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늦가을, 나는 국내 최초로 열린 좀비 학술대회에서 같은 해 여름에 연달아 개봉된 연상호 감독의 영화 <부산행>과 애니메이션 <서울역>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그때까지 좀비에 대해 두 세 편의 글을 썼지만, 글로벌 자본주의 괴물 좀비가 한국에 언제 상륙할지, 또는 자생할 수 있을지 별반 확신이 들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연상호 감독이 두 편의 멋진 좀비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선보이게 되어, 대한민국은 <부산행>의 한 표현을 빌리면 '좀비민국'으로 바꿔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발표가 끝나고 종합토론 자리에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한 선생님께서 했던 총평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정확하게 옮길 수는 없지만 대략 이런 말이었다. "이제 좀비가 현대의 온갖 철학과 문화 이론의 피와 살, 내장을 탐닉하는 괴물, 모든 이론이 빠져드는 블랙홀이 되겠군요." 우려와 기대가 반반 섞인 말로 기억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분의 언급은 내가 쓴 글에도 얼마간 해당되는 것이었다. '인간 이후의 존재론과 신자유주의 너머의 정치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김형식의 <좀비학Zombiology>을 읽으면서 오래 전에 학술대회에서 들었던 촌평이 떠올랐다. 과연 이 책은 A에서 Z(아감벤Agamben에서 지젝 Žižek)까지, ㄱ에서 ㅎ(가타리Félix Guattari에서 후쿠야마Francis Fukuyama)까지 도미노로 촘촘히 세워도 이(齒牙) 하나 빠지지 않게 철학자와 이론가의 저작을 광범위하게 인용하고 있었다. 책을 읽다보면 마치 좀비라는 괴물을 해석하기 위해 예외상태(아감벤), 인간의 종말(푸코), 역사의 종말(후쿠야마)이 도리어 발명된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좀비학>의 의의와 가치를 폄훼하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전도(顚倒)의 감각은 활력 있고, 유려하며, 재미난 문체로 쓰인 문화비평서를 읽을 때 체감할 수 있는 것이다. <좀비학>은 그런 유의 책이다. 이 책은 좀비처럼 혐오와 구역질을 유발하는 괴물을 멋지고 세련된 포스트휴먼의 혁명주체로 탈바꿈시킨다. 아이티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주술에 걸려 밤낮없이 일만 하는 노예였던 좀비는 (탈)식민주의적인 영화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1943)와 함께 미국에 상륙해, b급 하위문화, 특히 조지 A. 로메로의 시체 삼부작을 거쳐 지금은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Ⅰ·Ⅱ>(2019, 2020)에서 남녀노소, 평민과 양반, 왕과 신하 너나할 것 없이 맨발로 뛰어다니는 봉두난발의 떼 괴물(mob monster)이 되었다. 그 즈음에 근대는 탈근대로 서서히 바뀌었으며,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늑대인간처럼 홀로 어슬렁대던 근대의 괴물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고, 좀비가 전 지구적 자본주의로 식민화된 탈근대를 해석하는 알레고리 괴물로 등장한다. 이 책의 문제의식과 설정, 방법론은 변이와 진화를 겪어온 족보 있는 괴물에 대한 역사적인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좀비학>은 제목에 걸맞게 좀비에 대한 다양한 어원, 그 문화적 유래를 짐작하게 하는 수많은 문학과 영화, 다른 괴물들과의 차이, 좀비에 대한 여러 해석학을 참조하고 휴머니즘과 반휴머니즘, 신자유주의와 통치술, 삶과 생명의 간극, 인류세와 팬데믹 등의 문제 틀로 좀비 알레고리, 알레고리 좀비에 대한 방대하고도 심도 있는 탐구를 수행한다. 독자들은 <좀비학>이 제공한 싱싱하고도 풍성한 재료를 살과 피, 뼈까지 핥아먹고 포만감에 젖어 아랫배를 만지다가 어느새 포스트휴먼 좀비로 변신하는 것만 같은 자기 자신을 틀림없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영혼 없는 신체'인 좀비는 무엇에 대한 이름(알레고리)인가. "좀비는 모든 '이름이 없는 자들'의 이름이다."(32쪽) 비록 우리가 사는 사회가 좀비사회이고, 우리의 삶이 좀비의 그것을 닮았지만, 우리=좀비는 한낱 대상이나 객체가 아니다. 좀비는 새로운 주체성을 요구한다. 모든 대표와 재현에서 배제당한 억압받는 자들, 소수자들에 대한 이름 없는 이름이 되어야 한다! <좀비학>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테제다. 좀비는 그저 혐오감을 주는 비체(卑體, abject)적인 은유로만 머물지 않는다. 좀비물에 열광하면서 그것을 사유의 대상으로 탐구하는 이들에게 좀비를 비체로만 간주하는 것은 좀비의 변이와 진화를 무시하는 처사다. 좀비는 알레고리가 되기를 요구하는 괴물이다. 시대와 역사, 자본주의에 대한 은유와 환유의 알레고리. 그런데 알레고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편으로 표상(이미지)으로 표현하되 그 너머의 개별에서 집단에 이르는 정신적·도덕적 의미를 추론하고 종합하도록 요구하는 해석기계다. 독자는 <좀비학>에서 잘 구축된 좌파 해석학의 성채에 입장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알레고리는 '모든'과 '없는'을 극에서 극으로 오가는 해석기계이기도 하다. 이러한 해석기계에 좀비를 집어넣으면 세상 모든 게 좀비 아닌 것이 없고, 또 좀비인 것도 딱히 없다. 그리하여 이 책의 어느 순간부터 좀비는 알레고리 밖으로 뛰쳐나와 현대사회 이곳저곳을 배회한다. 화려함을 넘어서 과장된 문체 때문인지는 몰라도 500여 쪽에 이르도록 지칠 줄 모르고 달리는 이 책을 읽다보면, 좀비는 썩은 눈과 갈라진 입, 내장이 비어져 나오고 팔다리의 일부분이 뒤틀리거나 잘린 채 온갖 오물덩어리를 뒤집어쓰고 인육을 탐하러 몰려드는 괴물로 더는 보이지 않게 된다. 대신에 <좀비학>의 좀비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와 들뢰즈의 생기(vitality), 네그리의 역능(puissance)으로 충전하고 월가 시위에 좀비 분장으로 퍼포먼스를 벌이는 문화연구 전공의 힙스터 대학원생 모임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진지해야 마땅할 이런 대목을 만나면 눈물이 나오지 않아 못내 아쉽다. "만일 니체가 설탕 농장에서 채찍을 맞고 있는 좀비의 모습을 보았더라면, 그는 말 대신 좀비에게 뛰어가 그를 끌어안고 사죄하며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167쪽) 상상해보라. 초인을 설파한 니체가 농장의 좀비를, 니체의 후예로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 푸코가 걷는 좀비를, 들뢰즈와 네그리가 역능의 좀비-되기를 위해 뛰는 좀비를 끌어안는 장면을. 그리고 곧 이어질 또 다른 장면을…… 그렇다면 역능을 지닌 포스트휴먼의 좀비를 분장시키기 위해 <에티카>를 쓴 말년의 스피노자보다 좀비를 비롯한 괴물의 계보를 작성하기 위해 <지성개선론>을 쓴 청년 스피노자를 인용해보는 것은 어떨까. 스피노자는 본질과 행동에 그릇된 관념들의 구체적인 사례를 든다. 그는 숲과 이미지, 짐승, 사물에 신성이 있다는 확신, 신이 기만당한다는 데카르트적인 가설과 함께 "신체들의 단순한 결합에서 지성이 생기는 신체들이 존재"한다거나 "추론하고 배회하며 말"하는 "시체들"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을 그릇된 관념의 사례로 든다(바루흐 스피노자, <지성개선론>, 강영계 옮김, 서광사, 2015, 66쪽). 그리하여 스피노자는 생동하는 물질을 말하는 오늘날의 신유물론(숲, 이미지, 짐승, 사물에 깃든 신성),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신체들의 결합에서 지성이 생기는 신체)과 <좀비학>에서 저자가 특별히 강조하는 혁명적 주체성의 형상인 '포스트좀비'의 대표적인 영예를 누리는 <웜바디스>(2013)의 좀비 R(추론하고 배회하며 말하는 시체)의 저주어린 선구자로 변신한다. 맥스 브룩스의 좀비 아포칼립스 소설 <세계대전Z>(2006)에는 퀴즐링(quisling, 부역자)으로 명명되는 일군의 인간 무리가 등장한다(<워킹 데드> 시즌 9·10에서 좀비 행색을 하고 다니는 위스퍼러whisperer 무리를 떠올려도 좋겠다). 소설에서 증언자는 "좀비처럼 움직이고, 좀비 같은 소리를 내고,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면서 먹으려고" 드는 사람들, "좀비의 마음에 들려고 하고, 한패가 되고 싶어 하고, 그들처럼 되려고 하는" 사람들, 좀비와 다를 바 없으며 끝내 좀비에게 순순히 먹히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아무래도 내게는 <좀비학>의 저자가 좀비-되기를 수행하는 좌파 퀴즐링이나 위스퍼러의 한 멤버처럼 보인다. 2년 전엔가, 나를 좀비 강연자로 호명했던 어느 대학의 강연 자리에서 좀비에 대한 지금의 책을 준비하던 저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는 저자의 정체를 몰랐다. 내가 거기서 무사히 빠져나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좀비에 대한 본격적인 좌파 문화비평을 수행한 국내 첫 저서인 <좀비학>에 대한 이 서평을 작성하기 위해서였던가. 저자의 배려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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