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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천황제, 파시즘, 그리고 메이지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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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천황제, 파시즘, 그리고 메이지의 그늘 [파시즘의 어제와 오늘] '무한책임=무책임' 천황제는 어떻게 전체주의 일본을 만들었나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 일본은 조상제사로 사회적 통합을 도모하면서 외세를 거부하는 이른바 '존왕양이(尊王攘夷)' 정책을 견지했다. 하지만 미국 페리 제독이 이끄는 거대 증기선 '쿠로후네(黒船)'에 압도당하고, 영국, 미-영-프-화란 연합군의 도전에 무너지면서, 서양 문화를 수용해 부국강병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배경에서 개혁적 하급 무사들이 메이지 천황을 내세워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단행했다. '유신(維新)'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영어로는 Meiji Restoration(메이지 복고/복원)으로 번역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옛 정신을 기반으로 서구 문명을 수용하려는 정치 운동이었다. 메이지 정부(1868-1912)의 과제는 새로운 천황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국가적 통일성을 도모하면서 서양이 요구하는 종교[信敎]의 자유까지 보장해내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일본 최초의 역사서(<古事記>, <英国書紀>)에 담긴 건국신화를 토대로 천황이 천상의 주재신(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자손이라는 신화를 강조하며 천황 숭배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조상제사를 강조하던 국학과 유교 전통을 일본의 토속 문화인 신도(神道) 안에 흡수시키면서 신도 중심의 국가적 통일성을 도모했다. 신도는 종교라기보다는 일본의 토착 문화이기에, 정부가 신도를 강조해도 불교나 그리스도교 같은 종단 종교의 자유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를 폈다. 이러한 정책은 일단 성공했다. 무사들이 혁명을 시도했다는 사실에 함축되어 있듯이, 새 정권을 창출하는 과정에 전란이 많이 발생했다. 새 정부는 내전 중에 죽은 병사를 '호국영령(護國英靈)'으로 명명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제사를 지냈다. 기존 신사를 대폭 확대하고(가령 伊勢神宮) 새로운 신사들(가령 東京招魂社, 나중에 靖國神社로 개칭)을 두루 창건하는 등 충(忠)과 효(孝)에 기반한 천황 숭배와 전란 희생자를 제사하는 문화를 정착시켜갔다. 대국민 교육지침인 '교육칙어'와 '대일본제국헌법'을 반포하는 등(1890) 국수주의적 국가통합의 기초를 다져갔다. 이와 관련해 헌법의 천황 규정 몇 가지의 의미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1장 천황

제1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

제3조 천황은 신성하여 침해하여서는 아니된다.

제4조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하고, 이 헌법의 조항에 따라 이를 행한다.

제11조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

제13조 천황은 전쟁을 선언하고, 강화하며 제반 조약을 체결한다.

천황은 권리는 무한하되 책임은 지지 않는 신적 존재였다. 독일의 법철학자 칼 슈미트가 "주권자는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라고 규정한 바 있듯이, 천황은 헌법의 원천이면서도 헌법을 넘어서는 예외적 존재였다. 그렇게 '인간으로 나타난 신[現人神]' 개념을 완성해갔다. 이것은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 천황을 무상(無上)의 주권자로 설정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해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배경에서 사실상의 '천황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불교학자 나카무라 하지메는 이렇게 정리했다: "유신 이후에는 천황 숭배가 강권으로 집행되고 최근에는 그것이 절대종교 형태로 되었으며, 다시 국민에게 강제 형식으로 가진 신흥종교로 군림하였다." 아마 도시마로는 이렇게 평가했다: "국가신도는 천황을 교조로 하고 교육칙어나 군인칙유를 경전으로 하여 천국의 신사를 교회로 삼은 국가 종교조직이었다." 이런 식으로 천황제는 일본인의 삶 속에 문화화했다. 이런 정책에 반대하는 개인과 세력들도 있었지만, 주류는 아니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은 민족주의적 제국주의, 군국주의적 전체주의로 나아갔고, 파시즘적 경향을 띤 국가통합의 기초를 확보했다. 문화 연구자들은 이런 일본 사회의 특징을 공기론(空氣論) 혹은 아마에론(甘え論) 등으로 설명하곤 했다. 가령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일본인이 공기(空氣)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다각도로 밝힌 바 있다. 공기는 분위기보다는 농도가 짙은 말로서, 일본이 벌인 대동아전쟁의 실체도 사실상 공기에 있었다고 비판적 평가를 했다. 이길 것 같지 않은데도 싸워야만 할 것 같은 공기에 지배당하며 미 전함과 전투했고 결국 예상된 패배를 했다고 일갈했다. 행동 판단의 주체가 개인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마에(응석, 어리광)론을 제기한 도이 다케오는 마치 응석을 부리며 부모가 다 해주기를 바라는 어린아이의 정서처럼, 일본인은 상위의 권력이 모든 것을 다해준다고 믿는 수동적 대상애(對象愛) 성향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은 아마에를 이상화하고서 아마에가 지배하는 세계를 진짜 세계라고 생각했고, 이것을 제도화한 것이 천황제였다." 주체성에 기반한 판단이 아니라 천황이라는 무상의 권력이 제공하는 흐름에 맡기는 수동성이 강화되면서 책임의 문제도 모호해졌다는 것이다. 정치철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렇게 평가한다: "천황제는 초헌법적 매개에 의존해야 국가의사가 일원화되는 체제"로서 "무한책임의 엄중한 윤리가 이런 메카니즘에서는 거대한 무책임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헌법에서는 천황이 "육해군 통수권자"(1장 11조)로서 "전쟁을 선언"(1장 13조)하는 주체라고 명시했지만, "천황은 침해받지 않는다"(1장 3조)는 규정도 함께 둠으로써, 결국은 전쟁 책임의 최종 주체가 증발해버리는 모순이 가능해진 것이다. 일본인은 내심 전쟁의 최종 책임이 천황에게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천황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현실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안과 밖을 분리하며 책임을 외면하는 도피적 문화를 이어왔다. 이런 현실은 속마음(혼네, 本音)와 겉태도(다테마에, 立って前)를 분리하는 성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침략 전쟁에 대한 사과가 미온적이거나 사과의 주체가 딱히 드러나지 않는 오늘의 현실도 이러한 저간의 역사를 반영해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다가 죽은 이를 호토케(仏)로 신성시하면서 죽음은 생전의 과오를 정화시킨다는 정서가 가미되면서, 죽은 이에게는 책임을 묻기 힘든 분위기도 커졌고, 이것은 과거사 정리를 더 어렵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나아가 사(私, 와타쿠시)는 국가에 종속적이고, 공(公, 오오야케)은 사를 은폐함으로써 드러나는 영역이라는 오랜 공사관(公私觀)도 개인이 국가와 천황에 개입할 가능성을 축소시켜 왔다. 20세기 일본은 사적 영역들의 조화보다는 공적 영역에서의 일치가 일본적 정신[和]이라는, 전체주의적 정서를 이어왔다. 화(和)는 사실상 동(同)이었던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다음 말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일본인의 정신적 균형은 안과 밖의 조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밖의 일방적 수용을 통해서 유지되는 병리적인 것이다." 역사학자 이에나가 사부로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인의 인격적 판단은 비인격적 지배 메카니즘 안에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같은 유학(儒學)이라도 보편적 원리[理] 중심의 성리학이 주류였던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지행합일 지향의 양명학 전통이 컸고, 양심과 도덕의 근원으로서의 하늘 신앙(애국가의 '하느님이 보우하사~')이 잠재해있는 한국과 달리, 천황과 국가를 넘어서는 상위의 가치에 대한 공감대가 상대적으로 약했다. 이런 것들이 100년 전의 권력이 본질적 변화 없이 여전히 이어지는 숨은 동력으로 작용해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오늘의 일본을 전체주의 국가라고 할 수는 없다. 일본은 중앙 정치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지만, 지방자치는 견고한 편이다. 중앙에서는 보수 세력이 내내 정권을 잡아왔고 제국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파시스트적 우익 세력도 잔존하지만, 전 국민이 그에 동조하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 제도를 유지하면서도, 중앙 권력의 교체로까지는 가지 못하는, 딱히 대안이 없으면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그러면서도 군국주의적 전체주의, 파시즘적 제국주의 분위기로 휘몰아쳐 온 20세기 전반, 메이지의 그늘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여전한 현실이다.
▲욱일기를 들고 야스쿠니 신사 안에서 구호를 외치는 극우파 대원들. ⓒ김재명

(이 연재는 공공선 거버넌스(원장 강치원)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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