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3‧1 경찰 발포가 4‧3의 도화선
1947년 3월 1일, "3‧1정신으로 통일독립 전취하다"는 슬로건 아래 시위를 벌이던 제주사람들에게 경찰이 발포, 6명이 죽고 8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사망자들은 시위군중도 아닌 구경꾼들이었다. 경찰은 정당방위라고 주장했고, 목격자들은 비무장 민간인들을 향한 무차별 발포였다고 반박했다. 3월 10일, 제주도민들이 총파업을 했다. 미군정은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로 보기 시작했고 본토에서 경찰 4백여명을 내려보내 고문을 시작했다. 이어 극우단체인 서북청년회(서청) 단원까지 파견했다. 백색테러가 횡행했지만 눈감아주었다. 1년동안 청년 2,500명을 구속시켰다. 1948년 3월 한달동안 경찰에 의해 3건의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다. 중학생도 경찰지서에서 뭇매를 맞고 숨졌다. 제주도는 터지기 직전의 화약고가 되었다.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은 미군정에 대한 반감 분위기와 당면한 단독선거 반대 캠페인을 접목시켜 1948년 4월 3일 무장투쟁을 실행했다. 극우세력들은 이를 두고 마치 제주도에서만 '폭동'이 일어난 것처럼 왜곡해 왔다. 미군 보고서에 의하더라도, 4‧3봉기 이전, 즉 1948년 2월과 3월 두달새 본토에서 모두 239건의 경찰관서 습격사건이 있었다. UN에서 '한반도에서 선거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미 북쪽을 통치하던 소련이 반대의사를 밝혔기에 그것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의미했다. 남한사회가 요동쳤다.유일한 5‧10 선거 보이콧, 재선거마저 실패
미군정은 4‧3 초기에는 '치안상황'으로 간주하고 경찰력을 투입해서 진압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태가 계속 악화되자 경비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9연대 김익렬 연대장은 무장대 측 총책인 김달삼과 만나서 '4‧28 평화회담'을 추진했지만 미군정은 이를 묵살했다. 그러면 무장투쟁은 이미 본토에서도 진즉 빈번하게 일어난 일인데, 왜 유독 제주도에서만 유혈사태로 확대된 것일까? 그것은 미군정이 시행한 5‧10 선거를 제주도민들이 보이콧했기 때문이다. 5‧10 선거는 제헌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였다. 당시는 유권자 50%이상 투표해야만 인정되는 제도였다. 그런데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유일하게 제주도 2개 선거구만 투표율이 50%를 넘지 못해 무효처리됐다. 미군정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 총사령관은 즉시 전투사령관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파견했다. 브라운은 제주에 와서 "나의 사명은 진압, 조속히 재선거를 시행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리고 "제주도 서쪽에서 동쪽까지 모조리 쓸어버리는 작전을 수행한다"고 공언했다. 미군 사령관의 작전은 선거 실행에 방해가 되는 청년들을 죄의 유무 가리지 않고 무조건 검거하는 작전이었다. 이렇게 되자 마을마다 보초가 생겼다. 토벌대의 마을 진입을 망보는 보초들의 신호에 따라 청년들은 산으로 도망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6주 동안 잡힌 청년만 6천명에 이르렀다. 중학생도 있었다. 이처럼 무차별 검거작전은 '폭도아닌 폭도'를 양산시키는 부작용을 속출했다. 이런 무모한 작전을 펼쳤지만 미군정이 장담하던 6‧23 재선거마저 실패했다. 미군정에게는 1947년의 3‧1 발포나 3‧10 총파업 때, 아니면 1948년의 4‧3 봉기, 4‧28 평화협상, 5‧10 선거 때 등 여러 차례 선무활동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민심 수습책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힘자랑하듯, 물리력만 동원해서 사태를 진압하려고 했다. 그런데도 재선거마저 실패했으니 미군 수뇌부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초토화작전 감행으로 유혈사태 초래
1948년 8월 15일,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됐다. 8월 24일, 이승만 대통령과 하지 총사령관의 합의에 따라 한미 군사안전 잠정협정이 체결됐다.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미군에 넘겨줬다. 이를 수행할 임시군사고문단이 발족됐고, 고문단장에 로버트 준장이 취임했다. 1948년 10월 9일, 로버츠 장군은 제주 진압작전의 수정을 지시했다. 그 직후인 10월 17일 제주주둔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 5km 이외 지역을 통행하면 무조건 총살한다"는 내용의 초토화작전 감행을 선포했다. '해안선 5km 이외의 지역'이라 함은 제주도 전체 면적의 80%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었다. 1948년 11월부터 감행된 초토화작전은 제주도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중산간 지대에서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됐다. '폭도의 양식'이 된다는 이유로 가축들이 몰살됐다. 민가 4만여 채가 토벌대의 방화로 깡그리 불탔다. 2003년 정부 진상조사보고서는 4‧3의 희생자 수를 25,000~30,000명으로 추정했다. 이 희생자들 대부분이 이 초토화작전 이후 피해를 본 것이다. 비무장 민간인들을 현장에서 즉결처형하는 초토화작전은 국제법으로 엄금됐다. 1930년대 일본군이 만주에서 벌인 만행이었다. 이런 악행이 독립된 대한민국 정부 아래서 자행된 것이다. 송요찬 연대장은 "이 작전은 정부 최고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연대장 수준의 작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최고 명령권자는 누구인가? 많은 자료들은 이승만 정권과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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