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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3차대전, 이지 스톤 마이크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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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세계3차대전, 이지 스톤 마이크 잡다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 9 이지 스톤

김구학회(대표 한동우)의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 중 10편을 골라 주 2회(수, 토요일)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는 김구, 조봉암 등 선열들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직시하며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겨레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독백 형식의 글이다. 모든 글은 선열들이 남긴 기록들, 행적들, 역사적 사실들 등을 토대로 하여 필자의 의견을 가미했다. 연재 순서는 다음과 같다.

네이버 블로그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에는(//blog.naver.com/tongwoohn/222631939375) 2020년 7월 이후의 모든 연재 글( 25편)을 볼 수 있다.

1. 김구 선생 마이크 잡다

2. 죽산 선생 마이크 잡다

3. 마륵사(마륵사) 선생 마이크 잡다

4. 일곡(유인호) 선생 마이크 잡다

5. 김재준 목사 마이크 잡다

6. 강원용 목사 마이크 잡

7. 스코필드 박사 마이크 잡다

8. 서인주 도사 마이크 잡다

9. 이지 스톤 마이크 잡다

10. 땅 속 운동권 마이크 잡다

아직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봄, 나는 <한국전쟁 비사(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란 책을 펴냈소. 이 책을 두고 음모론이니 남침유도설이니 평가들이 나왔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그런 측면이 없었던 게 아니었소. 내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당시 극동군사령관 맥아더를 비롯해 미국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북한의 남침을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었다는 것, 이러한 북한의 무력 도발을 이용해 대대적 군비 증강에 나서면서 소련과의 군사대결 체제를 완성했고, 이를 통해 서유럽과 일본 등 핵심 우방국들을 미국의 정치·경제·군사적 영향권 아래 단단히 묶어둘 수 있었다는 점이오. 나아가 이러한 미국의 패권전략을 위해 무고한 코리아의 주민들이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는 점이오.
▲이지 스톤(1907~1989). 미국 유일의 개인독립신문(I.F.Ston's Weekly) 발행인.
원래 1947년 3월, 트루먼 대통령이 선언한 대소 봉쇄전략(트루먼 독트린)의 핵심은 정치·외교적 봉쇄였소.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자체 재무장과 함께 서유럽과는 NATO라는 군사동맹을 결성했고, 샌프란시스코 단독 강화를 통해 일본을 미국의 군사기지로 만들면서 대 소련 군사 포위망을 완성했소. 군사적 봉쇄, 즉 한국전쟁을 계기로 ‘냉전이 군사화’된 것이지요. 물론 한국전쟁에 대한 대응을 놓고 미국 내부에서는 심각한 갈등과 대립이 있었소. 현지 사령관인 맥아더와 덜레스 등 공화당은 전선을 중국에까지 확대해 마오쩌둥 공산정권을 몰아내려 한 반면, 트루먼과 애치슨 등 집권 민주당은 전쟁을 한반도에 국한시키고 미국의 재무장, 그리고 서유럽 및 일본과의 세계적 군사동맹 체제를 완수하려 했소. 결국 이 대립이 1951년 4월 전쟁 수행 중인 군 사령관 맥아더를 대통령이 전격 해임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불러왔고. 전쟁 확대를 원하는 맥아더를 해임했다고 해서 트루먼이 평화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소. 미국의 재무장과 서유럽 및 일본과의 군사동맹 완성을 위해서는 공산권과의 군사적 대치 상황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오. 공산 세력과의 군사적 대치 상황이 아니라면, 당시 2차 대전의 여파로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서유럽이나 일본의 국민들이 대대적 군비증강에 순순히 동의했을 리가 없지 않소. 맥아더가 중국과의 전쟁을 원한 반면, 트루먼은 전쟁 확대는 피하되 평화도 바라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소. 그러니까 공화당과 민주당, 미국의 어떤 정치세력도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원치 않았던 셈이오.​ 미국이 진정 평화를 원했다면 1951년 여름 종식시킬 수도 있었을 한반도의 교전 상태를 이후 2년이나 더 끌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소. 즉 ‘냉전의 군사화를 통한 동맹세력 확보’라는 미국의 세계 패권전략을 위해 무의미한 살육이 계속되었던 것이오. 3년이 넘는 전쟁으로 당시 코리아 인구의 10%가 넘는 3백만-4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하는데,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소. 내가 죽던 해 냉전이 종식됐고, 2년 후에는 소련이 붕괴됐소. 그러나 소련이 망하고 30년 이상이 지났는데도 세계의 평화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소. 중동지역은 1979년 이래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 등으로 쑥대밭이 됐고, 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미국과 러시아가 일촉즉발의 대치 상태에 있으며,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2018년 미·중 대결이 공식화된 이후 한반도와 대만이 미·중 군사 대결의 최우선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소. 가장 놀라운 것은 1950년 시작된 한국전쟁이 7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오. 2018년 문재인-김정은, 김정은-트럼프 정상회담에서 약속된 종전선언마저도-평화협정이 아니라-여태까지 감감 무소식이라니, 아마도 한국전쟁은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전쟁이 아닌가 하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0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자유의 집에서 회동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2019.06.30. ⓒ공동취재단

나는 왜, 어떻게 <한국전쟁 비사>를 썼나?

도대체 무엇이 아직까지도 한국전쟁의 종식과 한반도,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 정착을 가로막고 있는가. 현 상황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미국 정책 당국자들의 상황인식과 속셈 그리고 전략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소. 우선 ‘나는 왜, 어떻게 <한국전쟁 비사>를 썼나’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소. 제 아무리 비판적 독립 언론인이라 해도 전쟁 기간 중에, 자국 정부의 전쟁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사실 나도 전쟁 초기에는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별 생각 없이 받아들였다오. 한국전쟁은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됐으며, 이는 소련의 지령에 따른 무력에 의한 세계 공산화의 첫 단계라는 것, 다시 말해 북한은 소련의 하수인이고, 남침은 민족통일을 위한 내전이 아니라 공산 세계와 자유세계 간 세계적 대결의 시작이라는 것, 따라서 미국은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유엔과 함께 참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 등을 믿었소. 그런데 한국전쟁 수주일 후 나는 한국전쟁의 중국 확전방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인도 네루 수상과의 인터뷰를 위해 미국을 떠난 이후 1951년 6월까지 1년 가까이 프랑스 파리에 머물면서 이 전쟁에 대한 제삼자적, 객관적 시각을 갖게 됐소. 또 유고 대통령 티토는 미 의원단과의 면담(맥아더 인천상륙 직후인 9월 21일)에서 유엔군은 38선에서 북진을 멈추고 평화적 해결을 추구할 것을 권고했다는 서유럽 언론들의 보도, 그리고 사르트르, 카뮈 등 프랑스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전쟁에 대한 세계의 시각이 미국 정부의 그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오.
▲1950년 인천상륙작전 직후 더글라스 맥아더
당시 내가 미국으로 곧바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1950년 2월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가 시작한 빨갱이 사냥(매카시즘)에 넌덜머리가 났기 때문이라오. 사회주의자를 자처해 왔던 나로서는 당시 미국에 몰아친 반공의 광기를 참으로 견디기가 어려웠소. 어쩌면 당시 매카시즘이 일으킨 반공 광기가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냉철한 대응을 가로막았는지도 모르겠소. 미 국무부 내 빨갱이 외교관들의 농간으로 중국을 잃었다(중국의 공산화)’는 매카시의 주장이 엄청난 호응을 받았던 당시 미국 내 정치 분위기에서 중국 공산정권의 실체를 인정한다는(국가로 승인하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받아들인다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소. 게다가 대만 국민당 정권의 저 유명한 ‘차이나 로비’로 야당인 공화당과 군부에서는 공산 중국의 존재 부정을 넘어 무력으로라도 대륙을 수복해야 한다는 여론이 매우 강했소.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터졌던 것이오. 다시 말해 한국전쟁은 시작부터 한반도만의 내전으로 한정될 수 없는 전쟁이었소. 남북한을 넘어 대륙의 공산 중국과 대만 국민당정권,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과 군부, 그리고 소련까지 얽혀있어 경우에 따라서는 3차 대전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는 매우 복잡한 전쟁이었소. 돌이켜보면 한반도는 일본 점령지역이기 때문에 전승국인 미국의 관할 하에 들어가야 했지만, 카이로선언에서 적당한 때 독립시킨다고 했기에 중국 지배권을 청일전쟁 이전으로 되돌린다는 대원칙의 예외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뒤늦게 참전한 소련을 의식해서 미·소 분할점령으로 낙착된 것이오. 그 후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신탁통치기간을 거치기로 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각각 친소, 친미 정권을 탄생시킨 체 미·소 양군이 철수함으로서 분쟁지역화 되고 말았으니, 한국전쟁 이전부터 이미 남북 간의 전쟁은 시작된 셈이지요.
▲1945년 12월, 모스크바 미·영·소 3상회의
내가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연상한 것은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을 가능성을 함유함이요, 또 전쟁 발발 약 6개월 전에 한국 대통령이 동경의 맥아더를 만난 후 그간 수시로 남침 위협을 거론하며 군사원조를 읍소했던 작태를 멈췄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는 생각에서였소. 또 오히려 그 3개월 전에는 한국 해군사령부가 있는 진해에서 한국 대통령과 대만의 장 총통이 북한 응징을 결의한 바 있음도, 또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군이 대만에 상륙한 사실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소. 어쨌든 나는 파리에 머무는 동안 책의 초고를 거의 완성했고, 귀국 후 미국과 영국의 출판사들에 출판을 타진했으나 모두 퇴짜를 맞았소, 내용은 흥미진진하지만 정치적으로 너무나 민감하다는 이유를 대더군. 그러다가 사회주의 잡지 <먼슬리 리뷰>(1949년 출범)의 발행인이자 뛰어난 경제학자인 폴 스위지와 레오 후버만을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만나면서 이들에 의해 1952년 봄 책이 나오게 된 것이오. ‘비사’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일반인이 알 수 없는 집권고위층의 은밀한 비밀을 폭로한 책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전혀 그렇지 않소. 그런 비밀스런 얘기는 이 책 안에 전혀 없소. 내가 이 책에서 인용한 자료들은 미국 정부와 유엔의 공식 발표, 그리고 <뉴욕타임스> 등 미국과 영국 언론들의 보도가 전부요. 이 책을 쓰면서 나는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정면 반박하는 나의 이의 제기가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공식 자료에 의존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그대로 실천했소. 기자로서 나의 좌우명은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All Governments Lie)”는 것이요. 어떤 정부든, 아무 근거가 없는 새빨간 거짓말이 아니라 강조·생략· 왜곡 등의 세련된 수법을 통해 진실의 전모를 감추며 정부의 입장을 정당화하려 한다는 것이요. 기자의 사명은 정부 발표에 대한 비판적 독해를 통해 이러한 정부의 거짓말에 감춰진 진실(Hidden Truth)을 밝혀내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소. 나는 이 책을 통해 미국 정부의 거짓말로 인해 대중들의 시야에는 보이지 않았던 한국전쟁의 숨겨진 역사(Hidden History)를 꽤 드러냈다고 자부하오.

과연 기습 남침이었나?

▲이지 스톤의 <한국전쟁 비사> 
나의 첫 번째 의문은 ‘과연 미국은 북한의 남침을 예상하지 못했나’라는 것이었소. 나의 판단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소. 판단의 근거는 다음과 같소. 첫째, 6·25 발발 직후 당시 중앙정보국(CIA) 국장이던 로스코 힐렌코터 제독은 기자들에게 미 정보당국은 “이번 주나 다음 주, 코리아에 남침의 징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는 점이오. 이에 앞서 한 국방부 관리가 “개인적 의견임을 전제로 미국은 남침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는 언론 보도도 있었소. 둘째, 6·25 약 1년 후인 1951년 6월 5일, 상원 예산위원회 청문회에서 국무부의 존 히커슨 유엔담당차관보의 증언. 그는 북한의 남침에 대한 사전 경고가 있었고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이 논의됐으며, 이에 따라 국무부는 북한의 남침 시 유엔에 보고할 “문서 초안”을 미리 작성해 놓았다고 말했소이다. 셋째, 맥아더 극동사령부의 정보 담당 찰스 윌로비 소장의 발언. 맥아더의 최측근인 윌로비는 1951년 12월 잡지 <코스모폴리탄>에 “코리아의 진실” 기고를 통해 극동사령부가 대북 정보팀을 운용했고, 남침 3개월 전부터 북한 군비 증강을 명백히 파악했으며, 나아가 “6·25 수주일 전부터 남한 군대 전체가 북한의 공격에 대비”했다고 밝힌 것이오. 이와 관련 애치슨 국무장관은 1951년 6월 맥아더 청문회에 “북한 인민군이 1950년 6월 남침할 것이라는 보고”라는, 1950년 3월 10일자 극동사령부 전문을 제출했소이다. 1951년 5월, 자신의 해임에 관한 의회 청문회에서 맥아더는, 코리아는 자신의 책임 지역이 아니며 코리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따라서 북한의 남침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다고 주장했소. 그러나 이는 정직한 발언이 아니었던 셈이오.

한국전쟁 발발의 득실

결국 미국은 북한의 남침을 예견하고도 엄중한 경고를 통해 이를 사전 방지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부추겼다는 것이 나의 추론이오. 그 이유는 한반도의 전쟁이 미국과 대만, 남한 등 반공 동맹세력에 매우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소. 당시는 대만의 국민당 정부를 내치고 대륙의 공산당 정부를 유엔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라는 국제적 압력이 거셌던 때였소. 영국은 이미 1950년 1월 대륙 정부를 승인했고, 프랑스·이집트 등은 대륙 정부의 유엔 가입을 위한 표결을 추진했으며, 애치슨 국무장관은 표결 결과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소. 대만은 대륙 정부의 정벌 위협에 직면해 있었고, 남한의 이승만은 5·30 총선에서 참패했고, 일본에서는 6월 4일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 등 진보평화세력이 약진했소. 일본의 진보세력은 미군 점령을 끝내기 위해 중국과 소련 등 아시아 모든 국가와의 평화조약을 원한 반면, 집권 보수세력은 미국과의 단독 강화를 추진했소. 단독 강화의 대가는 일본의 미군 기지화였지. 한국전쟁은 이 모든 것을 일거에 바꾸어 놓았소. 미국은 6·25 이틀 후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해 국민당정부 보호에 나섬으로써 이전의 대만 포기 방침을 철회했소. 또한 일본과의 단독 강화를 통해 일본을 사실상 미국의 영구적 군사기지로 이용할 수 있게 됐고. 5·30 총선 참패로 국내 정치적 위기에 몰렸던 이승만은 미국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면서 기사회생했소. 반면 공산 중국의 대만 정벌은 불가능해졌고 유엔 가입도 물 건너갔소. 오히려 중국은 이후 한국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유엔으로부터 ‘침략자’라는 오명을 들어야 했소. 소련은 연해주에 가까운 일본에 미군 기지가 상시 유지되는 군사적 위협을 감수해야 했고. 궁금한 것은 그 때 러시아는 어디 있었느냐였소. 지금에야 모든 관련 문서가 공개돼 6·25가 북한의 계획된 남침이란 사실이 드러났다고 하지만, 러시아에는 또 다른 문서가 있다고도 하니 러시아가 중공정권 수립 후 미국이 열전지역으로 극동을 지목하고 있음을 몰랐을 리가 없지 않은가. 위에 인용된 여러 자료로 볼 때 당시의 미국 사정을 러시아가 몰랐다고 할 수 있을까. 김일성이 남침의사를 꺼냈을 때 미국 참전을 경고했다거나 주은래가 참전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스탈린은 공군 지원불가를 밝혔다는 얘기와 함께 러시아의 꼼수를 읽기는 매우 어려운 바가 있소이다. 주소 미 대사 해리만은 장문전보에서 전후 미 ·소 간의 냉전 상태가 치열하게 전개될 것에 대비해야 한다면서 대폭적인 군비 강화를 건의했고, 러시아가 베를린을 봉쇄하자 처칠은 철의 장막을 쳐서 곳곳에서 러시아 팽창을 응징하기 위한 전력 강화가 절실하다고 선언하기에 이른 점을 감안하면, 대전은 피하더라도 군데군데서 열전을 벌리려는 서방의 전략을 러시아가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오히려 유럽에서의 대소 압력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의 극동침략을 바랬을 수도 있지 않은가. 생각이 이에 이르면 북한의 남침은 러시아의 또 다른 꼼수였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당시 공화당 덜레스의 행보에 주목했소. 덜레스는 1947년 남한 단독선거를 성사시킨 인물이오. 말하자면 신생 대한민국의 산파역인 셈이지. 덜레스는 공화당 거물인 동시에 열혈 반공투사요. 그런 인물을 트루먼이 유엔대사에 앉힌 것은 1946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면서 거세진 빨갱이 공포를 피해가려는 고육지책이었소. 그 덜레스가 1950년 6·25 직전 남한을 방문해 국회 연설에 이어 38선을 직접 시찰했고, 발발 직후에는 일본에서 맥아더,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 그리고 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과 4자회담을 가졌소. 물론 회담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 그러나 당시의 교통사정을 감안할 때 미 군부 실세 모두와 공화당의 핵심 주전파 인물이 극동의 한 구석에서 모여 모종의 논의를 했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라 할 수 있지. 과연 이들은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참으로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소.

평화의 논리, 전쟁의 논리

이쯤에서 당시 미국의 세계 전략을 둘러싼 미국 내 논쟁을 살펴봐야 할 것 같소. 간단히 말해 평화의 논리 대 전쟁의 논리 간의 대결이오. 당시 거물 칼럼니스트인 월터 리프먼은 덜레스의 극동방문에 맞춰 6월 15, 17, 20일 세 차례 칼럼을 통해 평화의 논리를 설파했소. 리프먼은 조기 평화조약체결과 미군점령 종식, 특히 ‘일본의 중립화’를 주장했소. 미국이 일본을 지킬 최선의 방법은 일본을 중립화하되 소련 등 외부의 침략을 받을 경우 미국의 군사 개입을 약속하라는 것, 만일 이런 조치를 한다면 소련은 미국의 군사적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였지. 리프먼은 ‘일본 중립화와 미국의 군사보호 보장’이 극동에서 미국과 소련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이며, 이 방안을 독일에도 적용하면(독일 중립화와 점령 외국군 철수) 서유럽에도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주장했소. 그러나 이러한 리프먼의 주장은 미국 정치경제의 지배세력에게는 백면서생의 순진하고도 위험천만한 논리일 뿐이었소. 왜 그런가. ‘일본과 독일을 중립화하고 자유롭게 풀어준다면, 두 나라의 자연스러운 무역 상대는 각각 공산 중국과 동유럽이 될 것이며, 이로써 서유럽과 일본은 미국의 세력권과 경제권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공산 중국과 동유럽의 전후 복구와 산업화를 도와 사회주의의 창조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자본주의적 착취의 대상인 자원과 노동력의 원천을 없애는 ’꼴’이라는 게 이들의 논리였소. 서유럽과 일본을 미국의 핵심 동맹으로 묶어두기 위해서 ‘평화’는 반드시 피해야 할 치명적 위험이었던 셈이지. 그런데 당시에는 몰랐지만, 트루먼 행정부는 이미 이 ‘평화라는 위험’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더군. 1950년 4월에 작성된 NSC-68(국가안전보장회의 문서 68)이라는 극비문서였소. 1949년 10월 중국의 공산화와 이에 앞선 소련의 핵실험 성공으로 미국의 전략적 우위가 무너지자 트루먼은 1950년 1월 수소폭탄 개발을 결정한 후 4월 극비 계획을 마련했소. 핵무기를 비롯한 대대적 군비 증강으로 소련을 견제하고 서유럽과 일본을 미국 세력권에 묶어 둬야 한다고 했소. 이른바 ‘이중 봉쇄’ 전략이었지. 문제는 재원 마련, 당시 미국의 연간 국방비가 130억 달러 규모였는데 대대적 군비 증강을 위해서는 3~4배가 필요했소. 미국에 대한 아무런 군사적 위협이 없는 상황에서 일거에 국방비를 4배 올리는 것은 한마디로 ‘미션 임파서블’이었지. 그런데 약 2개월 후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니 이야말로 짜고 치는 노름 아니겠는가.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의 남침을 소련 군사력에 의한 세계 정복의 시작으로 규정하면서 대대적 군비증강에 나섰고, 6·25 이후 2년간 미국의 군수물자 생산은 자그마치 7배로 늘었다고 하오. NSC-68이 일반에 알려진 것은 1975년이오. 이때 비로소 기밀해제 됐거든. 그 내용을 알고 나니 트루먼 행정부가 왜 전쟁 발발 불과 이틀 만에 참전을 결정했는지, 휴전 협상을 그토록 오래 끌었는지 확실히 이해할 수가 있었지. 트루먼 행정부의 목표는 전 세계에 걸쳐 군사적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었지. 그래야 미국의 군비 증강과 우방국과의 군사동맹 결성이 가능했으니까. 애치슨이 한국전쟁에 대해 “코리아가 나타나…우리를 구했다(Korea came along…save us)"라고 말한 이유도 알겠더군. 결국 한국전쟁 발발로 미국에서 평화의 논리는 결정적으로 힘을 잃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사실 한국전쟁을 전후해 미국 군부와 반공 보수세력 사이에는 소련과의 예방전쟁(preventive war) 주장이 팽배해 있었소. 예컨대 상원 외교위원장 톰 코널리 상원의원은 1950년 5월 초 <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내 일각에서는 소련과의 전쟁에 대한 기대, 즉 불의의 사건이 소련과의 전면전으로 확대되기를 은연중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면서 이들 전쟁 세력은 “어차피 한판 붙을 건데, 지금 붙는 건 어때?”라고 여기고 있다고 경고했소. 또 6·25 두 달 후인 8월 25일 프랜시스 매튜스 해군장관은 소련과의 예방 전쟁을 옹호하며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거듭 태어나야 하며” “사상 처음으로 평화를 위한 침략자가 되자”고 주장했소. 그의 발언은 큰 물의를 빚었음에도 개인적 의견으로 축소됐고 장관직을 유지했소이다. 9월 1일에는 오빌 앤더슨 공군 소장이 공군대학 학장직을 정직 당했지. 그는 장교들에게 예방전쟁론을 강의한 데다 언론 인터뷰를 통해 “명령만 내려진다면 소련의 다섯 개 원폭기지를 일주일 내 쓸어버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하늘나라에 가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면 문명을 구했노라고 설명 드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했소. 결국 트루먼 대통령은 군부의 들끓는 예방전쟁론을 잠재우기 위해 주전파인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을 경질하고, 신중한 성격의 조지 마셜 장군을 기용할 수밖에 없었소.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현실화된 예방 전쟁의 씨앗은 이미 한국전쟁 당시에 뿌려진 것이외다.

전쟁 확대를 원한 맥아더, 평화를 두려워 한 트루먼

공산 중국과의 전쟁 확대를 집요하게 추구했던 현지 사령관 맥아더와 한반도내의 제한 전쟁을 고수했던 트루먼 행정부의 갈등이 결국 맥아더의 해임을 불러온 과정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기에 긴 설명은 하지 않겠소. 맥아더는 1950년 7월 29일 대만을 전격 방문해 장제스 총통과 회담한 뒤 국민당 군대의 참전을 촉구한 데 이어, 8월 26일에는 ‘해외참전 용사회’에 서한을 보내 대만과 힘을 합쳐 아시아의 공산세력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소. 특히 10월 8일에는 소련 영내 100킬로미터에 있는 공군기지 공습이라는 위험천만한 무력 도발을 계획했소. 서방 특히 영국 수상 애틀리가 맥아더의 확전을 막기 위해 대미 압력을 강화하는 가운데 10월 15일 트루먼 대통령이 서태평양의 웨이크 섬으로 날아가 맥아더와 단독 회동을 한 것은 전쟁 확대를 막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고 할 수 있소. 결국 맥아더는 국민당 군대와 함께 중국 대륙에 제2전선을 열자는 내용의 편지를 공화당 원내대표 조셉 마틴 의원에게 보낸 사실이 밝혀지면서 4월 11일 전격 해임됐소. 야당과의 군사전략 논의는 군 통수권자인 트루먼 대통령으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항명이었기 때문이오. 트루먼은 중국으로의 확전은 피했으나 한반도의 평화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소. 대대적 군비 증강을 통한 대 소련 견제 및 서방 세계의 결속이라는 미국의 대외정책을 위해선 세계적 긴장과 군사적 대치 상태가 필요했기 때문이오. 한국전쟁이 장기화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소.

한국전쟁이 3년이나 계속된 이유는?

사실 이 무렵 한국전쟁의 전선은 38선 부근으로 고착됐고, 어느 일방의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났소. 한반도 내의 제한전은 더 이상 군사적 의미가 없었다는 뜻이오. 맥아더가 해임되던 날, 트루먼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한반도 평화협상의 조건을 제시했소. 한반도의 군사적 문제에 대해서만 협상할 것이며, 한반도 분단의 정치적 해결 방안이나 대만 문제, 중공의 유엔 가입 등은 협상 대상이 아니라고 못 박았소. 그로부터 두 달 여가 지난 6월 23일, 소련은 이러한 미국 측 조건을 받아들여 휴전협상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소. 공산 중국과 북한이 요구했던 세 가지조건, 즉 한반도 내 모든 외국군의 철수, 대만의 중공 복속, 중공의 유엔 가입은 협상 의제에서 제외된 것이오. 만일 이때 교전을 중단하고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면 이후 2년간의 무의미한 살육을 피했을지도 모르오. 1차 대전 당시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를 기해 모든 전투행위를 중단하고, 이후 수개월에 걸쳐 베르사유에서 평화회담을 진행했듯이. 그러나 미국은 교전 중단에 동의하지 않았고 전투는 계속됐소. 미국은 이른 평화의 도래를 원치 않았던 것 같소. 만일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오면, 1. 대만을 지키기가 어려워지고 2. 중공의 유엔 가입을 막기 어려우며 3. 일본과의 단독 강화와 주일 미군기지 확보가 어려워지고 4. 국내외적으로 재군비(군비 증강)의 속도를 유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 아니겠소.
▲1차세계대전 베르사유평화회담, 2차세계대전을 낳은 이유

샌프란시스코 ‘평화’ 협정과 동아시아의 ‘불화’

이러한 미국의 속내는 샌프란시스코 평화 협상(1951년 9월 4-7일)을 20일쯤 앞둔 8월 13일 소련이 협상 참여를 발표했을 때 분명히 드러났소. 이 발표로 미 국무부는 한때 패닉 상태에 빠졌다고 하오. 평화협상 전 코리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된다면 중공의 대외 이미지가 개선되고, 어쩌면 유엔 가입을 위한 표결이 성사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지. 당시 <월스트리트저널>이 “국무부는 평화협정이 끝나기 전 휴전 협상이 완료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보도할 정도였지. 미국은 8월 20일 판문점 부근의 무력 사태를 이유로 8월 23일부터 10월 25일까지 휴전협상을 중단시켰고, 결국 소련은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상에 불참했소. 동아시아 평화의 당사자인 중국(대륙, 대만)과 남북한은 참여하지 못한 채 일본의 전쟁 책임은 묻지도 않고 단독 강화가 성사됐던 것이오. 한국전쟁이 끝나고 동아시아에 평화가 정착됐다면 공산 중국과 일본의 화해를 막기 어려웠고, 미국의 우방들이 일본의 재무장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오. 한국전쟁이 계속되고 공산 중국이 이 전쟁에 참여하는 한, 미국은 언제나 이 지역 이해 당사자들 간의 진정한 평화협상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있었고, 미 군부는 전쟁 수행과 일본 보호를 위해 일본에 미군 기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오.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정의 핵심은 일본을 아시아의 공산 세력을 겨냥한 미군의 전진기지로 만드는 것이었소. 실제로 일본은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위한 발진 기지였잖소. 따라서 명칭은 ‘평화’ 협정이었지만 실상은 ‘전쟁을 위한 협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소. 협상을 주도한 덜레스는 “화해의 평화”라고 자화자찬했지만, 실상은 일본 침략의 희생자인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게 일본 군사주의의 부활과 화해하라는 억지에 불과했소.
▲대일강화조약-대일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1951년 9월8일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를 위해 맺은 평화조약
특히 얄타협정 당시 소련에 약속했던 남사할린과 쿠릴열도(1904년 러·일전쟁 으로 일본에 빼앗겼음) 반환을 부정함으로써 일본과 소련 간의 평화 회복을 저지하고 영토 분쟁의 씨앗을 심어놓았소. 독도가 한·일 간 분쟁 사항이 된 것도 이 협정 때문이고. 또한 미국은 일본 요시다 정부에 대해 대만 정부 승인을 강요함으로써 일본과 중국의 적대 관계를 완성시켰소이다. 결국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미국의 주일 기지와 확보와 함께 영토 분쟁을 조장해 동아시아 각국의 화해를 가로막음으로써 미국의 군사력으로 이 지역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려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소.

미 군사주의에 의한 세계 지배를 정당화시켜준 한국전쟁

즉 한국전쟁은 일본을 미국 대외정책의 포로로 만든 것이오. 역으로 한반도의 평화는 미·일 간의 (군사적) 유대를 완화시킬 터요. 서유럽도 마찬가지요.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프랑스가 백년 숙적 독일의 재무장을 받아들일 수 있었겠소? 1951년 11월 아이젠하워 장군이 나토 회원국들의 조속한 재무장을 촉구했을 당시 <월스트리트저널>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소. “한반도의 평화, 또는 평화 협상만으로도 미국과 유럽 국민들의 군비증강에 대한 열의를 감소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만일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된다면 유럽 방위의 책임을 진 미국의 위상은 한층 어려워질 것이고 더 많은 경제적 부담을 떠안게 될 것이다.”(WSJ, 51. 11. 27) 2차 대전 이후 미국 정치, 경제, 군사적 사고의 지배적 흐름은 ‘평화에 대한 공포’라고 할 수 있소.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스 등이 지적했듯이 미국의 파워 엘리트들은 ‘영구 전쟁(permanent war)’이라는 정신 상태 속에 살고 있는 것이지. 영구 전쟁을 축복으로 여기면서. 예컨대 주한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는 1952년 1월 남한을 방문한 필리핀 대표단에게 “코리아는 축복이었다. 이곳이나 또는 세계 어딘가에 또 다른 코리아가 있어야만 한다”고 말했다고 하오. 한국전쟁은 미 군사주의에 의한 세계 지배를 가능케 하고 정당화시켜준 전쟁이라고 할 수 있소. 그런 의미에서 한국전쟁은 2차 대전 후 미국의 대외전략과 세계의 판도를 결정지은 그야말로 세계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겠소. 이러한 사정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소.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베트남전쟁 패배 이후 1970년대 초 닉슨-키신저가 시도한 데탕트(소련, 중국과의 화해)가 지속됐더라면 미국의 군사주의는 완화되고 지금의 세계는 훨씬 평화롭고 안정되었을지도 모르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반격으로 데탕트는 좌초됐고 미·소 군비경쟁이 재개됐으며, 그 결과 소련이 붕괴하고 냉전이 종식됐소. 아마도 미 군사주의가 거둔 최대의 승리라 할 수 있겠지. 자본주의의 대안을 말살시키면서(TINA : There is no alternative)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을 정도로. 그러나 의기양양 했던 1990년대가 지나고 2001년 9·11테러를 계기로 미국이 중동에서 벌인 예방전쟁으로 미 군사력의 한계가 명명백백히 드러났고, 2008년 금융위기는 ‘돈 놓고 돈 먹기’에 골몰해온 미국 경제의 허약한 실상을 보여주었으며, 2016년 정치 신인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과 2021년 1월 우익 폭도의 의회 난입은 미국 민주주의의 타락상을 여실히 보여주었소. 이 모두의 근본 원인은 과도한 군사주의, 즉 한국전쟁 이후 미국이 추구해온 대외군사 개입의 결과라 할 수 있소.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해 8월, 41여 년에 걸친 대중동 군사 개입을 마감했소. 하지만 미국은 2018년부터 중국과의 군사적 대결 자세를 강화하고 있소. 마치 군사적 수단으로 중국의 굴기를 저지할 수 있다는 듯이. 만일 미국 정부가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비현실적 기대라고 나는 생각하오. 우선 미국과 중국 간의 경제적 유대 관계가 너무도 긴밀한 데다 현대 무기의 가공할 파괴력을 감안하면 미·중 전쟁의 승자는 있을 수 없으며, 인류의 공멸을 불러올 뿐이오. 즉 현대 강대국 간의 관계는 협력을 통한 상생 아니면 전쟁에 의한 공멸일 뿐이지, 어느 일방의 승리란 있을 수 없소. 히로시마의 참상을 목격한 핵과학자들이 1946년 핵무기 개발을 후회하며 그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펴낸 책의 제목이 <함께 살든가 아니면 모두 죽든가(One World or None)>라는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소. 일각에서는 사이버 공격으로 적의 지휘체계를 무력화시키거나 통신망을 마비시키는 방식 등으로 인명 손실을 최소화한 첨단 제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는 발상을 내놓는 모양인데 다 부질없는 소리요. 전쟁은 일단 시작되면 일정 수준으로 제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오. 인간은 합리적 존재가 아니거든. 다만 한반도 남북의 코리언들에게 해드리고 싶은 말은 여러분 스스로의 힘으로 평화를 이루라는 것이오. 1950년의 비극은, 과정이야 어찌 됐든 바로 여러분의 행동에서 시작된 것 아니겠소. ‘민족 통일’이라는 숭고한 목표를 위해 시작한 군사행동이 강대국들의 세계 지배를 위한 거대한 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코리언들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서로 죽고 죽이기만을 계속한 것 아니오. 물론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남북, 북미 화해의 걸림돌이 되고 있긴 하지만 결코 극복 못할 장애물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3년에 걸친 한국전쟁의 교훈은 전쟁은 막대한 희생만 초래할 뿐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소. 한 민족 내부의 화해는 결코 외부의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잖소. 결국 함께 살든가, 모두 죽는 길 밖에 없는 것 아니겠소. 또한 한반도의 내전이 미국과 중국의 국제전을 초래했다는 사실에서 역으로 한반도 내부의 평화가 한반도 외부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교훈도 도출할 수 있겠소. 한반도 평화가 곧 동아시아 평화, 나아가 세계 평화의 출발일 수 있다는 얘기요. 70여 년에 걸친 오랜 전쟁에서 얻은 귀중한 교훈을 바탕으로 한반도 평화를 이뤄내길 간절히 기원하며 넋두리를 마쳐야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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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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