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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호ㆍ이정렬이 '스폰서 판사'보다 파렴치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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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서기호ㆍ이정렬이 '스폰서 판사'보다 파렴치한가? [최강욱의 시야비야(是耶非耶)]<1> 조용환·서기호·이정렬의 고난
최강욱 칼럼의 제목 '시야비야(是耶非耶)'는 사마천의 사기 첫머리에 나오는 '천도(天道) 시야비야(是耶非耶)'에서 따온 말입니다.

사마천은 "하늘의 도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 是耶非耶)"라고 외칩니다. "어진 이로 이름난 백이 숙제는 굶어 죽었고, 공자의 제자 중 으뜸인 안회는 극빈 속에서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러나 천하의 대악당 도척은 매일 죄 없는 백성을 죽여 그 살로 회를 치고 포를 떠먹었는데도 천수 오복을 누리고 죽었다. 하늘의 도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라고 외쳤습니다.

최강욱 변호사 역시 우리 사회를 향해 "하늘의 도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라고 묻겠다는 것입니다. <편집자 주>


'역병' 같은 민주주의

사람 둘만 모이면 권력관계가 형성된다고 한다. 모든 권력은 타자를 지배하고 통제하려 든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정보 및 지식의 독점이고, 스스로를 신비화 할 수 있는 권위 등일 것이다. 그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아니면 쟁취하기 위해 인류의 역사에선 수많은 피바람이 일었다. 많은 이들의 억울함이 산처럼 쌓였다. 그 탄식의 깊이 또한 바다보다 깊을 터이다.

힘 있는 이들은 늘 다수가 되고자 했고, 소수의 입을 막고 짓밟았다. 숫적으로 열세일 때에도 막강한 재력과 물리력을 가졌으니 절대적인 힘으론 결코 소수가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뿌리깊은 나무'라는 소설에서는 백성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읽고 쓰는 사태를 들어 밀본 정기준은 물론 세종 이도조차 '역병'에 비유한 것이다.

'역병'은 오늘 날 민주주의다. 위정자들과 지식인들이 아무리 사회정의와 공익을 부르짖은들 대중과 소통하지 않는 가치와 철학은 외로운 메아리로 남을 뿐, 함께 교감하고 감응하지 못하는 권력은 더는 사람을 움직이거나 바꿀 수 없다. 그래서 인류는 많은 이들의 피와 땀을 바탕으로 인권의 소중함을 지키고 다수의 횡포로부터 소수를 보호하는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왔다. 그 역사의 열매는 우리 헌법에도 제법 오롯이 담겨 있다. 하지만 작금의 사태는 우리가 그토록 발전시켜왔다 자부하고, 그 소중한 가치를 지켜내려 노력했던 헌법이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다는 현실을 아프게 보여준다.

조용환, 서기호, 이정렬의 고난

▲ 곽노현 교육감에 대해 벌금형을 내린 판사에 대해선 강경 보수 진영이 맹공을 가했었다 ⓒ뉴시스
조용환 헌법재판관 선출안이 기어이 부결되었다. 천안함이 북의 공격으로 폭침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않는다는 것이 반대자들의 이유다. 신영철 대법관이 법원장 시절 재판에 간섭하여 사법권의 독립을 훼손한 것을 비판하고, 시민들과의 눈높이에서 소통하고자 노력했던 서기호 판사는 기어이 재임용 탈락이 확정되었다. 근무평정이 부진하다는 것이 이유다. 합의 내용까지 공개하며 징계를 감수하고 재판의 공정성을 변론하려 했던 이정렬 부장판사에겐 정직 6월이라는 이례적 중징계가 내려졌다.

친구 변호사에게 사건을 알선한 고등부장판사는 정직 5개월, 세칭 '벤츠여검사'의 스폰서로부터 향응과 선물을 받은 부장판사는 정직 2개월이었다. 과연 이정렬의 소행과 진심은 그들보다 파렴치한 것이었을까. 아니, 어쨌든 힘을 가진 기득권 세력과 높은 사람이 보기에 불편한 사람이라는 것이 그 원인이 되었을 뿐이라고 하면 지나칠까.

국회에서는 야당과 소수자에 대한 예의와 배려, 인권의 가치에 충실한 삶을 견지해 온 조용환 후보자의 식견과 경륜은 외면한 채, 정치적 입장에 따른 폭력적 논의만 횡행하였다. 법원에서는 국민과 소통하며 사법부의 새로운 신뢰를 쌓으려 했던 두 판사의 신선한 시도가 '튀는 행동'으로 치부되어 징치되었다. 영혼 없는 공무원들의 굴종에 따른 거짓과 은폐가 일상화된 행정부야 더 말할 것이 없다.

국회의 인사청문회에서 소위 보수세력은 조 후보자의 국가관, 안보관을 문제 삼았다. 그것도 남편을 현직 대법관으로 둔, 헌법학 교수 출신의 박선영 의원이 가장 집요하게 "확신"을 강요했다. 보통 사람에게 어떤 사안에 대한 확신을 강요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력이다. 하물며 재판관에게 확신이란 표현은 삼가야 할 일이다.

마땅히 재판관은 늘 '합리적 의심'을 유지해야 한다. 거기에서 '이성적 토론'과 '공정한 판단'이 도출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자신의 예단과 선입관을 확신하는 자가 재판관이 될 경우, 그는 법정에서 자신의 의견만을 내세워 군림하려 들고 당사자는 커다란 재앙에 직면하게 되며 진실은 독선에 막혀 표류할 위험이 있다. 하물며 정부 발표를 자기 확신의 근거로 삼는 재판관이 있다면 그는 권력의 추종자일 뿐이다. 그래서 재판관은 '직업적'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귀가 닳도록 교육 받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정치권력의 입장에 따라 현실을 왜곡하거나, 스스로 만들어낸 우상에 가려 진실을 외면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북한'이라는 존재 앞에 그리고 '국가안보'라는 단어 앞에 우리 사법의 이성적 판단은 그 예봉을 상실한 채 표류한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강고한 확신과 아집의 향연을 보라

과거 불온서적 사건은 물론, 최근 수행한 천안함 관련 왜곡보도 정정 및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서 나는 너무도 강고한 확신과 아집의 향연을 감내해야만 했다. 언론중재위원, 고위 법관이라는 이들이 "일개 과학자가 왜 다국적 조사단이 참여한 정부 합조단의 결과 발표를 부정하는가"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며 국가관은 무엇인가" "천안함 사건이 북의 소행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를 가져오면 청구를 받아 주겠다"라는 식의 비이성적 질문으로 일관하는 것을 견뎌야 했다.

문제는 기사가 지적하고 있는 팩트가 올바른 것인지에 있음에도,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북한이 했다는 정부의 발표를 확신하는 것이 애국이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이든 마땅히 감수해야 한다는 일방적 태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왜, 어쩌다 천안함 사건은 이성적 토론과 검증의 대상에서 벗어나 확신 여부만을 살펴 인정을 강요하는 사상검증의 도구가 되었는가. 어째서 법관 재임용 심사는 직무수행이 불가능한 이를 걸러내는 것이 아닌, 수뇌부의 의사에 고분고분 복종하지 않는 이를 배제시키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그리하여 왜 우리는 오늘 좋은 판관 둘을 잃었다며 통분하는 목소리를 접하고 있는가. '그들이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는 우리 헌법이 정한 기본권에 포함되지 않는 것인가?

이성적 토론이 배제된 채 힘에 의한 강제가 횡행하는 사회는 불행하다. 사법의 영역에서 조차 헌법정신이 무시당하니 언필칭 '민주적 기본질서'를 지향하고 구현한다는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도무지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일들이 속출한다. 군대는 불온서적에 이어 '종북 앱'을 삭제하라며 압박하고, 독립의 소중함과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법관들은 자리를 잃고 있다.

천안함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과학자의 노력은 실체도 막연한 안보의식과 비과학적 결론 앞에 굴복을 강요당하고, 양심과 이성의 회복을 촉구하는 지식인의 목소리는 조중동의 악마적 선동 앞에 틀어막힌다. 세상이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어째서 우리는 지금도 헌법의 기본을 지키라는 목소리마저 외면당하고, 억지가 아닌 논증으로 답하라는 주장이 공허한 메아리와 비아냥으로 되돌아오는 폭력으로 난타당하는 현실을 견뎌야 하는 것인가.

재판관이 정부의 판단과 결론에 확신을 자백하도록 강요당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였던가. 아니, 정부의 결론에 토를 달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이 사법부의 역할이었던가.

명백히 재판에 관여하려는 상급자의 부당한 횡포에 대항하여 법관의 독립을 수호하려했다는 이유로, 주권자인 국민과 동일한 눈높이에서 소통하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이 우리 헌법이 천명한 사법권 독립의 실체였던가. 과연 그들의 머리 속에 자리한 민주주의는 어떤 이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결국 그들이 원하는 민주주의는 합리적 진실이 꽃피는 그것이 아닌 다수의 통제에 대한 굴복, 일방적인 강제에 대한 굴종의 강요가 아닌가.

'가카의 빅엿'이나 '가카새끼 짬뽕', '뼛속까지 친미'라는 말은 판사가 만들어낸 말이 아니다. 세간에 회자되는 말을 인용하였을 뿐이다. 법관도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표현의 자유를 구가할 권리는 분명히 보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선 '품위'를 운운하며 눈을 부라린다. 그래서 결국 징계와 임용거부로 보복했다는 의심을 자초한다.

아니, 법관이 편견을 앞세워 진실을 외면하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보다 더한 품위 훼손이 어디 있는가. 법원장이 판사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재판 진행에 일일이 간섭하고 사실상 지시하는 것보다 더한 품위 손상이 어디 있는가. 그 이상 법관으로서의 직무수행이 부적격한 사유를 찾는 것은 어디서 가능할까.

그런데 현실은 '근무평정'을 내세워 한 사람의 법관에게서 신분을 빼앗고, 숨죽인 다른 법관들에게 암묵적 경고를 보내는 일로 정리되려 한다. 그들에게 '품위'는 상급자에게 대들지 않고 눈을 내리깐채 수긍하는 태도를 말하며, '자질'은 인성과 식견, 철학을 여러 사람들이 다면적이고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가 아닌, 단순한 사건처리 실적과 윗사람에 대한 고분고분한 태도에서 주어지는 등급으로 귀착되는 것일까. 그래서 근무성적 부진에 따른 재임용 탈락을 두고 시민들과 동료 법관들조차 이를 다수의 횡포와 인사권자의 보복으로 읽는 것이다. 다른 분야가 아닌 다양성 속의 독립을 필수적 요소로 하는 사법 분야의 인사와 관련하여 벌어진 일이기에 현실은 심각하다.

헌정질서 파괴 행태를 보이고도 건재한 집권세력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요소로 (1) 인권의 존중 (2) 법치주의 (3) 권력분립 (4) 의회제도 (5) 복수정당제도 (6) 선거제도 (7) 사법권의 독립 (8) 복지국가의 이상 등이 꼽힌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권력자와 집권세력은 인권위를 폐지하거나 독립성을 훼손하려는 시도를 지속하였고, 불온서적 사건과 기무사와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등으로 인권을 훼손하고 법치주의를 무너뜨렸으며, 국회를 집권자의 명령을 수행하는 행동대원들의 집회소로 전락시켰고, 숱한 날치기 및 폭력적 의사진행으로 의회제도를 무력화하며 야당의 존재를 부정함은 물론, 선관위에 대한 공격을 통해 선거제도의 공정성마저 훼손하려 했다.

여기에 더하여 소신 있는 판사의 재임용 탈락과 대법관 신영철의 막무가내식 자리 보전으로 사법권의 독립을 훼손하고, 헌법재판소의 구성에도 확신의 강요를 통해 다양성을 통한 정의실현의 기회마저 봉쇄하는 시도를 지속하고 있다. 선진국 같으면 정권이 열 번은 퇴진하고 남을, 거의 완벽에 가까운 헌정질서 파괴의 행태를 보이고도 아직 건재한 것이 우리를 '통치'한다는 집권세력의 현실이다.

권력의 남용을 통한 강제와 통제의 시대. 그로 인해 왜곡되는 숱한 진실과 정의, 짓밟히는 인권과 법치는 처절하다. 그 와중에 우리가 견지해야 할 희망은 어디서 발견할 것인가. 깨어있는 시민이 체계화된 정보를 통해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야말로, 부정한 권위를 내세우는 권력집단에게는 가장 심각한 재앙이 될 것이다.

통제를 위해 소통을 거부하는 이들은 이미 평등한 공론의 장에서 기탄없이 소통하고 지혜를 모으는 집단지성 앞에 누추해진다. 그러니 우리의 헌법과 민주주의는 기어이 살아나고 말 것이라 믿는다. 시대를 읽지 못하고 변화에 뒤처지는 세력의 말로는 비참할 것이다. 오호, 통재(嗚呼痛哉)! 라고 외치는 그들의 탄식은 공교롭게도 그들이 그토록 지향하던 '통제'의 발음과 닮았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그저 안타깝고 부끄러울 뿐이다. 이제 선거는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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