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학회(대표 한동우)의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의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는 김구, 조봉암 등 선열들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직시하며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겨레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독백 형식의 글이다. 모든 글은 선열들이 남긴 기록들, 행적들, 역사적 사실들 등을 토대로 하여 필자의 의견을 가미했다.
네이버 블로그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에는 2020년 7월 이후의 모든 연재 글(25편)을 볼 수 있다.(☞ )
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초능력자 이인(異人)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마련이다. 조선조 말년에 와서는 반상차별·아전횡포·가렴주구 등으로 대소 민란이 많았으며, 듣도 보도 못한 외세까지 기웃거리니 꼭 무슨 큰 난리가 날 것 같이 민심이 흉흉해서 각종 비기(秘記)가 떠다녔다. 정감록이었다. 하루에도 수백 리를 넘나드는 축지법, 겨드랑이에 날개가 생겼다는 장수들, 계룡산에 새 궁궐이 생긴다는 말세론, 그런 시국 틈으로 동학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업신여김을 당하는 상민 천인들을 차별 없이 맞이하는 도인들에 이끌려 신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귀천 없이 진주(眞主)를 모시고 계룡산에 신국가를 건설한다는 교지에 가슴이 벅차올라 곧바로 입도하게 되었다는(백범일지) 김구 선생. 같이 읽은 옥중수기 '독립정신'에서 개화 개명을 주장했던 우남 이승만은 그 10년 전 백범의 울분 대상일 것이었다. 치자(治者)를 꿈꾸는 귀족들 말고는 모두 동학이었다. 우금치에서만 20만 희생이라니 얼마나 더 하겠는가. 그러나 군중을 움직이려면 구호가 있어야 한다. 그 많은 동학의 함성은 뭐였을까. 연비 수천에 산포수 700. 대군을 거느린 혈기 방장 19세 선봉장 김구 선생이 선봉장기(先鋒將旗)에 척왜척양(斥倭斥洋) 표어를 달고 해주성을 공격할 때 함성 말씀은 없으셨다. '지금금지' '시천주' 같은 동학 주문은 아닐 터였다. 그러면 노동요 '영차 영차'나 조심조심 토끼몰이 '우 우'였을 것이다. 그러나 속으로는 뭐였을까. '하느님 도와주소서' '하느님 들어주소서' 아니었겠나. 조선족의 오랜 전통문화 속엔 하느님이 자리하고 계신다. 위험할 때, 아플 때, 억울할 때, 간절히 바랄 때 하느님을 찾는다. 동네마다 사당이요 집집마다 터주까리, 안방마다 대감항아리. 그 하느님을 단골이라고도 했다. 단골 하느님은 단군이시다. 우리 조선족 배달족의 수호신이시다. 나라가 어려울 때 단골에게 울부짖었고 역병이 만연할 때도 단골을 찾았다. 우리 조선족의 수호신 단군 단골. 너무 소중하시어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조심스럽게 찾아뵙는다. 그러면 조선 민중의 원한이 충천할 때까지 하느님은 어디 서 계시는가. 아희들이 아프거나 다쳤을 때 정성껏 빌기만 하면 씻은 듯이 낳게 해주신 하느님(삼신할머님, 칠성님, 상제님, 성주님, 제석님, 태상님, 태을님, 신장님), 민원이 충천하여 아이구 하느님을 입에 달고 다니는 억울한 백성들을 굽어살피소서. 하느님은 힘을 모으라신다. 천지 공사였다. 모두 조석삭망으로 천지 도수가 바뀌는 아산만이 그 터였다. 계룡산 공암굴의 동학이요 당진 의두암의 대종교였다. 동학은 상민·천민·몰락 양반의 신통경을 종교화했으며, 대종교는 국망을 회복하려 민속신앙을 국교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상민들의 종교요 양반들의 종교라 할 만한데, 처음에는 서로 대립하어 충돌하기도 했으나 국권 회복이란 화급성에 모두 함께 만주·연해주로 몰려가 항일투쟁을 벌인다. 특히 독립군의 대부분은 대종교였으며, 3·1의 중심은 천도교(동학)였다. 타도 대상인 고관대작들이 일본을 등에 업고 희희낙락하니 다들 울화가 끓어 순교자가 될 운명이었다. 백범 선생이 도유로 선발되어 해월 대도주를 뵙고 접주라는 첩지를 받고 나오는데 벌써 백의를 입고 칼을 찬 상민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고, 광혜원에 이르러서는 수만의 동학군이 진을 치고 행인들을 검색하는 가운데 각 촌락에서는 밥을 짐으로 지고 도소로 가는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열정과 신바람은 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억울한 민심이 충천하여 그 누구도 앞날을 가늠하기 어려운 형국 아닌가. 이미 모두 목숨을 버릴 각오로 충만 되어 갔다. 일제 경찰 보조단체로 각 지방마다 거의 면 단위로 경방단이 조직되었다. 처음에는 소방대로 발족했으나 태평양전쟁과 더불어 치안 보조기능을 강화했다. 사서삼경을 다 거쳐 초등학교를 나온 나의 리더십은 읍내에서의 생업 종사를 놔두지 않았다. 나는 경방(警防)단장이 되어 유능 청년들의 징용·징병을 막아주고, 나아가 대처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후배들을 은밀히 격려했다. 경찰들을 통해 일본의 패색을 눈치채기보다 후배들이 들려주는 일제 패망이 더 다급하게 다가왔다. 내가 경찰이 물러간 자리에 치안대장을 맡은 것도, 해방 축하 면민대회를 열어 시가행진을 할 수 있었던 배경도 나의 그간의 입지와 무관하지 않았다. 일제 말단 요원으로 행패가 심했던 친지들이 곤욕을 치를 때 불려 다니며 진압하기 바빴고, 그 과정에서 더러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었다. 나는 어느새 건국준비위원회 요원이 되었고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지부장이 되었다. 좌익으로 몰려 곤욕을 당할 즈음 철기 이범석 장군의 민족청년단이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휘날리며 나를 휩싸 안았다. 2년 전 추석을 맞아 '인민공화국 만세'를 공연하던 자리에 '밝아오는 태양'을 올려놓고, 나는 개막 연설에서 '하느님은 조선족을 지키신다. 민족의 간절한 기원, 아낌없이 흘린 피, 부릅뜬 영령들의 한, 다 가상히 여기시어 해방을 주셨다. 어떠한 경우에도 분단은 막아야 한다.' 외쳤으나 조국은 끝내 분단의 길을 걸었다. 수원에 설립된 중앙훈련소 부소장을 맡으며 알게 된 8년 연하의 장준하 교무과장(백범 비서)과 의기투합했으나 연초 자리를 뜨니 막막했다. 5.10선거 위원장을 맡았으면서도 철기 이범석 장군이 국무총리 수락을 거부하길 바랐던 나는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떠난 장준하의 속내를 늦게나마 깨달았다. '오늘은 정부수립' '내일은 남북통일'을 외쳤으나 단원들의 족청 배지가 신검장에서 무참히 짓밟히더니, 드디어 족청은 해산되고 대한청년단으로의 통합이었다. 단장을 안 맡을 수 없었다. 남한 단독선거(단선) 반대를 잡으려 설쳐대던 청년들을 다 안아야 했다. 김구 선생마저 쓰러지시니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다음 선거를 기약하며 울음을 씹었다. 끝내 반공청년단장을 맡아 청년단본부에서 열린 3.15승리기념대회에 참석 중 창밖을 뒤흔드는 아우성을 듣는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 '협잡선거 다시 하라' '이승만 하야하라'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왜양 물러가라'에서 '조선독립만세' '해방만세'로 이어받아 '신탁통치 결사반대', '납북협상 절대 지지'로 이어진 지 어언 10년. 독재가 물러가면 더는 함성이 없을 줄 알았는데 다시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가 들리니 아직 불은 살아있는가 하며 눈을 감는다.어느 서사시에서
양쪽 무력 뻔한 충돌통곡하는 통일아 어렵게 되찾은한줄기 단군의 피는 그래서 운다그렇다 그때 민족은 피요 땅 문화 아니었나감정이요 애정이요 자존심이었으니굴레 갓 벗어난 민족 감격으로 고조된 심박동어깨동무하고 발맞춰 걷는 타탄대로가로막을 자 누구 갈고 닦은 수천 년 땅굴러온 작당질에 또 무너지는 억장속수무책 말고는 정녕 없단 말인가 그래서 중국 그 많은 희생 치르고 국권 회복서반아 그 내전 치르고도 분단되지 않아왜 찢지 않았는가 형제간 척지면 안보 불안민생도탄 외면 이 핑계 저 핑계로 강화되는 특권강대국 약소 찢기 좋아해 하나 처음 속지만망하는 길 알아채곤 한껏 팔 뻗어 외친다아 속았다 핏줄을 잡자 억센 손에 허리 감겨끌려 나가며 울부짖는다. 아 동포여강대국을 벗어나자 외세를 물리치자진정개벽 예 있으니 후천개벽 이 아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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