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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들의 마이크, 나의 해방과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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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들의 마이크, 나의 해방과 6·25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 16. 평사(平士)들의 마이크 ②

김구학회(대표 한동우)의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의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는 김구, 조봉암 등 선열들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직시하며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겨레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독백 형식의 글이다. 모든 글은 선열들이 남긴 기록들, 행적들, 역사적 사실들 등을 토대로 하여 필자의 의견을 가미했다.

네이버 블로그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에는 2020년 7월 이후의 모든 연재 글(25편)을 볼 수 있다.(☞ )

1. 나의 해방과 6·25

너무 잘나서 그랬는지 너무 튀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바닥이 좁아서였는지 나는 자주 구설수에 오르내리더니, 6·25에 이르러서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 바빴다. 8·15전에는 경방단장으로, 말은 지방 청년을 모아 소방훈련을 시킨다 했지만, 실상은 초소(해안 공중 침투 감시) 관리에 각종 정보수집이요 공중 침투 섬멸훈련까지 패망을 앞둔 경찰들의 단말마적 몸부림과 궤를 같이하다 해방을 맞이했다. 한편으로는 대처 후배들의 독립 전선과도 은밀히 뜻을 함께 했다. 자연 일제 경찰들의 멸시와 차별을 참지 못하고 받아치는 바람에 뼈대 있는 조선인으로 회자되면서 집안 어른들께는 가스러진 체 그만하라는 꾸지람을 여러 번 듣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인 말단 관리들의 횡포를 참아내던 지방민들이 때를 만나 폭력을 행사하니, 자연 내가 나서서 이를 만류하기 바빴고 야밤에도 급보를 받고 달려가길 여러 번 때로는 함께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자연 일제 경찰이 물러간 지리에 내가 치안대장으로 자리를 잡았고 독립 축하 면민대회와 시가행진까지 벌였다. 일부 과격 청년들은 일본 교당(진쟈)을 불사르고 도망간 조선 순사들 집을 습격 무기를 압수하기도 했다. 이 일로 후일 복귀한 경찰들이 앙심을 먹고 기회 있을 때마다 나를 괴롭혔다. 치안대장 시절 또 시장에서 싸움질하다 붙잡혀 온 취객들을 심하게 다룬 적이 있고, 또 옛 부하들이 얻어맞으면 역성을 들어주기도 했다, 다들 후환을 심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다음은 건국준비위원회였다. 뭐니 뭐니 해도 남수원(남양·오산·평택)은 민세 안재홍이셨다. 추석을 맞아 조선인민공화국 만세가 공연된다. 그리고는 분단 반대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었다. 이번에는 가근 인천의 조봉암 선생. 경찰이 들어오고 면소가 자리 잡자 민전은 슬슬 서리를 맞는다, 군정은 10·1폭동의 확산을 막으려 민족 세력까지 연행한다. 나는 아무런 조사도 없이 10여 일 만에 풀려난다. 다음은 족청이다. 갓 귀국한 이범석 장군의 민족지상 국가지상이 열혈청년을 모았다. 수원에 중앙훈련소가 문을 열자 나는 부소장이 된다. 민족 세력의 확충만이 분단을 막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주 의견을 주고받던 교무과장 장준하가 떠나니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의 앞날이 암담했다. 5·10선거 선거위원장을 맡으면서도 철기장군이 끝내 총리직을 수락하지 않을 것을 기대했다. 도리 없이 ‘오늘은 정부 수립 내일은 남북통일’이었다. 통일 세력이 죽어가는데 어찌 통일이란 말인가. 점점 큰일 났다는 생각이었다. 민족의 앞길이 암담해 왔다. 기어이 족청이 해산되고 모든 청년조직은 대한청년단으로 일원화되었다. 나는 주위의 강권으로 한청단장을 수락한다. 적색분자 색출이었다. 남로당 조선민주청년총동맹(민청) 가입자를 전향시켰다. 반공 정부가 섰으니 더 이상 활동은 불가능하다며 보증인이 돼주기도 했다. 그리고는 보도연맹 고문이었다. 이어서 치러진 5·30선거에서 민세 안재홍, 조소앙 등 많은 민족진영이 당선되어 마음이 든든했다. 통일이 절망만은 아니었다. 아, 그러나 갑자기 남침이라니. 앞날은 어찌 되는가. 며칠 안 되어 보도연맹원들이 출두하면서 인사를 왔다. 고생들 한다고 위로해 보낸 지 하루도 안 되니 내 차례였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어 경찰을 피해 야밤에 도착한 곳은 당선을 도와준 수원 외곽의 김 의원 댁이었다. 마침 동료의원들과 합석한 자리에서 정세토론을 듣는다. 미군이 참전한 이상 전쟁은 오래갈 것이며, 결국 인민군이 물러날 것이라는 의견들이었다. 7월 4일 시흥방위사령부가 남하하니 모두 남하를 결정한다. 나도 평택 처가에 도착한다. 전황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귀향을 결심하고 수복을 맞는다. 극심한 몸 고생 마음고생 끝에 고향을 뜨기로 마음먹고 한의사(전국면허) 시험 준비에 들어간다. 합격하고 한강 이남 안양쯤에 개업을 준비하는데, 이번엔 반공청년단을 맡으라는 것 아닌가. 아이들(대졸 아들)을 생각해서 거부할 수 없었다. 이어서 3·15, 4·19, 5·16이었다. 통일 세력에 대한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남침이라 하지만 북한이 얻은 것은 북침이요 통일은 더 요원해지고 말았다.

2. 내가 생각하는 남침

나는 그 남침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들 꼭두각신데 무슨 독자 결정이 있었겠는가가 항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북한은 쑥대밭이 되었고, 20만 평양에 20만 톤 폭탄 투하라면 알만하지 않겠는가. 수풍댐 폭파 때는 전 세계가 울었다는 외신도 있다고 했다. 아니 비행기 한 대도 없이 남침이라니 정신 나간 작전 아닌가. 미군 참전을 몰랐다 해도 서울 점령 다음 날 맥아더의 전선 시찰에 이은 미군 부산 상륙, 나아가 7월 5일에는 오산전투가 벌어졌지 않은가. 내가 세상을 마감하던 해 미국 박사 이홍구와 함병춘이 한국전쟁을 장기판에 비유한 논문을 발표한다. 유방과 항우가 수많은 군졸과 병기를 거느리고 싸움을 벌이는데 약소국은 졸(병) 신세로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것,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 간의 대리 전쟁이기에 남한과 북한의 이해관계는 크게 고려될 상황이 못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남침은 얼마나 우리를 분노케 하고, 그 후로 남과 북은 얼마나 더 깊이 철천지원수가 되었는가? 하면 기막힐 일 아닌가. 전쟁사를 다 돌아볼 수는 없지만 2차대전 최대 격전지 스탈린그라드에서 러시아는 100만, 독일은 50만의 병력 손실, 200일간 매일 1만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독일군은 끝내 항복했으나 러시아는 완전 강대국 반열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거만을 떨었고, 위축된 미·영은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구걸하게 된다. 허나 러시아의 대일참전 이틀을 앞두고 터진 원자탄은 러시아의 야욕을 분쇄하기 위한 대소봉쇄 작전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어서 미·영은 ‘철의 장막’을 치고 대소냉전을 선포한다. 미국은 10분의 1로 줄어든 전시 병력을 원상회복하기 바빴고, 그만큼 줄어든 국방예산도 덩달아 급증하기 시작했다. 고철이 되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구식무기는 어쩔 것이며, 전시에 개발되어 이미 실용화 단계에 접어든 무기들이 서로 얼굴을 먼저 내놓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건 또 어쩌랴. 중공 수립 후에도 애치슨라인 운운했지만 어디선가에선 열전이 터져야 했다. 추후에 알아본 당시의 국제정세였다.
▲1945년 2월 4일 얄타회담 개최(제2차 세계대전 종반 소련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들이 모여 독일이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회담.(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군이 독일 분할 점령)

3. 더 까발리면

남침의 내용이 이러한데도 아무도 이를 까발리지 않았고, 그 후에도 오직 북한 증오 강화에만 열을 올렸다. 하기야 다 약소민족의 비애려니 하면 무엇을 더 따지랴. 그러나 마냥 분단 대결 채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 그리되면 남북이 다 손해요 살기 좋은 공동체는 요원한 것. 어느 나라나 공동체를 지향하고 어느 나라나 민족 단합해도 그런 공동체 이루기 힘든데 우리가 분단 증오상태에서 단란한 공동체를 꾸리기는 연목구어요 세계 어느 나라도 그런 나라 없다. 중국이 변방의 오랜 인연까지 끌어안고 대 공동체를 꿈꾸는 내력이나 미국이 잡종들을 긁어모아 건설하려는 대국이 비틀거리는 속내를 따져보면 민족 주체가 세계 평안을 위해서도 얼마나 끽긴함을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민족을 분단하면 만난만화의 씨앗을 뿌리는 만행임을 우리는 오늘까지도 아프리카에서 산견할 수 있으며 남미의 혼란은 또 무엇인가. 중국이 사분오열 끝에 또 최근만 해도 독일이, 또 베트남이 통일을 이룬 쾌거는 무엇인가. 그러면 우리의 분단은 또 무엇인가. 또 하나의 만행이었다. 어쨌거나 맥락이라도 좀 눈치챈 지식인들이 힘닿는 대로 분단 극복에 나서는 것이 도리임이 자명한 것 아닌가. 평화협상도 중요하지만, 때론 무력 사용도 불가피한 것 아닌가, 더욱이 38선을 경계 삼아 무력 충돌이 자자한 때 불의의 남침이란 또 무엇인가. 대국민 선동보다 서로 협상카드를 내걸어야 할 것 아닌가. 북한도 남침이 협상용이었지 점령은 아니지 않았나. 미국과도 일전불사라면 망상이었지.

4. 이적행위

더욱 미국이 대소분쟁을 유도하려고 분주하게 나댈 때 특히 대소·대중 포위를 위해 한반도에 군사 거점 확보가 절실할 때 맞장구를 쳐준 남침은 명백한 이적행위 아닌가. 아니면 미국의 고차원적 공작에 걸려든 것 아닌가. 전쟁사(史)상 개전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고단수를 부리는 게 상례이고, 그리하여 여북해야 종전 후의 손익계산상 흑자를 낸 쪽이 주범이란 게 정설로 되어있는 게 아닌가. 미국이 남침을 갈아타고 여태껏 군사기지를 누리는 걸 어찌 보아야 하나. 6·25 한 발 앞선 연말 유럽 극동에서의 러시아 팽창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결의 천명이 있었지만, 5개월 전 ‘대만 독립은 없다’는 트루먼 성명에 이어 1·12 ‘대만 욕심은 없다’는 애치슨라인이 있었기에 대만·한국 등 극동 안보가 크게 흔들려 보이고, 연이어 미국이 남침에 개의치 않겠다는 마타도어와 또 38선 불시착 정찰키에서 ‘남침 시 한강 이남 방어선구축전략’까지 허위 노출되니 북한인들 종잡을 수 있었겠는가. 수틀리면 해치우자는 노병들이 득실거릴 때였다.
▲애치슨라인 : 알래스카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보이지 않는 극동방위선. 대만과 대한민국은 선 밖으로 분류되어 북한이 남침하게 하는 원인 제공.
그렇다고 남한에서조차 아침 개성, 점심 평양, 저녁 신의주의 북침이 고창되고 있으니 마냥 외면만 할 수만은 없었다. 드디어 3·30 모스크바 조소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전격 서울 해방 후 사수작전을 협의하니, 스탈린은 미국 참전을 우려하며 슬그머니 중국 지원을 주문한다. 미·소 직접 충돌을 크게 두려워한 러시아의 꼼수였다. 특히 미국이 이미 사회주의국가 1,200개 도시와 러시아 공군기지 1,100개소에 대한 핵 타격 계획을 수립하고 압박할 때였다.

5. 약소민족의 비애

유럽에서의 분쟁을 피하려면 그 선택은 극동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 어딘가가 미국 압력 배출구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갓 공산화한 중국 아니겠는가. 그런 가운데 위기를 느낀 세계 지성이 3·15 스톡홀름에 모여 평화를 호소한다. 6·25가 터지자 2주 만에 저명인사 150만 서명, 이어 중국에서 바로 2억 2천만 명이 호응한다. 미군이 38선을 넘자 참전을 결의한 중국이 10·10 중소정상회담에서 공군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전 인민항쟁으로 맞설 결의를 다진다. 총 인민 일심동체(항미원조 保家爲國)였다. 실제로 4만 명이 결혼 후 인민지원군 입대를 서약하며 조선전쟁에 나섰고, 실제로 결혼 4일의 모 주석 장남(28)은 참전 1개월 만에 전사한다. 그런 비극이 더 있으랴. 북한은 전 국토가 쑥밭이 됐으니 누굴 원망하랴. 어차피 당할 운명이니 눈물만 머금어야 하는가. 원자탄이 떨어진들 이보다 더하랴. 융단폭격. 아마도 스탈린은 짐작했겠지만 스탈린그라드의 비극이 아닌가. 오나가나 터지는 것은 약소국이니 어쩌랴. 아니라 해도 당시 극동군사령부 소속 장교가 실토한 바에 의하면 주말 낚시를 준비하는데 내일도 출근해야 한다고 해서 의아해했더니 일요일에 북한남침이 있을 거라 했단다. 이미 남한의 북침계획도 사령부에 통보된 바 있고, 한편으로는 북이 남침하면 신속 후퇴, 부산방어선에 머물다 인천상륙한다는 시나리오도 작성됐다니(6·19), 또 남침 후 중공군을 남쪽에 묶어두려고 미군이 대만에 상륙하였다니 애치슨라인은 여지없었다. 다들 정신 차리겠나 어지럽기 그지없다. 6·25 당일 한국 방어태세가 엉망이었다는 사실은 너무도 유명하다. 파면됐던 참모총장 복귀 후 일선 주요 지휘관 대대적 물갈이, 기동력 35% 폐기처분, 공용화기 30% 정비창 입고, 주요작전지도 전량 회수. 비상경계령 해제, 공휴일 외출 외박 허용, 우리의 남침 경보를 늘 엄살로 여겨온 미 정보장교의 대응조치였나. 거기에 육본 장교구락부 완공 심야 축하 파티까지. 이걸 우연이라 할 수 있겠는가. 참모총장 작전국장 개성주둔 1사단장 모두 연락 두절. 어안 벙벙 아니겠는가.

6. 고단수 정보전

쉽게 보면 북한이 정보전에 패한 듯하지만 그래도 가장 미국을 잘 알았던 러시아는 어떤가. 왜 조심하란 귀띔만 했는가. 스탈린그라드 참화를 상기했을 터인데. 하기야 유럽에서의 대미전략도 버거운데 미국의 소모전을 어찌 감당하란 말인가. 그래 극동이 불가피하다겠지만 원자탄을 서양이 아니라 동양에 썼다는 비화를 상기하면 쓰레기장을 만드는데 미·소가 공모한 것은 아닌가. 엘리스 현인들 알았으랴 그와 내통했다는 박헌영인들 알았으랴. 슬픈 자화상이다. 일언이 폐지하고 기습 남침은 남한의 통일 세력을 궤멸시키고 그 위에 철저한 반공 전선 구축을 촉진시켰다는 의미에서 씻을 수 없는 과오였다. 공산당이 뭔지도 몰랐던 남로당. 고작 이 경자유전. 그 아류는 말할 것도 없고 민족 주체세력까지 몽땅 청소되었으니. 한미공작에 넘어간 것 아닌가. 전선 시찰에서 적 장비 집결이 뻔히 보이는데도 남침 징후가 전혀 없다고 한 덜레스의 너스레는 강대국 노름의 비정성과 장기판 졸 신세의 약소국 비애를 다시 더 떠올리게 한다.

7. 절망과 희망

한강 이남 안양쯤에 새로이 터를 잡고 평화 민족 문화민족과 어울리려던 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어디에도 그런 평사들을 찾을 수 없었다. 광범하게 통일세력은 궤멸되고 있었다. 4· 3이요 여순이요 하면 모를까. 그러나 남침 후 최초의 수원 광교산 만행은 저리 가라였다. 대전 골령골 대학살. 이어서 북한군이 점령해 내려갔던 충청, 영·호남에서 수많은 인종이 목숨을 잃었다. 아마도 통일 세력이 양성되려면 까마득한 세월을 기다려야 할 나는 힘없이 임종을 맞는다. 그러나 미련은 남는다. 3·15 부정선거의 주역으로 반공청년단본부(지금의 미 대사관 자리)에서 있은 승전 파티에 참석하고 있는데 밖이 아우성쳐 왔다. 역시 민주는 죽지 않았다는 희망의 불꽃이었다. 일제 패망까지 감옥을 채웠던 좌익들. 너도 보면 미친다며 간수에게조차 안 보여준 공산당선언. 고작 영웅주의였나. 그 뒤를 어정거리는 전제국가는 안보였다. 그래도 오히려 그 의병의 후예들이 오늘 또 운동권으로 일어나니 아, 민족은 위대하다. 백절불굴 배달족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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