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학회(대표 한동우)의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의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는 김구, 조봉암 등 선열들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직시하며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겨레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독백 형식의 글이다. 모든 글은 선열들이 남긴 기록들, 행적들, 역사적 사실들 등을 토대로 하여 필자의 의견을 가미했다.
네이버 블로그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에는 2020년 7월 이후의 모든 연재 글(25편)을 볼 수 있다.(☞ )
노촌 두 날개 달다
1. 구로정
중년 기중난은 감연히 직장을 버리고 탑골을 찾았다. 그는 영국의 하이드 팍을 생각했다. 한 10년을 떠들고 나면 무엇인가 손에 잡힐 역사가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주로 민주화요 자유화요 기술화였다. 그러나 80년의 신군부는 그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또 다른 10년이 더 무거운 억압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문민시대. 그러나 모든 것이 부정부패와 전례 답습에 젖어 있었고, 모든 지성은 문민시대의 청사진을 내놓을 수 없는 자폐증에 걸려 있었다. 노년 기중난은 실의에 빠졌다. 예상했던 대로 환란이 왔다. 그러나 김 도령의 대중경제론은 무용지물이었다. 오히려 대중의 밥줄을 끊는데 앞장서야 했다. 그랬어도 부정부패만 척결했으면 중간이나 갔다. 그러나 대통령은 부정부패의 실체를 잘 몰랐고, 논공행상이 부정부패와 맥락을 같이 한다는 인식은 더 없었다. 자기들이 해야 할 정치개혁을 뒤로하고, 애꿎게 독선 부패관료가 내놓은 행정 개혁에만 매달렸으니 성공할 수 있겠는가. 기중난 영감은 생각했다. 이 나라 지도자들의 인생 설계가 바뀌지 않는다면, 이제 농업의 파탄 속에 수많은 실업자가 땅을 칠 것이고 우리의 공동체는 결국 선진에서 탈락할 것이다. 새로운 지도자를 키워야 한다. 조선의 명예와 재산을 몽땅 팔아 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이상룡 선생과 오로지 기개와 적성(赤誠)으로 나라를 세워 스스로 그 청소부가 되려 했던 김구 선생 그리고 그 세 분의 총체적 상징인 상해임시정부의 건국이념을 본받을 새로운 인재를……. 기영감은 탑골이 일시 폐쇄된 후 주유천하를 결심했다. 500년 조선사를 되씹어 보는 300일 장정이었다. 그는 절망하며 기도하며 깨달으며 태백산맥을 훑어내려 갔다. 기영감이 지령(地靈)에 이끌리어 명산대천을 섭렵할 때 조선 풍수의 모든 기운이 어디론가 몰려가는 것을 보고 그 맥을 따라가 보니 천진암이었다. 용두호미(龍頭虎尾) 천진암에 이르러 온 정기가 뭉쳤으니, 황운(皇運) 승붕(乘鳳)에 단학(丹鶴) 비상(飛翔)이 이 아닌가. 기영감이 꿇어앉아 큰절을 올린다. 서둘러 내려온 기영감은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구로정에 올랐다. 예부터 늙은이들이 모여 나라 걱정을 한 곳이다. 탑골의 정치 영감들이 이곳으로 많이 옮겨 와 있었다. 그러나 다들 여전히 고집불통이었다. 기영감은 결심했다. 먼저 오는 3월 1일에 조선조를 이끌어 온 가짜 군자들, 아직도 한국을 이끄는 이들 군자들을 단죄하리라. 이들을 양산한 군자론을 불사르고 제2독립을 선언을 할 것이다. 기중난 영감이 조선조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나라 집을 새로 지을 지위들과 함께 천진 계곡을 오를 때 깨어난 물소리가 요란하고, 연둣빛 꽃망울이 나무 가지를 맴돌며 밝아 오고 있었다. 조선조를 망가뜨린 가짜 군자를 잡도리하고 그들이 즐겨 읽은 군자론을 불사르자, 많은 노인들이 침침한 눈물을 흘리며 야윈 주먹으로 만세를 부른 것이 어제런 듯 기 영감을 설레게 했다. 열 명이 넘는 노인들이 100일 기도를 작정하고 기 영감을 따라 나선 것이다 바로 뒤에 장인귀, 차법대 영감 그 뒤에는 안나리, 신방패, 모리천 영감, 그 뒤로는 조금복, 민운동, 한우리 영감, 또 그 뒤로는 고루주, 남사랑 영감,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구하라 영감이었다. 계곡 중턱에 이르자 멀리 천진암이 양옆으로 각선미를 뽐내며 환한 웃음으로 열두 영감을 맞이하니 벌써 영감들의 정기가 단전으로 무게를 잡으며 새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이윽고 흰 도포에 검은 뿔 관을 쓴 장정이 영감들 앞으로 나아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그는 영감들이 천진암 굴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두 손을 모아 올리며 읍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천진암 터줏대감 엄 도사였다. 영감 일행을 맞아 엄 도사는 영감들을 먼저 용소(龍沼)로 안내하여 상탕에 세수하고 중탕에 몸 담그고 하탕에 발 씻도록 했다. 새 옷을 갈아입은 열두 영감들은 천진암에 들어가 옥천(玉泉) 양옆으로 가부좌를 튼 채 좌정했다. 모두들 산란(散亂)을 버리고 선정(禪定)에 들어갔다. 엄 도사가 축문을 읽어내려 간다. 백일기도에 들어갔던 영감들은 많은 튼실한 아들들을 기원했으나 오히려 키울 일이 더 걱정이었다. 기중난 영감의 제의에 따라 각 영감이 계자 훈 하나씩을 지어내기로 했다. 기 영감이 먼저 수범을 보였다. 새 정치는 별난 군자(贤人)가 아니라 보통사람 가운데 그 중 난 사람이 맡아야 한다. 모인 중의 한 사람(one of them)이면 족하고, 그 위로 군림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좌상(座上)이나 동임(洞任)이라는 말이 예부터 있었다. 면장이 모여 군수 뽑고, 군수가 모여 도지사 뽑는 식이다. 지역의 내용을 잘 파악하고 매사를 정직하게 이끄는 사람이면 된다. 국회의원도 그렇게 뽑고, 내각수반도 그렇게 뽑으면 대충 무난한 살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특권을 바라지만 않는다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풀릴 것이다. 지난 날 그 야단법석을 떨고 뽑은 정치인이 무엇을 했는가. 대기(大機)를 맡을 인재부터 잘 키워야 하네. 장인귀 영감이 나섰다. 새 나라는 장인이 귀한 나라다. 자식들을 장인으로 키워야 한다. 어느 분야에서나 전문 지식과 전문 기술을 가진 자들의 세상이 되어야 한다. 특히 첨단기술과 기능을 닦기 위해 공대(工大)를 보내야 한다. 차법대 영감이 거들었다. 옳아요 자식들이 머리가 좋다고 법대를 보내면 안 된다. 법대 출신, 유명대 출신들이 부패 특권을 쌓고 있는데 거기를 또 보낸단 말인가. 법대를 보낸 부모 교사들은 우쭐대지 말고 반성해야 한다. 안나리 영감은 한술 더 뜬다. 공무원은 종인데 주인 행세하는 녀석들은 쫓아내야 한다. 자식들을 오히려 그런 일에 앞장서도록 키워야 한다. 뇌물이나 술대접, 어떤 청탁도 배척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되는 사업은 하지도 말며, 또 그렇게는 사업을 키울 생각도 말아야 한다. 신방패 영감도 급하다. 나리뿐 아니라 한통속으로 돌아가는 신문 방송도 쳐내야 한다. 사설은 주청(主淸)인데 광고는 작탁(作濁)이요 관변에 붙어 사니 호랑이를 가장한 여우 아닌가. 모리천 영감은 그것보다 더 급한 게 있다고 한다. 모리(謀利)를 천시해야 한다. 모리는 부정부패의 온상이며 인성을 파괴한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짓, 공해산업, 유해식품, 전월세, 고리대금, 투기 등을 멀리하고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영리(營利)에 힘써야 한다. 이윤은 소비자의 아름다운 격려금이다. 더 좋은 제품, 더 기찬 서비스를 만드는데 써야 한다. 조금복 영감이 중요한 교훈을 준다. 복을 적게 받은 사람은 더 노력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민운동 영감은 다수의 민초들이 잘 살아야 한다. 적어도 그들의 불편(食苦, 學苦, 病苦)은 없애야 한다. 아무리 팔자가 늘어져도 늘 이 점을 명심해서 잘 늙었어도 할 일은 해야 하며 희희낙락해서는 안 된다. 한우리 영감은 북한은 오랜 동안 우리와 같은 공동체였다. 외세에 의하여 찢겨져 나간 것이다. 이제 정세도 많이 바뀌었으니 우리의 적대도 끝내야 한다. 그것은 공동체의 복원인 동시에 현실적으로는 재난에 빠진 북한을 구하는 길이다. 남사랑 영감은 역시 사랑만이 접착제라고 주장했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세야말로 공동체의 가장 요긴한 덕목이라는 것이다. 고루주 영감도 한 수 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 지식, 기술을 골고루 나누는데서 사랑이 꽃핀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구하라 영감이다. 기도로 하루를 열고 기도로 하루를 닫아야 한다. 어렵더라도 욕심과 원망을 버릴 때 하나님이 창의력을 주신다. 최선을 다한 만큼의 보수로 살아야 하며 딴 데 한눈을 팔지 말아야 한다. 원로들은 벌써 자식들을 얻은 듯 기뻐하며 하산했다. 이제는 각 가정에 돌아가 자식들을 공권력에 덕 보거나 이를 이용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게 하며 나아가 부당한 권력을 고발하고 부정부패를 파헤치는 일에 앞장서도록 키우자고 다짐하면서. 원로들은 이미 장성한 자식들이 걱정이었다. 못된 버릇을 어찌 고칠꼬. 기중난 영감은 정치 지망생들의 봉사정신을 제일 큰 문제로 삼았다. 작건 크건 어떤 집단의 지도자는 그 집단의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적임자라야 한다. 그런데 그 적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봉사정신과는 관계없이 금력·인력 선전을 동원하여 뽑히고 있으니, 시민단체가 나서서 선거제도의 개혁을 요구해야 한다. 나아가 직접 나서서 그 후보들을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종 비자금으로 불거진 정치권 부패는 가히 ‘프렌치 커넥션’을 연상시킨다. 저러고도 어깨를 으쓱대며 의사당을 드나들었단 말인가. 왜 저런 깡패들을 버젓하게 행세토록 밀어줬단 말인가. 부끄럽고 한심하기 짝이 없다. 검찰, 국세청 더 나아가 그 철통같은 안기부는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 언론은 또 목탁을 어디에 두고 바가지만 두드렸는가. 이러고도 어찌 나라 걱정을 하는 냥 국민에게 헛기침을 해댔단 말인가. 나라가 이 나마라도 굴러가는 게 여간 신기하지 않다. 제대로 굴러가는 게 아니지, 엉망이 돼가고 있는 게지. 제대로라면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게 해 먹는데, 그렇게 도둑들이 금테를 두르고 기고만장한데 제대로 돌아간다면 두려울 게 없고 탈날 일 없지 않은가. 하기야 조선조만 해도 그렇게 굴러왔고, 또 아무리 개탄 발분의 소리가 높아도 해먹을 재주 없는 놈의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밖에 안 들리지 않았는가. 그러나 도탄에 빠진 민생이 있었고 또 못 견딘 반란이 있었다. 종당 간에는 나라가 망했다. 지금은 식민지 시대가 아니라서 나라가 망하기야 하겠는가. 실업자가 생기고 노동자가 성내고 젊은이들이 사회에 애착하지 못하고 겉돌다 도적이 되고 그 하수인 되고 아니면 그 그늘에서 희망 없는 인생을 설계한다. 기술 경쟁이 아니라 뇌물 경쟁이니 국민의 창의력은 메마르고 나라의 경쟁력이 있을 리 없다. 나라의 알맹이가 다 빠져나가면 그게 지금 나라가 망하는 길이다. 이왕(李王)을 모시며 경성제대(北京帝大) 나온 놈만 잘 살아도 나라가 망한 게 아니라고 우길 수 있다. 월급이 갈급 되고 원전(原電)이 원전(怨電)되어도 수출만 되면 경제가 돈다고 박수 칠 수 있다. 정치가 썩어도 질긴 민생은 늘 그렇게 고달픈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나라는 무엇이고 그 안에 사는 국민은 누구란 말인가. 옛날엔 나라가 망해도 산천은 의구하다 했지만(國破山川在) 지금은 잘 사는 냄새에 못사는 코뼈도 녹는다. 이왕 곪아 터졌으니 대수술을 해야 한다고 야단들이다. 정치권이 기다렸다는 듯이 개혁안을 쏟아내고, 언론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개나발을 분다. 순진한 국민은 검찰 격려하기 바쁘다. 곧 개명 천지에 청풍이 불고 산골짝마다 옥류가 흐를 듯하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걸 왜 못 고치고 있었는고. 각종 집단, 동창회, 번영회, 향우회, 종친회, 동호회 심지어 시민운동, 가족 모임까지도 돈 칠갑을 해야 되는 세상으로 바뀌지 않았는가. 뭘로 정치하자는 건가. 뿌린 대로 거두는 법. 오래 으르릉 거렸으면 화해가 어려운 것. 오랜 독재는 민주화가 쉽지 않다. 오래 썩은 정치·경제·사회 덜 썩게 하기도 어렵다. 방부제가 되자고 한 정치가 한 술 더 뜨니 여기부터 고쳐야 하는데 그 조치가 단호하고 과감해야 한다. 똑똑한 사람 뽑으려고 기를 썼지만 결과는 도둑이었다. 이제 맑은 사람 뽑아야 한다. 조직 선거 집어치고 우편 선거(부재자처럼)해야 한다. 좀 엉성하면 어떤가. 그래도 도둑보다 나은 사람 뽑히지 않겠는가. 차법대 영감과 장인귀 영감 그리고 안나리 영감은 나리들 세상이 바뀌었는데, 아직도 모든 가정에서 자식을 나리로 키우고 싶어 하는 게 더 문제라는 것이다. 공부 잘 하면 모두 법대요 장인이 귀한 세상에 공대는 안 보낸다. 아니 공대를 지망했다가도 모두 법대에 와서 강의를 들으니, 법대 강의실과 도서관은 오히려 비법대생들로 더 만원이다. 아직도 개나리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 어떻게 보고 배우겠는가. 진정한 나리꽃 구경 이렇게 어려운가. 먼저 각자 자기 가정부터 관변을 부패특구로 지정하여 자식들이 관을 외면토록 하는 것이다. 산업혁명을 일으킨 것은 귀족이 아니었다. 평민이 귀족이 되려는 반란이었다. 최근 인도의 IT혁명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시험과 당선 그리고 연줄을 통하여 누구에게나 귀족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에 수재들의 반란은 한 번도 없었다. 이제는 수재들이 그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 먼저 청관선언부터 해야 한다. 지난 시절 뜻 있다는 사람들이 노상 개탄만 하다가 세월을 다 보냈지 않았는가. 과거에 흥분하고 분노하는 사이 똑같은 부패는 계속되고 있다. 선거를 전후해서 출마자의 대부분이 범죄자가 되는데도 아무 개선책 없이 무슨 역병처럼 선거는 반복된다. 당선자에게 무슨 존경심이 가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것들이 조선조 이래 600년의 부끄러움이지만, 고작 송사리만 잡히고 큰 고기는 안전지대에서 더 큰 영달을 꿈꾸는 게 현실이다. 영수증 써 줘서 합법화 되었다지만 도둑놈 돈 먹고 깨끗한 정치 할 수 있는가. 또 영수증 안 주고 뒤탈 안 나면 깨끗한 정치인가. 민운동 영감이 열을 올린다. 그래서 시민운동밖에 없다는 것 아닌가. 이제까지 안 해본 게 이것밖에 없으니 말이다. 장인귀 영감이 또 나선다. 공권력에 침을 뱉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들 장인을 키워야 한다. 농업사회와는 달리 산업사회 특히 정보사회는 창의력이 판치는 세상이다. 동양에서는 원래 창의력이 없었다. 아니 있어도 짓눌렀다. 고분벽화, 석굴암, 봉덕사종에서는 우리도 얼개를 엮고 그림을 그리며 주물을 끓여 붓는 재주가 탁월했었다. 그러나 부패특권층의 득세와 가렴주구가 그 싹을 도려 낸 것이다. 서양문명이 들어 올 때까지 우리 농업은 지게, 쟁기, 볏, 두레박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왔고 초보적인 탈곡기, 풍구, 펌프, 우마차도 없었다. 많은 수재들은 양반이 되기 위하여 고시과목인 사서삼경에 매달렸다. 과거가 없어지자 이들은 한성영어학교로 뛰었고, 이것이 법관양성소로 개편되자 우르르 이리로 몰려왔다.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으니 겨우 모사품 대량생산으로 사람이나 싸게 팔아먹는 저부가가치 세상이 된 것 아닌가. 민운동 영감은 재차 목청을 돋운다. 부패특권을 몰아내지 않으면 총체적 생산성이 주저앉고 저임지대가 광범하게 확산될 것이다. 세계화는커녕 매우 혼란한 사회로 전락할 것이 뻔하다. 부패 청산은 이 나라의 생존을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다. 시민운동도 젊은이들에게만 맡겨선 안 된다. 원로들도 앞장서야 한다. 젊은 사람들은 또 다른 욕심으로 번지기 쉽다. 거리로 나서기 어려운 원로들은 네티즌을 활용해서라도 가정에 파고 들어야 한다. 피괄어 영감이 어디 있다 왔는지 격한 말을 쏟아낸다. 영감들이 걱정하는 그런 새끼들 다 쏴 죽여야 해. 박살 내야해. 영감의 해결 방법은 늘 이랬다. 기질 탓이라고나 할까, 피가 뜨겁다고나 할까. 하기야 옛 독립군들은 폭풍한설에 아혈즉열(我血則熱)로 기개를 드높였으니, 이런 의혈청년 가운데서 열사·의사가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하면 반드시 영감의 피를 타기(唾棄)할 것도 아니지 않는가. 권력이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붉은 주먹질이 하늘을 가르는 현실에 그는 분노했다. 영감은 연신 쿠데타가 나와야 한단다. 쿠데타가 난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하며 민운동 영감이 피괄어 영감의 작살주의를 나무란다. 나의 할아버지는 천필주지(天必誅之)를 자주 들먹이셨다. 다른 할아버지들은 또 주리를 틀어야 한다, 곤장(棍杖)을 쳐야 한다고 곧잘 흥분하셨다. 나도 그 피를 받아 여간 과격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싹 쓸어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시골 사는 한 인텔리가 시대를 뛰어넘는 천금 같은 발언을 한 것을 기억한다. 오늘의 범죄는 권력과 부를 누리는 자들의 잘못이 크지만 독설에 쉽게 수긍하는 사람들의 격정성도 이에 한몫 단단히 끼어든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그분의 이름을 잊었다. 그러나 그 한 마디가 나를 재생시킨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요즈음 루쉰(魯迅)의 작품을 읽어가며 권비(權匪)를 내쫓아봐야 여전히 또 다른 권비가 나올 뿐이라고 한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권비의 양성 양산이 문제라는 것이다. 운봉에서 왜구를 대파한 이성계가 고향에 들려 유방(漢高祖)의 대풍가(大風歌)를 외친다. ‘대풍 불어 구름 흩날릴 제 큰 세력 떨치며 고향을 찾는다. 어찌 용장을 끌어 모아 국토를 지키지 않겠는가.’ 이성계를 맞으러 온 정몽주가 한 걱정을 한다. 나라가 어지러우니 백년 묵은 호기(豪氣)가 또 많은 선비를 그르치겠구나(誤書生). 이성계는 왕씨 가문을 도륙 내고 그 피비릿내와 원성을 견디다 못해 한양천도를 서두른다(實錄). 그 후 왕자의 난, 계유정난, 또 무슨 무슨 난, 무슨 사옥, 찍어내기 연속 상영이다. 우리 할아버지들은 박수를 치셨다. 암 그놈들 오래 못 간다고 했지 않나. 민심은 천심이여. 그러나 달라진 게 없었다. 큰 말 나가면 작은 말 들어오고 이런 식인데도 민심은 그걸 원했고 천심은 잽싸게 그걸 받아 챙겼다. 암행어사를 시켜서 재수 없는 관비(官匪) 몇 놈을 치면 성은은 언제나 망극한 법이다. 세월은 잘도 잊게 잘도 간다. 무엇을 고치기보다 자식을 급제시켜 오래오래 해먹기를 바라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민 영감이 피 영감에게 다시 얘기한다. 영감은 지금 조선조만 따져도 600년이 묵은 소리를 한다. 그런 소리 아직도 다방구석 저자거리에서 얼마나 많이 들리는가. 물론 아무 소리도 안 내는 사람들이 더 많다. 세상은 다 그런 것 떠든다고 뭐가 되겠는가 하며. 밥 먹고 똥 싸고 새끼 치고 그러다 한 세상 가는 거지하며. 또 관리 가운데도 소임을 다하는 공복이 얼마나 많은가. 누가 뭐래도 각자 이도(吏道)를 지키면 되는 것인데 하며 말일세. 물론 바꾸어야 하네. 아무 소리 안 하면 권비, 관비 좋은 일만 되지. 그러나 이 놈 치고 저 놈 치는 야경(夜警) 소리에 도둑은 다 놓치네. 피 영감이 대든다. 그러면 가만 있으란 얘기인가. 민 영감이 손을 내 젓는다. 도둑을 놔두면 백성이 피로하고 제일 중요한 창의력이 짓밟히네. 도둑질 잘하는 창의력이란 없네. 도둑 세상에선 창의력이 없다는 얘길세. 요즈음 그런 벤춰 잘 터지지 않는가. 피 영감은 사뭇 답답하다는 쪼다. 민 영감은 얼마 전에 들은 어느 목사의 설교를 소개한다. 세상을 보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오만이라는 것이었다. 모두 내 탓으로 돌리자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갖다 놓으면 별수 없으면서 안 그럴 듯한다는 얘기였다. 민 영감은 그 얘길 이렇게 옮겼다. 누구라도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면 그 사람 탓으로 돌리기보다 그 판을 바꿀 궁리를 해야 바뀌지 않겠는가. 우리 조상들은 성군이나 충신을 갈망하는 방법으로 비성군 비충신을 씹어대기만 했다. 자신들은 늘 입사(入仕)의 길을 달리면서 권도에 나가면 자신들은 안 그럴 것 같이. 어찌 입헌이나 공화를 꿈꾸었겠는가. 우리 정치인들 똑똑하고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은 왜인가. 이제는 정치인이 자라는 토양을 바꾸어야 한다. 부귀를 쫓는 패거리 정치판을 엎어야 한다. 그것은 누굴 찍어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시민의 민주 역량을 여기에 쏟아 부어야 되는 일이다. 피 영감은 한숨을 쉬었다. 영 성이 안 차는 모양이었다. 곁에 있는 영감들이 다가와 그의 양 팔을 주무르며 피를 삭이고 있었다.2. 두날개 노인
열두 영감들이 각자 약조대로 궁행(躬行)에 들어가면서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서로의 성과를 헤아려 보기로 했다. 첫 모임이 있던 날 깔끔하게 차려 입은 노신사가 불청객을 자처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선다. 일흔을 넘어서까지 구로정을 지키다 다시 사서삼경밖에 없다고 자리를 떴던 구부정 영감과 고부랑 영감의 한문 선생 두날개 노인이었다. 노인이 처음 의병의 후예라고 했을 때는 모두 숙연했으나 25년 미전향 장기수라 할 때는 모두들 켕기는 눈치였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사서삼경을 섭렵한 두날개는 스무 살이 다 되어 상경했다. 신학문을 배우다 우연히 ‘인류사회 발전사’ 한 권을 읽고 곧 바로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 권력을 잡아보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그저 노동자·농민과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자는 결심뿐이었다. 늦둥이로 태어났지만 그의 몸속에는 의병 막료였던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거의 독학으로 완성된 그의 공산주의 이론은 꿀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졌다. 해방이 되었을 때 심산유곡에 숨어 살던 도사들이 상투를 틀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진천으로 모여들었다. 후천 개벽을 믿는 강증산의 후예들과 정도령의 출세를 믿는 유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차력(发力)과 둔갑술(遁甲術)로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아침에 서울로 떠나 저녁에 돌아와서는 축지법을 과시했다. 1946년 늦은 봄 서울 남산에서 조각(組閣)을 선포하려다 신장(神將)이 동하지 않자 다음을 기약하며 뿔뿔이 헤어졌다. 장년의 두날개는 모든 것이 가소로웠다. 축지법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겨우 진천서 서울, 서울서 공주 아닌가. 지금 두날개의 사회주의 건설은 하나의 역사 법칙이요, 온 세상이 이를 필연으로 받아드릴 날이 오고 있지 않는가. 그는 희망과 자신에 벅차 있었다. 두날개는 군정의 공산당 탄압이 시작되자 근신에 들어갔다. 6·25를 맞아 월북했고, 10년 만에 당 중앙의 부름을 받는다. 남파되었다가 접선 실패로 체포되었으나 그는 전향할 수 없었다. 청춘을 바친 항일운동이요 혹독한 고문을 견딘 사회주의 아닌가. 거기다가 그는 이북에도 아내가 있고, 두 얘들이 있었다. 어느 가족이나 소중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헤어지던 날의 애잔했던 아내의 모습. 막 말을 배우던 아들과 겨우 태어난 둘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수감 중 면회 온 가족들이 여러 번 전향을 호소했지만 그의 마음은 처연하기만 했다. 노모가 와서 대성통곡할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 모습 그대로 꿈에도 자주 나타나셨다. 그 때마다 그는 크게 울었다. 남에 내려가라는 지시가 떨어져 아내와 부둥켜 앉고 또 크게 울었었다. 조국이 부르니 할 수 없다며. 교도소에서 그는 10여 년 간 사회주의를 지켰다. 그러나 미제의 식민지 남반부가 연이어 개발 계획에 성공하고, 국민생활이 활기를 띠자 그는 회의에 빠졌다 ‘고향 마을에 모여 들었던 축지법을 나도 모르게 믿었던 게 아닌가.’ 그는 어느새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1930년 생떽쓰와의 운명적 만남을 위해 대서양을 건너던 콩쉬엘로는 남미의 사치에 혀를 둘렀다. 여자들은 파리의 보석과 향수를 자랑했고 죽은 자의 이빨로 보철을 했다. 배 안에서도 그들은 비만치료를 받으며 지루한 여행기간 동안 내내 변해 가는 몸매를 자랑했다. 나이 먹은 부인들이 더 극성을 부렸고 코와 눈 성형에 열을 올렸다. 관세를 덜 내려고 매일매일 새 옷을 입고 나와 헌 옷을 만들었다. 두날개가 열 살 때였다. 사람의 욕심은 이런 것인데 어떻게 이것을 죄악시하고 사람의 힘으로 막는단 말인가. 사회주의도 좋고 공산주의도 좋다. 누가 모든 사람에게 이런 사치를 균등하게 줄 수 있단 말인가. 두 날개는 양의 동서를 넘나들며 여러 가지 생각들을 파악하고 비교했다. 동으로 가면 서에, 서로 가도 동에 이른다. 하늘은 동서로 갈려 있지 않다. 높은 정신, 큰 지혜, 큰 생각은 동서양이 같다. 공자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확히 아는 것이 진실로 아는 것이라 했고, 소크라테스는 내가 오직 아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라 했다. 솔론은 도를 넘지 말라 했고, 논어는 지나친 것은 모자람과 같다고 했다.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기독교의 황금률은 논어에도 중용에도 나온다. "남이 싫은 것을 행하지 말라." 두날개는 축지법을 황당하게 여기고 그에 비하면 자기는 축천법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축천법은 또 하나의 축지법이었다. 그렇다고 이것들이 죄다 허망한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들이 기초가 되어 새로운 법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무어나 시몽의 이상향, 프루동과 바쿠닌의 무정부가 그랬듯이. 문학예술에 있어서나 또 철학에 있어서나 심지어 모든 문명의 이기까지. 또 특히 오늘의 우리 정치사상이라 할 자유와 평등과 민주, NGO, 노동운동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생각이란 이렇게 끊임없이 적립 변화된다. 공산주의가 있었기에 자본주의는 강해졌다. 해방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단정(單政)을 반대했다. "일본에 아부하던 놈들이 또 미국에 붙어먹다니." 많이 죽었고 많이 북으로 갔다. 또 많이 남아 시장경제와 민주를 일구어냈다. 이제 미수를 바라보는 두 노인은 지금 북한을 바라본다. 남침을 했으니 용서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1950년 그때로 돌아가자. GNP 50불도 안 되었던 땅. 남한도 북한도 미·소의 꼭두각시였다. 소련이 무기를 대주고 남침하라 했다. 통일이 된다고 했다. 조급한 투사들이 많이 모였던 곳 아닌가. 북한은 북침으로 가르쳤다. 북한은 언젠가 사과할 것이다. 그러나 다그쳐서는 안 된다. 낙원을 건설한다고 반백년을 설친 땅 북한. 사회주의는 고작 빵이었고, 그것조차 참담하게 무너진 이제 남은 것은 알량한 자존심뿐이다. 그걸 가지고 무얼하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매달린 것은 축지법이었다. 나름대로 고쳐먹고 또 고쳐먹을 것이다. 노인이 다 된 두날개는 다시 서양을 난다. 유럽은 다른 민족끼리도 통합한다고 법석이다. 미주로 가자. 다른 인종끼리도 이리저리 손잡는다. 세계화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는가. 누가 밑그림을 그리는가. 미국인가. 아니면 그 배후에 프리메이슨이 있는가. 문명의 충돌을 기독교와 이슬람으로 보지만 두 가지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그래서 두 노인은 진정한 문명 충돌이 동·서양 간에 일어난다고 본다. 그러나 아직은 세계화 시대다. 이는 메이슨의 오랜 꿈이다. 9·11테러는 무엇을 겨냥했는가. 쌍둥이 빌딩에는 이스라엘의 모사드와 프리메이슨의 일루미나티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호루스(광명 또는 全視眼)의 제자들이다. 그들을 아마데라스(동방의 빛)가 친 것이다. 그 도꼬다이(特攻隊) 수법이 그랬다. 제정 러시아의 예언자 블라바츠키는 아마데라스가 중국에 있다고 했다. 두 노인의 생각은 다르다. 천자(始皇)의 나라가 아니라 천황(天皇)의 나라다. 북한은 오래 동안 여길 노려보고 있었다. 메이슨이 지배하는 세계화 시대는 일본과 중국이 손잡는 날까지 간다. 북한도 뒤늦게 이를 눈치 챘다. 미국과 일본을 업어야 한다. 한 1조 달러 정도는 울궈 내야 한다. 그게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먼저 북이 38도선을 팔려고 내놓아야 한다. 남도 BUY KOREA 38로 호응해야 한다. 그럴려면 먼저 비슷하게나마 하나의 정신 하나의 문화로 연결돼야 한다. 남은 것은 38도선의 값을 올리는 일이다. 누가 이일을 할꼬. 두 노인은 애원하듯 기중난 영감을 바라본다. 눈시울에 눈물이 가득 채워진다. 나머지 영감들이 두 노인의 충정을 읽어가며 마른 주먹에 힘을 준다. 두날개 노인은 북에 있을 때 가까이 지낸 남일 장군을 떠올렸다. 남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공을 세운 소련군 장교였다. 해방 후 소련군을 따라 북에 온 그는 조국해방전쟁 시기에 참모총장을 지냈으며, 정전회담 북측 대표를 거쳐 두 노인이 남하할 때까지 외무상으로 활약했다. 남일은 가끔 두 노인을 집으로 불러 남조선 사정 듣기를 좋아했다. 그 때 남 장군의 아들이 두 노인을 삼촌이라며 잘 따랐고, 두 노인도 자기 아들같이 퍽 귀여워했었다. 남 장군의 아들은 아버지가 정전협정에 서명하던 날 백두산대피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제의 간섭으로 남조선을 해방시키지 못한 것을 늘 한스러워 했으며, 그에게 대를 이어 미제를 몰아내고 조선의 독립을 확고히 하는데 앞장설 것을 교시했다. 그는 미제의 콧대를 꺾고 그들로부터 강화조약을 받아내는 꿈을 키우며 장장 30년의 출세가도를 달려왔다. 두 노인이 출소하기 전 갓 들어 온 간첩으로부터 들은 얘기였다. 7·4 공동성명이 발표된 것은 그의 나이 스무 살이 다 되어서였다. 그는 그의 꿈이 무산되는 듯한 아쉬움에 잠기기도 했지만, 백전백승의 영장 김일성 수령이 싸우지 않고 미제를 굴복시킨다고 생각하니 그의 할 일은 아직도 창창했다. 그러나 그가 모스크바 유학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차츰 공화국을 지키는 일도 어려워진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그는 당 국제부에서 일하면서 김일성 주석이 극비리에 추진하고 있는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눈치 채게 된다. 그렇다. 바로 이거다. 성공만 한다면 미제가 어찌 공화국을 넘보랴. 인민생활이 어렵게 되겠지만 통일이 앞당겨지는 날 그들은 배불리 먹으리라. 소련이 여러 가지로 흔들리고 있을 때도 그는 당황하지 않을 만큼 자신감이 붙었다. 당과 그 두리에 뭉쳐 있는 500만 명만 굶어 죽지 않는다면 무엇이 두려우랴. 그는 차츰 광기에 들떠 20년의 장한몽을 꾸고 있었다. 그의 장한몽은 이러했다. 미제에게 핵무기를 비싸게 팔아먹는 꿈. 열두 영감과 여러 가지 약조를 끝낸 두 노인이 그의 꿈을 깨운다. 주석의 시대는 공산주의와 조국 해방의 열정으로 불탔었다. 조국이 완전 해방되는 오늘 공산주의는 이미 신기루였다. 새로 된 김정일 주석과 동시대인인 너는 무엇으로 미쳐야 하는가. 또 하나의 남조선을 이 땅에 건설하자는 것인가. 희한한 생각 아닌가. 그렇다면 새로운 길이 보이지 않는가. 그 길로 가야지 않겠는가. 아랫배에 힘을 주고 김정일 장군을 만나 얘기해라. 북조선 건설을 남조선에 위임하자고. 그리하여 합방 100년, 분단 60년, 2010년에 조국의 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자고. 항복으로 생각하지 말고 남조선의 시나리오를 따르자고. 우리가 지켜 온 민족불기의 자존심과 우리가 달군 민족정기는 통일조국을 관류하는 만고불변의 진리로서 뻗어나갈 것이니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자고. 두 노인의 꿈도 덩달아 야무져 갔다.3. 석날개
두날개 노인이 천진암에서 구로정 영감들을 만나 너무도 반갑고 대견해서 오랫동안 속마음에 묻어두었던 북한의 남한화 구상을 밝히고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어 목신의 부름을 받는다. 구로정 영감들은 두 노인의 절절한 바람에 크게 감명되어 있던 차여서 그날의 두 노인 말씀을 유언으로 간직하고 사태 추이를 주의 깊게 관찰하며 여러 차례 토론모임을 가졌었다. 목신을 모시고 있던 백범이 두날개를 반갑게 맞이한다. 민족분열의 한을 품고 근 60년간을 노심초사하시는 백범을 뵙는 순간 두날개는 황급히 그간 갈고 닦은 남한화를 말씀드린다. 백범은 뜻밖에 머리를 저으신다. 북한이 핵무기를 쉽게 팔겠느냐 하시면서. 아마도 미국을 위협하여 기세를 올리려 할 것이다. 이어서 북한의 한국화보다 한국의 세계화가 더 필요하다시는 게 아닌가.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단 말씀이다. 순간 두날개는 미익(尾翼)을 의식한다. 한국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 지난 시기 20여 년 간 장기수로 있을 때 10여 년 가까이 사서삼경을 가르쳤던 제자의 주장이었다. 20년 아래였지만 통일 혁명의 의지가 남달랐던 그는 항상 통일에 급급한 나에게 방향을 틀라고 여러 번 간청했었다. 나는 다시 장고에 들어갔다. 그 방향으로 장시간 토론했던 내용을 복기해서 백범 선생께 보고 드리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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