중 '조선방직과 낙지볶음'
7) 1930년 1월 조선방직 총파업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참조
8) 1930년 1월 14일 자 <동아일보> 2면
9)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조선방직 총파업' 참조
10) 1930년 1월 20일 자 <동아일보>
11) 신문 기사를 현대어로 바꾼 것은 산하의 오역, '1930.1.10 조선방직에서 일어난 일'을 참고하였음(☞ 바로 가기 : //egloos.zum.com/nasanha/v/11085131)
12) 1960년 10월 12일 자 <경향신문> '六大事件 判決理由(1)'
13) 1989년 10월 20일 자 <한겨레> '시위진압 '물대포' 이달 배치'
14) 1990년대 초 신문 기사에는 세계 곳곳의 물대포를 사용한 폭력적인 시위진압 사례가 보도되었다
15) 현재 경찰이 보유한 살수차는 총 19대라고 한다.(2015년 12월 16일 자 <한국일보> '폭력 vs 폭력… 현대사, 고비마다 아팠다' 참조) 이후 2004년 농민대회에서 경찰관 58명이 부상당하는 일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또다시 살수차를 구비했다.(2015년 11월 22일 자 <연합뉴스>)
16) 2005년 11월 19일 자 <동아일보>
17) 2005년 11월 19일 자 <국제신문>
18) 사진은 //www.popularresistance.org/ 사이트에서 따온 것이다. 세계 각국 민중들의 저항 소식을 다루는 이 사이트는 이 물대포 사격 장면을 역대 가장 '황당한' 시위 장면 1위로 뽑고 있다
19) //blog.chojus.com/2191
20) 2008년 5월 24일 자 <오마이뉴스>
21) 2008년 6월 1일 자 <오마이뉴스> ''민주주의의 역사'는 내가 기록한다 웹캠·디카·문자중계…'디지털 게릴라' 떴다'
22) 2008년 6월 1일 자 <오마이뉴스> '물대포 직접 맞은 30대 시민 '반실명 상태''
23) 2008년 6월 1일 자 <오마이뉴스> "왼쪽 귀 고막, 절반 가까이가 구멍나다"
24) 2008년 6월 2일 자 <오마이뉴스> '경찰 "물대포 맞고 다쳤다면 거짓말"'
25) 당시 다양한 실험을 하는 인기 방송 프로그램인 <스펀지>에 물대포 위력을 검증하는 실험을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고, 심지어 <조선일보>조차(2008년 6월 2일 자 <조선일보> '물대포 위력? 5m 거리에서 직접 맞아보니…') 경찰과 정부의 물대포 사격에 대해 비판했다
26) 2008년 6월 19일 이명박 대통령 대국민사과 발표문
27) 2014년 한 해 동안 경찰이 사용한 물대포 살수량이 8500ℓ였는데, 이보다 약 24배에 달하는 물을 민중총궐기 집회 하루 동안 사용한 셈이다(2015년 11월 23일 자 <미디어오늘>)
28) 보건의료단체연합 발표 자료 '11월 14일 집회 부상자 발생 및 경찰 폭력 문제'
29) 2015년 11월 16일 자 <오마이뉴스> '[단독영상] 머리에 물대포 맞고 힘없이 쓰러지는 백남기 농민'
30) WMA Statement on Riot Control Agents, Adopted by the 66th WMA General Assembly, Moscow, Russia, October 2015
31) 영국에서 언급한 한국의 사례는 2011년 물대포 직사살수로 외상성 고막천공 및 뇌진탕을 입었다며, 시민 두 명이 헌법 소원을 낸 사건으로 추정된다.
32) 2016년 6월 17일 자 <한겨레> '백민주화씨 "물대포 사용은 부당…사과·조사·정의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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