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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층에 외면 받는 보수적 한국 교회, 저항정신 되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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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층에 외면 받는 보수적 한국 교회, 저항정신 되찾자 [파시즘의 어제와 오늘] 칼빈, 칼빈주의 그리고 저항권
한국의 장로교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들이 스스로를 칼빈 전통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칼빈과 칼빈주의는 구분되어야 한다. 칼빈주의는 본류 칼빈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 이유는 칼빈 사후, 칼빈의 저술들과 신학 사상이 유럽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칼빈의 종교개혁의 토대였던 스위스에서부터 쯔빙글리의 사상이 칼빈신학에 침투해 들어왔다. 이에 대해서 칼빈주의 연구의 대가인 맥닐은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취리히의 개신교와 제네바의 개신교 간에는 창조적 관용의 정신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양측의 차이는 상당했지만, 그로 인해 불화가 야기되지는 않았다. 양측은 동일한 우군과 적군을 상대해야 했고, 한 교파를 형성했고, 후대에 공통된 유산을 남겨 주었다. 따라서 츠빙글리주의를 필연적으로 칼빈주의로 약칭되는 더 넓은 운동의 일부분으로 간주하는 데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는 것이다." (존 맥닐, 『칼빈주의 역사와 성격』, 양낙흥 옮김 (서울 : 크리스챤 다이제스트,1996) 8.) 맥닐에 따르면, 칼빈과 쯔빙글리의 신학사상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화가 야기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칼빈의 노력 때문이다. 칼빈은 종교개혁진영의 일치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칼빈은 스위스 종교개혁 진영의 일치를 위해서 많은 공을 들였고, 쯔빙글리 사후, 스위스의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불링거와는 늘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칼빈과 불링거 사이의 편지 교환이 300여 통이나 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박상봉, "요한 칼빈과 하인리히 불링거의 성만찬 일치", 「한국교회사학회지」 27집(서울:한국교회사학회, 2010), 161.) 칼빈 사후,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블링거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그리고 블링거에 의해서 작성된 제 1.2차 스위스 신앙고백서에서부터 칼빈과 츠빙글리가 본격적으로 섞이게 되었다. 이후 칼빈주의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칼빈의 신학과 고백내용은많은 변형을 겪게 된다. 네덜란드에서는 칼빈 보다도 블링거가 더욱 존경을 받았고. 알마니안주의와의 논쟁을 통해서 칼빈주의 5대 강령이 형성되었다. 영국에서는 칼빈의 제자인 베자가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칼빈신학의 사회참여적 요소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알다시피 칼빈의 제네바를 신정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정치적 지위를 갖지는 않았지만 제네바시 전체에 존경받는 선생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영향력을 장자크 루소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의 저서 사회계약설에서 루소는 기독교 강요의 저자인 칼빈보다도 입법가로서의 칼빈이 더욱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소는 제네바 출신이다. 비록 200여년의 시간차이가 있지만 제네바에서 살면서 루소는 칼빈의 신학의 사회개혁적 요소를 많이 체험음을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칼빈신학의 적극적인 사회참여적 요소는 그의 저항권신학에서 발견된다. 칼빈은 기본적으로 국가도 하나님의 권위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권위에 순종할 것을 적극 권한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순종이 아니다. 만약 위정자들이나 정치가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정책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할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과감하게 거부할 수 있다. 그의 주저 기독교 강요에서 이 거부권과 저항권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만일 왕들의 횡포를 억제하라고 임명된 백성들의 관리가 있다면, 그들이 자기들의 임무에 따라서 왕들의 맹렬한 방종에 저항하는 것을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기독교 강요Ⅳ. 20. 31) 특히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정치가들과 카톨릭 세력에 박해를 받았을 때, 칼빈은 위그노들의 저항권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최근에 저항권에 관한 칼빈의 설교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1550년 사도행전 설교에서 칼빈은 '군주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에서부터 돌아서서 우상숭배와 미신에 빠지도록 하기위해 무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이제 우리에게 개구리나 이보다도 권위를 지니지 못한다.' 고 선언했다. 이는 성상숭배와 미신적 요소가 많았던 카톨릭을 비호하는 왕들에 대한 저항권의 선언이었다. 그렇다고 칼빈이 무책임한 무정부주의적 혁명을 찬성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과격한 혁명은 거부하였다. 위그노 전쟁 중에 과격한 혁명주의자들에대해 칼빈은 분명한 거부의사를 밝혔다.
▲임창세 목사ⓒ필자 제공
그렇다면 칼빈이 선호하는 정치형태는 어떤 모습일까? 칼빈은 왕정정치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이었다. 대신에 백성들이 선출하는 관리들에 의한 대의정치를 선호하였다. 백성들 모두가 통치에 가담할 수 없으므로 자신들을 대신해서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서 통치할 대리인들을 뽑아 그들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칼빈은 절대권력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국민주권에 입각한 대의정치, 즉 근대민주주의사상을 꿈꾸었고, 이런 사상에 대한 초석을 다졌다. 맥닐은 이러한 칼빈의 신학사상이 프랑스의 위그노 전통에 이어지고 더 나아가 루소를 거쳐 프랑스 혁명에까지 이어졌다고 말한다. 최근 한국교회가 보수적 성향에 강해지는 것이 안타깝다. 이는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가진 젊은 층들에게 교회가 외면을 당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젊은 층들이 개신교가 아닌 카톨릭 교회를 선택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보수적인 칼빈주의에서 벗어나 칼빈 본래의 사회개혁적 신학을 되찾기를 바란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나아가서 젊은층들에게지지 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이 글을 쓴 임창세 목사는 독일 복흠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총회목회신학대학 주임교수, 한신대 겸임교수 등을 지냈습니다. 이 연재는 공공선 거버넌스(원장 강치원)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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