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에 이어 최강한파가 몰아칩니다. 광화문 광장 캠핑촌도 강추위에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천막 안에 있는 물병도, 몽골텐트 안에 있는 정수기 물통도 얼음으로 변했습니다. 치약과 로션마저 얼었습니다. 시민들이 보내준 과일도 돌덩이로 변했습니다.
광장 생활의 어려움 세 가지를 꼽으라면 추위, 소음, 화장실입니다. 버스나 대형트럭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면 천막이 흔들립니다. 지하철이 지나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몇 차례나 잠을 깼는데, 사람의 적응력이 얼마나 좋은지 지금은 그런대로 잘만 합니다.
더 큰 골칫거리는 화장실입니다. 광화문 지하철역 화장실은 전철이 끊기면 문을 닫아 이용할 수가 없습니다. 혹한의 날씨, 텐트 밖으로 나가기 싫어 밤에는 물도 마시지 않습니다. 어느 촌민은 그리 좋아하는 맥주도 먹지 않습니다.
새벽에 잠이 깨면 길 건너편 24시간 영업을 하는 할리스 커피숍을 이용합니다. 새벽에도 커피를 마시며 토론을 하거나 글을 쓰고 있는 학생들, 노트북을 켜 놓고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모두들 잠들어있는 시간, 설거지를 하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청년들을 봅니다. 화장실을 이용하고 나오면 미안함이 몰려옵니다. 광화문 캠핑촌 사람들 때문에 청년들이 더 힘들게 야간노동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미안하니까 커피는 할리스에서 마시자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커피를 한 잔이라도 더 팔아주면,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년들의 일당이 조금이라도 많아질까요? 할리스 사장님만 돈을 더 많이 벌고,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은 일거리만 늘어나는 건 아닐까요?
광화문 캠핑, 추위와 소음과 화장실
지난해 10월29일부터 시작된 촛불집회로 주말마다 할리스 커피숍을 비롯해 광화문 일대의 상가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다들 장사가 안 된다고 아우성이지만, 광화문 일대는 지난 석 달 동안 '촛불 특수'를 누렸습니다. 사장님들은 두둑하게 돈을 챙기셨을 겁니다.
그런데 평소보다 몇 배의 노동 강도로 일을 한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은 어땠을까요? 이들도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았을까요? 그래서 광화문 촌민들이 모였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의견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새해 엽서를 만들었습니다.
엽서를 들고 식당과 커피숍을 돌았습니다. 사장님과 직원 한두 명이 일하는 작은 식당도 있지만, 아르바이트생을 여럿 두고 있는 가게도 많습니다. 할리스, 엔젤리너스, 스타벅스, 롯데리아, 홈플러스익스프레스와 같은 체인점들에는 노동자들에게 엽서를 건넸습니다.
50여개의 상가에 엽서 200장을 나눠드렸습니다. 삐딱한 눈으로 바라보는 분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은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광화문 캠핑촌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설렁탕집 사장님은 직원들에게 보너스는 주지 못했지만, 일당을 조금 더 챙겨드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느 식당 직원은 월급을 더 주지는 않더라도 주말에는 인원이라도 늘려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생계를 위해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도 들지 못하고,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와 청소를 해야 하는 노동자들, 그들의 노고를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엽서 들고 광화문 인근 상가를 돈 이유
광화문 광장에 캠핑촌이 들어선 지 80일이 지났습니다. 열 동에서 시작한 텐트는 60여동으로 늘어났습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코란도' 모형에 굴뚝을 올린 자동차집을 지었고,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 집을,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청와대를 본 뜬 집을 만들었습니다. 나무로 지은 집이라 훨씬 따뜻합니다.
광장은 하루가 지나면 새로운 예술품들이 만들어집니다. 매니저를 둬야 할 만큼 바쁜 '박근혜 조각상'에 이어 이재용, 정몽구, 김기춘, 조윤선 조각상이 차례로 만들어졌습니다. 포승줄에 묶인 조각상들은 청와대, 국회, 정부세종청사, 삼성 서초동 본사, 현대차 양재동 본사로 출장을 나갑니다.
조윤선 조각상은 지난 11일 세종시에 내려가 블랙리스트를 상징하는 먹물을 뒤집어썼습니다. 조각상들이 광장으로 돌아오면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인기를 독차지해 '포토 존'이 됩니다. 용산참사 때 만들어진 파견미술팀 조각가, 판화가, 사진가, 문화활동가들이 함께 만들었습니다. 며칠 전 둘을 감옥에 보냈으니, 이제 셋 남았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을 패러디한 '궁핍현대미술광장'에서는 첫 번째 전시가 끝나고,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제목으로 두 번째 전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40명의 사진기자와 작가들이 찍은 '시민들의 촛불항쟁 사진전'입니다.
매주 화요일 오후 5시 진행되는 '끝나지 않는 광장토론'은 벌써 아홉 번째를 맞았습니다. 이번 주제는 '대안언론과 광장의 정치'입니다. 2월 9일부터 매주 목요일에는 '광장 혁명을 말하다'는 제목으로 연속 강좌가 열립니다. 재밌는 건 수강료가 강좌 당 1만 원인데, 전 강좌를 수강하면 모두 돌려준다는 점입니다.
지난 7일에는 연극인들이 대형 극장을 광장에 세웠습니다. 이름은 '빼앗긴 극장, 이 곳에 세우다, 광장극장 <블랙텐트>'. 첫 공연으로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빨간 시'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매회 객석이 가득 차 차가운 바닥까지 앉아 공연을 관람합니다. 공연을 보는 시민들이 100여명에 이릅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언론위원회는 2017년 첫 번째 언론상인 1월의 주목하는 시선으로 '광화문 블랙텐트'를 선정했습니다. 언론위원회는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할 블랙리스트의 폐해를 적시하고, 표현과 예술의 자유가 민주의 뼈대임을 부르짖는 블랙텐트의 정신에 주목하였다"고 수상 이유를 밝혔습니다. 매일 저녁 8시 공연입니다.
대형 극장까지 들어선 광장
며칠 전 탄핵 시계가 빨라진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2월 중순에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결정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변호인단이 무더기 증인을 신청하면서 탄핵이 2월 말 3월 초에 진행될 것이라고 합니다. 탄핵 되는 날 바로 텐트를 걷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한겨울을 온전히 광장에서 보내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박근혜가 감옥에 가고 이재용과 정몽구를 감방에 보내면, 우리 삶이 달라질까요? 지난 연말 경남 창원 촛불집회에서 "박근혜가 퇴진하면 내 삶도 나아질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던 24살 전기공이 질문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촛불집회에도 나오지 못하는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의 힘겨운 노동이 정당하게 대우받지 못한다면, 열심히 일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고 정규직이 될 수 있는 나라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촛불이 단지 권력자를 바꾸는 것 밖에 되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1000만 촛불혁명이 권력자 교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광장의 민주주의 촛불을 삶터와 일터에서 밝혀야 합니다.
첫째, 우리의 삶터, 동네에서 정치의 주체로 나서는 일입니다. "너 정치하려고?"라는 말은, 정치를 특권층의 전유물로 만들고 싶은 지배세력의 올가미입니다. 우리가 광장에서 든 촛불은 최고의 정치행동입니다. 임기가 남은 권력자를 끌어내리는 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촛불항쟁에 참여한 시민들 스스로가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정당을 만들 수도 있고, 기성 정당이나 진보정당에 가입할 수도 있습니다. 삶터에서 시민들과 함께 한국사회의 미래를 토론하고 행동하는 일입니다.
둘째, 우리의 일터, 직장에서 노동의 주체로 나서는 일입니다. '노조', '민주노총'이라는 단어에 '불순'과 '특권'이라는 색깔을 입힌 건, 일터를 자본의 전유물로 만들고 싶은 가진 자들의 속셈입니다. 최고의 권력자를 끌어내린 촛불의 힘 일부만으로도 일터를 바꿀 수 있습니다.
당신의 노고를 고맙게 여기고, 당신의 노동에 정당한 대우를 하는 직장을 만들 수 있습니다. 노동조합에 가입하거나 노조를 만드는 일입니다. 노조는 헌법이 보장한 권리이고, 당신을 도와줄 노동운동가, 변호사, 노무사들도 많습니다.
기업노조를 만들기 어렵다면 산업별노조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같은 산업에 종사하면 실업자나 취업준비생도 노조에 가입할 수 있는 금속노조나 공공운수노조도 있고, 청년유니온과 알바노조도 있습니다.
촛불을 들고 대한민국 역사를 바꾼 당신, 이제 정치와 일터를 바꾸는 촛불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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