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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검찰이 야당보다 힘센 한국, 어떻게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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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국정원·검찰이 야당보다 힘센 한국, 어떻게 봐야 하나 [투 트랙 민주주의] ① 97년 이후 한국사회와 정치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투 트랙 민주주의>(서강대학교출판부 펴냄)의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병행접근'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그동안 제도정치 중심적인 민주주의론, 혹은 운동정치 비판론(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에 대한 반 비판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정치의 계급, 국가환원론(손호철 서강대 교수)에 대한 비판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정당정치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운동을 정치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그것과 제도정치 간의 긴장과 보완의 측면에서 87년 이후 한국의 민주화, 그리고 한국 민주주의의 전망을 모색한다. 정치학자들이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의 운동정치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과소평가하고, 사회운동이 초래한 부정적 영향에 주목하는 점을 비판하는 필자의 문제의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정치를 곧 계급 혹은 사회적 역학의 직접적인 반영 혹은 그 당위적 문제의식 속에서 헤게모니의 역할, 정당정치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논의에 대한 비판 역시 적절하다.

정치의 범주를 이렇게 이분화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만, 드는 의문은 왜 이 두 영역의 정치만 존재하는가라는 점이다.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의 확대 과정에서 등장한 가장 중요한 정치세력은 사회운동이 아니라 사실상 재벌과 사법부(헌법재판소), 보수언론이 아닌가? 라는 당연한 질문이 제기된다. 즉 시민사회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대기업, 재벌, 로펌은 로비나 압력집단의 형태로 가장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했고, 보수언론은 헤게모니 투쟁의 전면에 부상했다. 거기에다 사법의 정치화 과정은 매우 노골적이었다. 검찰의 활동이 가장 대표적이지만,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기존의 여야 정당의 활동보다 훨씬 더 심대한 정치적 결과를 가져오는 결정을 내렸다. 그렇다면 보수적 시민사회의 정치화, 국가기관의 정치화는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즉 제도정치와 운동정치라는 이분법은 오히려 87년 민주화 전후의 문제의식에 지나치게 갖혀 있는 것이 아닌가?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경계에 있거나, 그 밖에 있는 생활정치, 특히 지방자치 단체의 운영 과정에서의 지방정부와 지역운동, 지역운동의 지방정부 거버넌스 참여, 노동운동, 노동 시민사회 운동의 지방정부 참여 등은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도 제기된다. 1, 2권의 대부분의 논의는 중앙정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정당과 사회운동 간의 갈등과 긴장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지, 정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영역인 주거 생활 공간에서의 민주화 과정, 작업장에서의 권력 각축과 민주주의의 문제 등은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 이 점에서도 이 책은 역시 87년 전후의 문제의식에 여전히 머물러 있으며, 97년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국가나 시민사회에 더 깊이 침투한 이후의 과정에 대한 문제의식이 약하다. 즉 97년 이후 제도정치나 운동정치 양자 모두의 문제해결 능력의 저하, 촛불시위 등 새로운 사회운동의 등장, 지역 생활세계의 식민화, 소비주의 자기개발논리의 강화로 인한 시민사회 단체의 위축 등이 한국의 민주화에 가져온 심대한 변화를 이 두 정치의 개념으로 잘 포착할 수 있을 지는 좀 회의적인 점이 있다.

저자도 부분적으로 지적하는 점이지만, 정당의 대표성 약화, 제도정치의 한계는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계급대표성과 사회적 대표성의 약화, 정치적 무관심, 청년들의 탈정치화, 정당 엘리트에 대한 불신은 지금 미국의 대선, 영국의 브렉시트 사태, 그리스나 스페인의 새 정치세력의 등장, 폴란드에서의 극우세력의 등장 등의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서구민주주의 혹은 대의제 민주주의, 근대 국가의 인민주권론이 갖고 있었던 근본적인 한계가 노정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도정치가 사회경제적 변화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근대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형식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결과인 셈인데, 이것을 포스트민주주의 국면에서의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새로운 각축과 역할의 변화라는 문제의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구성적 각축'이라는 현실진단과 전망은 '제도정치'의 성격변화, '운동정치'의 주체와 성격의 변화, 그리고 이 두 영역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정치의 '내용'과 역할에 대한 명확한 정립 없이는 너무나 막연한 현실진단으로 머무르고 말 것이다.

(미국의 경우, 제도정치 일반에 대한 불신이 샌더스와 트럼프 열풍으로 나타났고, 그 열풍은 다시 제도의 힘에 굴복당할 처지에 놓였다. 그렇다면 그것이 제도의 혁신, 운동의 재활성화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한반도의 큰 소동으로 끝날 것인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 운동정치는 일부 샌더스 지지자들이 추진하는 것처럼 새로운 정당 혹은 정치집단으로 나아가야하는가? 아니면 현재의 정치제도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하는가?)

'정치의 국가화', '정치의 사회화'의 개념은 마치 정치가 선행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국가차원의 헤게모니 각축, 혹은 국가기관의 개입(필자의 표현으로는 '금단'과 '배제')이 진행되고, 다른 편에서 사회적 저항과 동원이 시작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마르크스나 자유주의자들은 정치의 '사회 중심성'을 강조하고 베버 등은 '국가 중심성'을 전제한다. 즉 정치가 먼저가 아니라 사회 혹은 국가가 먼저이고, 그 기저에는 자본주의 경제 질서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정치는 결과이자 종속변수인데, 마치 정치가 독립변수이자 원인변수인 것처럼 설정하는 것이 타당한가? 18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전 세계에서 정치는 혁명, 민족 해방 투쟁이었고, 그것은 국가를 전복하거나 국가를 세우는 작업이었다. 즉 국가 다음에 정치가 있는 것이므로 '정치의 국가화'가 아니라 국가 안의 정치사회, 혹은 국가를 넘어선 지구정치(제국주의의 식민지 침략, 혹은 1945년 이후 지구적 자본주의와 관련된 지구적인 계급관계)라는 문제의식을 먼저 설정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한미 FTA, 쇠고기 수입문제, 한일 위안부 협상, 사드 배치 문제는 정치사안인가, 국가사안인가? 이 모든 결정은 한국의 여당 정치세력 내에서 이루어진 것인가? 한국의 주권 범위 밖에서 이루어진 것인가? 이런 사안에 대해 야당이 거의 아무런 입장과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은 야당의 무능과 무책임의 결과인가 아니면, 이것이 한국 조건에서 원래 초정치적 사안, 즉 국가사안이기 때문인가? 이것을 반대하는 운동들은 '운동정치'인가 반체제운동인가? 국정원과 검찰의 통진당의 내란음모 사건 제기,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 결정은 정치적 결정인가, 국가적 결정인가? 왜 한국의 국민들은 '자유민주주의 헌법' 정신에 입각해서 이런 사안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거나 비판하지 않는가? 한국의 야당은 정당인가? 아니면 필자가 일부 언급하였듯이 국가의 일부인가? 국가와 정치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필자의 이상과 같은 개념 설정이 갖는 문제점의 원인은 바로 필자가 비판하는 최장집 교수의 정당중심적 설명과 마찬가지로, 국가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정리, 특히 정당정치를 보는 사회중심적 시각(자유주의적인 시각)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치의 국가화'의 힘이 언제나 작용한다"라는 설명 만으로는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것은 필자가 '전쟁정치'의 문제설정에서 강조한 것처럼, (준)전쟁상태의 국가에서는 정당정치의 자율성은 극도로 위축되고, 국가와 사회운동이 언제나 전면에 부딪치고, 양자의 충돌은 의회가 아닌 법원의 판결로 종결되며, 정당정치는 언제나 주변적인 위치에 머물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를 일종의 상시적 '비상사태', 모든 피고용자의 비정규직화, 실업자화, 고용 불안 상태라 본다면, 이것은 과거의 전쟁과는 다른 행태로 (경제)전쟁을 만성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도정치를 통한 문제해결의 가능성은 다른 방식으로 축소된다. 그래서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보면 87년 민주화 이전, 혹은 문민정부 과정에서의 각축, 그리고 포스트민주화 국면 등의 시기 구분도 과연 타당한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한국적 사회과학 정립의 문제의식 속에서 "근대 민주주의의 정치사회학"을 정립하려는 매우 야심한 시도를 하고 있지만, 이 책 전체의 개념과 이론, 그리고 시기구분과 각 사건에 대한 해석과 설명, 포스트 민주주의의 대안 모색이 어느 정도 한국적인 특수성에 뿌리 내리고 있으며,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이는 지금 시점에서 민주주의의 심화 확대라는 보편적인 과제를 성취하는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이 어느 정도 한국에서의 특수한 것이며, 어느 정도 보편적인 것인지에 대한 구분이 필요해 보인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에서의 '정치'라는 장(場)이 갖는 성격(곧 한국에서의 사회, 혹은 국가)에 대한 더 깊은 탐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 미국, 유럽 국가들과의 유형적인 비교도 의미가 있지만, 그것으로는 일반화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온 경로, 즉 역사에 대한 천착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표면적인 비교에 그칠 것이다.

본 연구자도 '정치의 장'(저자인 조희연의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영역과 성격에 관한 문제 설정)을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중인데, 기존에 제기했던 '전쟁정치'와 '기업사회'의 개념에 역사의 살을 붙이고 이론으로 일반화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본 연구자의 잠정적인 생각은 한국에서 정치와 사회를 연결시키는 고리는 거의가 차단되어 있다는 점이다. 선거는 개인과 정당 혹은 정치를 연결하는 거의 유일한 고리이고, 선거 외에 개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게 되어있다. 우선 정당원이 되는 것이 어렵다. 공무원 교사 기업체 간부나 심지어 직원들도 정당원이 되는 것이 어렵다. 한국에서 정당원은 오직 자영업자만 가능하다.

사회적 고리가 차단되어 있다. 노동조합, 지역의 사회조직, 직능단체 등이 정당에 조직적으로 결합하기 어렵다. 여당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야당은 그 고리가 없다. 최근 이화여대와 성주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에서 사회는 탈정치성을 선포함으로써 존속할 수 있다. 각종 기부금품 모금법, 선거법은 대단히 엄격하게 되어 있어서 일상의 영역에서 사회구성원, 사회집단이 정치집단과 연계를 갖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한국에서 여당은 국가정당이며, 야당은 국가정당의 실패를 먹고 살면서 현실에 안주하는 존재다.

그렇다고 국가 환원론, 자본 환원론으로 가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재벌, 그리고 국정원과 검찰이 야당 이상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큰 나라에서,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지역정치가 공간이 거의 차단되어 있는 나라에서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병행이라는 관점에서 한국의 정치사회를 진단하기는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투 트랙 민주주의>(조희연 지음, 서강대학교출판부 펴냄) 책 머리 중


▲ <투 트랙 민주주의>(조희연 지음, 서강대학교출판부 펴냄) ⓒ서강대학교출판부
이 책의 목적은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변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를 정당체계 기반의 제도정치 혹은 반대로 운동정치의 관점에서만 접근하는 일면적인 분석과 달리, 나는 이 책을 통해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상호 관계 안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변형 과정을 보다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분석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이를 나는 '투 트랙 민주주의'라고 표현하였다. (중략)

이 책에서 나는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와 그의 일련의 저작들을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고, 그것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넘어 고자 나름대로 노력했다. (중략)

바라기는, 20~30년 후 한국사회과학도가 현대 한국민주주의를 논의할 때, 최장집도 비판하고 그를 비판적으로 서술하는 나의 저작도 비판하고 하는 식으로 '한국민주주의에 대한 연구의 축적'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그럴 때라야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가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 이 글은 지난 9월 3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책 <투 트랙 민주주의>(서강대학교출판부 펴냄) 출판을 기념해 열린 학술토론회 자료집에 실린 글입니다. 조희연 교육감과 저자들의 동의를 얻어 두 편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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