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EU 무역분쟁도 '패널 소집' 단계
한·일 분쟁은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를 제소하고 패널 설치를 요구해 받아들여진 경우지만, 정반대로 한국 정부가 패널 설치를 요구받은 경우가 있다. 바로 한국이 유럽연합(EU)과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 내용 중 일부를 한국 정부가 이행하지 않았다는 문제제기에 따른 것이다. 유럽연합이 제기한 문제는 한국 정부가 ILO 기본협약 비준 및 국제 노동기준에 맞도록 노동조합법을 개정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8개의 ILO 기본 협약 중 4개(제87·98호 결사의 자유 협약, 제29·105호 강제노동금지 협약)를 아직 비준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유럽연합이 문제삼고 있는 '국제 노동기준에 맞도록 개정을 요구하고 있는 노동조합법' 내용은 무엇일까? 지난해 7월 4일 유럽연합은 한국 정부에 '전문가 패널 설치'를 요구하면서 관련 내용을 상세하게 유럽연합 홈페이지에 공개한 바 있다. (아래 그림)※ 붉은 밑줄은 강조를 위해 필자가 그어놓은 것. 위 내용은 다음 URL 주소로 들어가 pdf 파일을 내려받으면 확인할 수 있음 :
(관련 기사 : 후진적 한국 노동 정책, 결국 무역분쟁까지 일으키다)
'근로자(노동자)' 개념을 확장하라!
노조법 2조 개정만 쏙 뺀 문재인 정부
유럽연합이 위 문제를 제기하며 전문가 패널 설치를 요구한 시점은 작년 7월 4일, 벌써 1년 하고도 2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한국 정부는 지난해 9월 말에 ILO 핵심협약 비준안과 함께 3개의 노동조합 관련 법 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해 국회로 발의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우선 한국 정부는 약속한 4개의 핵심협약 비준이 아니라 29·87·98호 협약 비준안만을 국회에 제출했다. 29호와 함께 강제노동 금지협약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105호 협약을 제외한 것이다. 게다가 3개의 노동조합 관련 법 개정안에는 유럽연합이 강력하게 제기한 노동조합법 제2조와 관련한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노조 설립신고와 관련한 제도개선 내용도 없었다. 오히려 사업장 기반으로 구성된 노동조합의 경우 해고자·실업자는 임원이나 대의원으로 선출될 수 없다는, 사실상 유럽연합 요구와 완전히 충돌하는 개악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사업장 내 쟁의행위 일체를 금지시킬 수 있는 "사업장 일부 또는 전부 점거 금지" 조항, 그리고 단체협약 유효기간 상한선을 현행 2년에서 3년으로 연장시키는, 그동안 사용자들이 염원해왔던 노조 탄압수단까지 입법 내용에 포함시키고 말았다. 교원·공무원의 단체행동권을 보장하라는 ILO 수차례의 권고도 문재인 정부 입법안에서는 완전히 무시되었다.사법부가 대신 해결해준 노조법 2조 4호 (라)목
지난 9월 3일, 대법원은 박근혜 정부가 노동조합법 제2조 4호 (라)목과 관련해 전교조에 '노조 아님 통보'를 한 행정처분이 위법한 것이었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실제 '노조 아님 통보' 행정처분의 근거는 시행령에만 있는데, 본 법률에는 이 처분의 근거도 명시되지 않았고 시행령에 위임되어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대법원 판결 취지에 따르자면, 조합원 가입 범위에 해고자를 포함시킨 특정 사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노조 아님 통보'라는 행정처분 일체가 위법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 취지는 사실 ILO 결사의 자유 협약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행정관청이 노동조합을 하고 말고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 ILO 핵심협약의 취지니까 말이다. 대법원의 판결 내용은 국제 노동기준에 부합하는 것이지만, 그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문재인 정부의 행정은 국제 노동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ILO 협약은 사법부의 최종 확정판결 이전에는 노조 활동을 중단시켜선 안 된다는 원칙을 갖고 있는데, 문재인 정부는 대법원 판결 전까지 전교조 법외노조 상태를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다.노조 설립신고 했더니 1년 넘게 자료 보완과 출석조사
'노조 아님 통보' 문제는 해결했지만 한국 정부는 아예 노동조합 설립신고 시점부터 진입장벽을 설치하고 있다. 지난 글에서 전국대리운전노조가 문재인 정부 하에서 무려 1천일에 걸친 천신만고 끝에 설립필증을 교부받았다는 얘길 전한 바 있다. (관련 기사 : 노조 설립신고에만 1000일 걸리는 나라)
째깍째깍 다가오는 한-EU 무역분쟁 패널 보고서
본래 한-EU FTA 합의내용에 따르면 전문가 패널 소집 요청이 있을 경우 2개월 내에 3명의 전문가 패널을 선정해 활동을 개시하도록 하고 있다. 3명의 패널은 90일 내에 일종의 권고 역할을 할 '패널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아래 그림) 그럼 유럽연합과의 무역분쟁 관련 전문가 패널 논의는 현재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을까?유일한 해결책 : 노조법 2조 개정
그 사이 국회 구성이 바뀌었다. 지난해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ILO 협약 비준안과 노조법 개정안은 20대 국회 종료와 함께 폐기되었다. 그래서 21대 국회 개원 후인 올해 7월 7일, 정부는 다시 협약 비준안과 법 개정안을 발의했는데, 문제는 작년에 제출한 내용을 단 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제출했다는 점이다. ILO 핵심협약 4개 중 105호 강제노동 금지협약은 여전히 빠져 있고, 노조법 2조 개정은 담겨 있지 않고 온통 개악안으로 가득 찬 정부 법안이 다시 발의된 것. 이 법안들이 이대로 통과된다면, 그리고 통과된 법에 대해 노동자들이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에 제소한다면, ILO는 한국 정부가 핵심 협약을 위반했다고 판정할 것이 거의 확실한 수준의 법안들이다. 지난 6월 30일, 화상으로 열린 한-EU 정상회담에서 EU 측은 ILO 핵심협약 비준과 노동기본권 보장을 다시한번 촉구한 상태이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패널 보고서 작성시한도 째각째각 다가오는 상황이다. 군사독재 시절과 달리 한국 정부는 노동탄압국의 오명을 벗을 것인가, 아니면 또다시 노동 후진국의 멍에를 뒤집어쓸 것인가. 해결책은 노동조합법 2조 개정에 있다. ILO 결사의 자유 협약을 비준한다면,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협약에 맞게 노동조합법을 개정해야 하고, ILO 협약은 한국의 특수고용이나 플랫폼 노동, 실업자·해고자는 물론이고 일반 자영업자에게도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법 2조의 1호 '근로자' 개념을 확장해 특수고용·플랫폼 노동과 실업자·해고자를 포괄해 낸다면, 유럽연합이 제기하는 모든 문제를 한방에 해결할 수 있다. 게다가 대법원이 노조법 2조 4호의 (라)목 문제를 대신 해결해준 상황 아닌가. 그렇다면 남는 쟁점은 노조 설립신고 문제인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현재 노조 설립신고 처분 결과가 늦춰지고 있는 노동조합들의 핵심 쟁점이 모두 특수고용·플랫폼 노동 또는 실업자·해고자 조합원 자격 문제 아니던가. 이건 노조법 2조를 개정하면 금방 해결되는 문제이다. 국제 노동기준도 맞추고, 노조 할 권리도 보장하고, 유럽연합과의 무역분쟁을 종결시킬 수 있는 길! 문재인 정부는 왜 한사코 이 길만은 가지 않으려 할까? 본인 스스로 선거에서 공약으로 내걸었던 국민과의 약속들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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