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학회(대표 한동우)의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의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는 김구, 조봉암 등 선열들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직시하며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겨레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독백 형식의 글이다. 모든 글은 선열들이 남긴 기록들, 행적들, 역사적 사실들 등을 토대로 하여 필자의 의견을 가미했다.
네이버 블로그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에는 2020년 7월 이후의 모든 연재 글(25편)을 볼 수 있다.(☞ )
늘 듣는 얘기는 우리 집이 양반 집이란 것, 양반의 자식이란 것, 그러니 부모 말 잘 들으란 얘기겠지. 양반이 무언지도 모르고 그저 아부지 엄니보다 더 센 분, 더 어려운 분, 아니 더 높은 분으로 마음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차차 그 분이 문정공, 아주 공자 같은 분으로, 커서는 내가 그 할아버지의 17세 손으로, 또 기록을 보고는 왕이 꿈에 그리던 성인을 본 듯하다 했고, 집현전 동료들까지 걸으면서도 수천 권 장서를 외우고 다녔다고 외경했음을 알았다. 사당(당집)이 동내에 있었기에 그 자손인 우리는 대대로 이 동내에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커가면서 들으니 멀리서 일가가 말 타고 찾아와 제를 올린다기에 무심했던 사이 그가 위패를 훔쳐갔다고 했다. 공신 자손들에게 벼슬을 준다고 해서 그랬다고 했다. 집안에서는 상종 못할 것들이라고 해서 제례를 바꿨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색당쟁 때도 파가 갈리면 홍동백서를 어동육서나 조동율서로 하는 등 해서 인연을 끊었다고 했다. 벼슬이 뭔지도 모르고 일가들이 상부상조하며 사서삼경에 나와 있는 대로 또 집안대대로 내려오는 어른들의 가르침대로 살아온 서평 한가였다. 집안에 독선생을 앉히거나 아니면 집안 어른들이 나서서 자녀들에게 글을 가르쳤지만, 벼슬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 노릇을 제대로 시키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자리란 도인이 되는 길이었고, 벼슬이 더 윗자리라면 더 큰 도인일 것이었다. 말을 타고 와서 몰래 위패를 가져가는 것은 벼슬일 수 없었다. 차츰 먼 데 사는 일가들이 높은 벼슬을 했고, 지금도 벼슬을 하려고 기를 쓴다는 건 좋게 보이질 않았다. 우리가 어려서 읽는 소학에도 수신제가가 치국평천하의 근본이라 하지 않았는가. 또 벼슬이라 해도 최대 국난이었다는 임란 때 왕을 따라간 고관과 대소궁인 90명이 공신에 책봉된 반면, 무공을 세운 장병들은 겨우 20명에 불과했다니, 또 우리 종친 중에 벼슬을 멀리하고 대학자가 된 구암 선생이나 남당 선생을 알게 된 것은 먼 훗날의 얘기였다. 집안 어른들이 고양 일산으로 시제를 지내러 다니셨기에 먼 조상 산소가 거기에 있는 줄 알았고, 남양만(南陽灣)에 많은 개펄은 나라에서 공신전으로 만들었기에 이를 받은 선비들이 내려와 마을이 되었다니 우리도 그 중 하나로 여겼다. 더욱이 부자가 공신이었던 문정공과 장남 공간공 모두 장례비가 없어 왕실에서 대줬다고 했으며, 특히 문정공은 어름과 소태로 허길 달랬다 할(大東奇文) 정도였으니 그 종손들이 한양에 발붙이기는 매우 어려울 것으로 짐작된다. 태조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의 800명 가까운 인물시사를 소개하는 가운데 유일한 청백리 문정공이 형 문양공의 후의도 한사코 거절해서, 당대의 권신 재종제 상당군이 가족을 모아놓고 의논한 끝에 동대문 밖 고암동 논밭(씨 100말분)을 내놓았으나 서평군(문정공의 예직)이 또 사양해서 그 소출만 보냈다는 기사를 인용하였으니(1928), 이 사실이 뒤늦게 집안에 알려진 셈이다. 나중에 들으니 또 그 소출도 지방민에게 나눠줘 고암동은 안암동이 되었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집안의 일상은 늘 낮에 일하고 밤에 글 읽는 데도 바쁘기만 했다. 내가 태어나고 한 달 여 만에 별세하신 할아버님도 동내에서 뿐 아니라 가근방 여러 곳에 훈장을 하시면서 자(字) 성행(聖行)대로 수양에 전념하셨기에 학행저세(學行著世-학행이 뛰어나) 사림모해(士林模楷-선비들의 모범)로 칭송받으셨지만 벼슬에는 관심이 없으셨고, 아버님은 숫제 호를 경독재(耕讀齋-일하고 글 읽는 집)로 하셨으니 가히 수도(修道)가 가훈의 전부라 할만 했다. 그런 가문이 내가 나던 해 경술합방을 맞이했으니 그 격변의 세월을 감당하기 얼마나 어려우셨겠는가 짐작이 갔다. 겨우 열 살에 이웃마을 두렁바위(堤岩)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들을 엿들을수록 별 말씀이 없으신 집안 어른들의 얼굴이 좁은 가슴 속으로 주름져 들어옴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부는 여전히 공부였다. 그런데 내가 열네 살 장가들어 아들딸을 둘 때까지 사서삼경이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오랑캐 글이라고 벼르시던 학교를 가라시지 않는가. 40대 중반까지 수원·안양·오산 등지에서 훈장을 하시던 할아버지셨기에 개항 개화를 몸소 느끼실 수 있으셨고, 아버지 열 살쯤에 전기·석유·성냥이 보급되기 시작했으니 대처 같았으면 벌써 농사나 글방 가지고는 안 되겠다 할 법도 했으나 할아버지는 여전히 천리(天理)를 따르셨고, 아버지도 그 용천인지(用天因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려하지 않으셨는데 몇 해 전부터 역학 선학 명학을 파고 드시더니 아버지의 도통하신 결론이 신학문이란 말씀 아닌가. 내가 소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이어 멀리 떨어진 보통학교로 유학을 가 또 수석 졸업을 했으니, 제 나이에 입학한 급우들과는 거의 6~7년 차이가 나는데다 할아버지의 덕행이 자자해서인지 나를 따르고 알아보는 선후배가 줄줄이 이어지며 기대도 컸었으나 나는 상급학교를 쳐다보지도 않고 학교에 갈 수 없는 아희들을 위해 강습소를 개설했다. 더 공부해야 왜놈 종노릇만 하게 된다는 아버지의 소신을 알고 있기에 또 마침 신간회가 나서서 적극 장려했기 때문이었다. 한 가는 기자(文聖王)의 후예였기에 교명을 문성학원이라 했다. 교과목에 일어 대신 조선어를 국어로 하고 운동회 때 만국기에 태극기를 달았다. 사랑채 마루에서 춘향전을 공연하기도 했다. 처음 면에서 와서 곤란하다하더니 다음으로 순사가 와서 교과목에 일어를 국어로 하라 한다. 이 벽촌까지 일제의 압박이 밀려옴을 느끼니 문을 닫아야 했다. 때에 어머니가 중병에 드시니 의원을 구하러 다니면서 아버지의 방악합편과 동의보감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문정공이 의서 발간에 큰 공을 세웠다 했으며, 왕이 병이 나자 입시케 하고 세자를 부탁하니 문정공이 황송해하며 스스로 약을 지어 바쳐 왕의 병을 낳게 하였다고 비문(신도비)에 적혀 있으니, 집안 어른들의 의약 관심이 높았던 것을 짐작키 어렵지 않았다. 아버지가 왜놈과 부딪치지 않을 전문직을 바라셨기에 독학으로 의원이 될 수 있는 평양 의학강습소(箕城)에 등록하였으나 스물을 훌쩍 넘은 나이에 무리였다. 집에 돌아와 약사(藥種商)시험을 준비했다. 2년 만에 읍내에 약국을 개설한다. 어머니 병환 때문에 알게 된 병원에서 반년 간 조수로 일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정식병원이 없는 데서 약국 지성당(至誠堂)은 약국이요 병원이었다. 많은 친지들과 환자들이 찾아주었다. 8년 만에 살림집을 겸해 약국을 확장했다. 지서(人民警察)에서 자꾸 소방대장을 맡으라 한다. 여러모로 거절키 어려웠다. 전쟁(태평양)이 터지니 소방대를 경방단(警防團)으로 바꾸어 경찰 보조를 시켰다. 또 안할 수 없었다. 후배들이 보국대(노무대)나 징병을 피하려고 몰려들었다. 이들을 훈련시키며 경찰들과 자주 만나야 했고 의견 충돌도 가끔 있었다. 특히 일인 지서장은 사석에서 걸핏하면 조센징(朝鮮人)이었다. 나는 반발하고 대들기도 했다. 경찰과 싸웠다는 얘기가 자자해지니 집안에서 말리기도 했다. 소문을 들은 얘들도 불안해했다. 나라를 빼앗긴 걸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열 살 난 아들이 금방 내려온 도라꾸(트럭) 운전수에게 들었다며 일본이 고상(항복)했다는 것 아닌가. 몇 달 전만 해도 사이판이 함락되었을 때 일본 순사에게 안타깝다는 위로를 보내던 읍민들이었다. 애는 무심코 한 소식이지만 약국에 있던 손님들은 모두 그럴 리가 없다고 의아해 했다. 방학이 되어 내려온 친척 중학생은 무슨 소리, 일본은 "사이고노 이찌닝마데 고상와 나시"(최후 1인까지 항복은 없다)라고 소리친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베이에이게끼메쓰(米英擊滅)"라 소리칠 때도, "도고. 야마모도 겐스이"(일본 전쟁 영웅들)를 자랑할 때도 아무 말 못했었다. 언젠가 아들이 하야시(林) 선생이 아이들을 데리고 들로 나간 자리에서 일본은 곧 망한다고 했다며 수상해 해도 그런 얘기 딴 데 가서 하지 말라 했다. 오늘 또 아들에게 같은 주의를 준다. 주변 옛 관아자리에 옛 세도가 안동김씨가 살았는데, 덴노(일본천황)의 일가(친척)라고 떠드니 난감했다. 보천보 전투에 관해서 얘기한 기네야마(金)선생은 지서에 불려가 곤욕을 치렀는데, 나는 겨우 미국이 일본을 쳐들어왔다는 얘들 얘기를 반대로 하고는 겁을 먹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은 급박했다. 신문을 보는 우리는 끝을 보는 듯했다. 졸업한 지 10년을 넘어 대처에 곧 많이 자리 잡은 후배 제자들이 고향에 들리면 날 자주 찾아왔다. 난 자리를 함께 하며 용돈도 주었다. 다들 독립군 얘기요 임정 얘기였다. 그 끝에 몽양과 민세의 건준이 점점 다가왔다. 지서에서 기별이 와 가보니 짐을 싸고 있었다. 분위기는 침통했으나 우리 아들과 자주 어울리던 그 집 애들은 퍽 반가워했다. 나는 바로 후배들에게 떠밀려서 치안대장이 된다. 모두 경방단원이었다. 면민대회를 열어 해방을 경축했다. 백의민족이 모여 목청껏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 나팔 북을 앞세워 거리 행진도 했다. 대원들이 야밤에 나서서 진쟈(일본 사당)를 불질렀다. 도망간 순사들 집을 들쑤셔 무기를 압수했다. 공출에 앞장섰던 면서기 구장들은 습격을 당했다. 나는 단원들의 호소로 또 친인척의 애원으로 달려가 만류하기도 했다. 학생운동으로 퇴학당한 조카가 시중에서 주정을 하다 잡혀와 내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추석(9·20)을 맞이해서 후배들은 벌써 연극을 준비했다. 뒷동산 작은 벌판에 간드레불이 무대를 밝히자 태극기와 조선인민공화국이 펄럭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미 9월 8일에 미군이 인천으로 상륙했고, 하루 전 38 이남을 미군이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한다는 포고령이 내려졌다는데, 이를 모르고 미군을 환영하러 나간 공화국 간부와 노동자 주민들이 총격을 받았다고 했다. 독립이 항아리 입 같이 그렇게 쉽게 열리겠느냐 한탄하신 아버지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달아났던 순사들이 다시 들어오니 나는 좀 찜찜하기도 했고 허탈하기도 했다. 이어 삼상회의다 신탁통치다 미소공위다 하니 앞날이 어찌 될 것인지 퍽 궁금했다. 김일성이 피리를 불며 서울 밤거리를 날라다닌다고 하더니, 또 여운형한테 질 거라는 소문도 시정에 흘러 다녔다. 경기도 특히 남수원(수원 남쪽)에서는 여운형이요 안재홍이었다. 해가 바뀌니 분단을 막기 위해 뭉쳐야 한다는 민전이 나왔다. 나는 벌써 자천 타천으로 지역 책임자가 되고 있었다. 의장단에 민세가 빠진 것은 좀 섭섭했지만 모두 다 건국준비요 좌우합작으로 여겼다. 그런데 좌우 극한 대립으로 대소 테러와 반테러가 횡횡하고 3·1 기념식조차 따로 하기에 이르더니, 그나마 희망이던 미소공위가 무기한 휴회에 들어가고 정판사사건으로 인하여 공산당이 불법화되니 통일정부는 물 건너갔다고 생각되었다. 마침 이범석 장군이 환국하여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내걸자 청년들의 마음은 많이 거기로 흘러들기 시작했다. 경찰과의 관계도 다소 소원해지고 해서 내년에 있을 한의사 시험 준비에 들어가려는데 후배들이 몰려와 민족청년단을 권하는 것 아닌가. 나는 다시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서에서 좀 보자는 연락이 왔다. 들어가니 바로 1년 전 내가 치안대장으로 앉아있던 자리 아닌가. 젊은이가 잡혀왔는데 얼핏 보니 안면이 있어 보인다. 경찰은 말로만 듣던 힘줄 몽둥이(황소 양물)로 그 청년을 사정없이 내리친다. 비명이 가득 차 왔다. 나는 그 길로 연행되었다. 이유를 물으니 서(경찰서)에 가면 알게 된다는 것이다. 꼭 열흘 만에 귀가 조치된다. 어떤 조사 심문도 없었다. 대질도 없었다. 전국적으로 특히 대구 폭동을 전후해서 각 지방으로 대소 파업과 항의 집회가 번질 때였다. 자연 친일 세력의 재등장과 이를 비호하는 군정에 대한 항의였다. 주동자들은 대체로 자주민족 세력이었으니 쉽게 민전을 내걸었을 것이었다. 중부권으로 번지지 않기 위해 미리 손을 쓴 것이었다. 소위 예비검속이었다. 나는 더 신바람 나서 청년단 조직에 열을 올렸다. 많은 선후배들이 몰려들었다. 민족지상은 얼마나 감미로운가. 내놨던 의학서적들을 다시 집어넣었다. 아주 약국을 준비 사무실로 내놨다. 나는 면 단위 조직을 벗어나 숫제 이 지역 전체를 쌍부(옛 지명)로 묶어 대단위 단부로 만들고 그 단장이 된다. 수원에 중앙훈련소가 개설되자 간부훈련을 적극적으로 주선했다. 이제 모두 짙은 감색단복을 입고 만나면 기립자세로 심장에 손을 댔다. 다들 새사람이 되었다. 마침 추석은 연휴였다 단부 결성 축하공연을 마련했다. 공설운동장에 설치된 무대를 발전기로 환히 밝히고 조명등까지 마련했다. '밝아 오는 고향'이었다. 단기를 앞세운 나는 양쪽에 보좌진을 대동하고 등단하여 개막 연설을 했다. "시대는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요구한다. 민족이 있어야 국가가 있다. 세계 어느 나라든 민족 위에 세워졌다. 민족을 보위하기 위해서다. 민족이 분열되면 피를 흘리게 마련이다. 우리는 오늘 정부를 수립하더라도 내일은 통일로 가야 한다." 그러나 해가 바뀌면서 단독정부 수립이 현실로 다가왔다. 많은 유지들이 단정을 반대했지만 국제 정세를 거스르기는 어려워 보였다. 나는 5·10선거에 참여하기로 마음먹고 선거관리위원장을 맡는다. 그러나 국회에서 이범석 장군이 총리로 지명된다고 했을 때 수락하지 않길 바랐다. 많은 단원들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훈련소 부소장으로 있으면서 만난 백범 선생 비서 장준하 교무처장이 떠났을 때 장군도 단정을 불가피하게 본다고 생각했었다. 여하튼 1948년은 내게 격변의 한 해였다. 4월에 수원군단부를 대표하여 이범석 단장으로부터 조직 공작에 지대한 성과를 올렸다는 표창을 받았으며,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자주독립 국가 수립에 절대한 공헌을 하였다는 감사장을 받았다. 나는 다시 훌훌 털고 봄에 있을 의사시험 준비에 뛰어든다. 다행히 합격되어 이웃집을 마저 사서 병원을 따로 낸다. 그러나 장정 신체검사에 다녀온 단원으로부터 빼지를 뜯겨 짓밟혔다는 보고를 듣고 마음 한 구석이 쓰라려 왔다. 올 것이 오고 있었다. 족청이 해산되고 한청(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된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안 맡을 수가 없었다. 한청단장으로서의 1년은 적색분자 색출이었다. 나는 남로당이나 민청에 가입한 인사들에게 전향을 권유했다. 이미 반공 정부가 선 이상 신분을 유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 있나.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용서를 빌라였다. 보증인이 없는 경우에는 적극 나서기도 했다. 아버지는 어떻게 믿고 그러느냐 야단을 치셨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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