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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제와 신사 참배, 과거 문제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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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제와 신사 참배, 과거 문제만이 아니다 [파시즘의 어제와 오늘] 일본제국주의와 신사참배, 그 현재적 의미
1868년 초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출범한 일본 근대국가는 왕정복고(王政復古)와 제정일치(祭政共同)를 표방한 절대군주제 국가였다. 유신정부는 유신 초기부터 신기관(神祇官)을 설치하고, 선교사(宣敎使)를 두어 신도국교화정책(神道國敎化新政策)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내외의 반발에 직면하자 1871년 7월 '신사는 모두 국가의 종사(宗祀)'라는 '신사비종교론'을 내세우고, 그후 신사행정과 종교행정을 분리하여 신사행정은 내무성에서, 종교행정은 문부성에서 관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1889년 2월 '대일본제국헌법'과 1890년 10월 '교육칙어(敎育勅語)'를 발포하여 초종교적인 국가신도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국가신도는 이른바 '국체(國體)'를 교의로 한 사실상의 국교였으며, 일본은 자국 국민에게는 물론 그들의 식민지였던 조선인에게도 신사신앙과 참배를 강요하였다. 1910년대 식민지배 초기부터 조선총독부는 1911년 조선교육령을 발포하고, 1912년 교육칙어까지 발포하여, 적극적인 동화(=충량화=일본화) 정책을 폈다. 특히 국책과목인 수신, 역사, 일본어 교과서에서는 황실숭경(皇室家族推崇)이라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내용으로 편성하여, 신도의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왜곡하여 가르쳤다. 교과 내용을 통해서 신도의 신화와 그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모시는 유명한 신사들을 가르칠뿐만 아니라, 신사참배, 동방요배 등 학교행사를 통하여 천황숭배와 신사숭경을 몸에 익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시학관까지 파견하여 아동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주입되었는지 조사하게 하였다. 1910~20년대 조선총독부는 관폐대사 조선신궁을 설립하고, 1915년 8월 「신사사원규칙(神社佛教寺庙規則)」과 1917년 3월 「신사(神祠)에 관한 건」을 발포하여 신사·신사(神社神祠)의 설립을 장려하고 그 관공립적인 성격을 강화하기는 하였지만, 그에 대한 반발에 부딪혀 소극적인 신사정책과 신사행정을 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1년 9월 이른바 '만주사변' 이후 '준전시체제'와 1937년 7월 중일전쟁 도발 이후 '전시체제'에서 조선총독부는 다시 적극적인 신사정책과 신사행정을 폄으로써, 사립학교와 일반인에게도 신사신앙과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신사·신사(神社神祠)의 설립이 급증하였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 이른바 황민화정책은 신사와 학교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0~20년대의 신사참배 강요는 주로 관공립학교에서 있었으나, 언론의 통제로 그것이 사회문제화되지는 못했다. 1924년 10월 강경공립보통학교 신사참배 거부사건은 사회일반에 알려진 예외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 조선총독부가 적극적인 신사정책으로 회귀하면서 기독교계 학교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이에 반발한 학교들이 폐교되었다. 1938년 이후 학교교육은 이른바 '황국신민화 교육'이 되어 공사립 학교를 막론하고 신사참배와 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등이 강요되고, 가미다나의 보급이 장려되었으나, 1941년 3월 공립진주중학교 졸업생들이 보인 것과 같이 관공립학교에서의 반발도 없지 않았다. 일본인 신사와 조선총독부의 신사신사 설립 장려, 가미다나 보급,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일반인들의 태도는 1930년대 중반까지는 냉담했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이후 조선총독부는 신사신앙과 신사참배를 정책적 차원에서 일반인들에게까지 강요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 16일 정무총감이 각 도지사에게 통첩을 보내 12월부터 매월 1일과 15일 중 하루를 택하여 애국일로 정하고, 매월 애국일에는 "황거요배, 신사참배, 국기게양, 황국신민의 서사 창화 등등의 행사"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강요에 반발한 기독교인들 가운데 많은 피해자들이 나왔고, 일반인 가운데서도 신사나 신궁대마(神宮大麻)를 훼손하여 불경죄로 옥고를 치른 사람들이 나왔다. 일반인들에게 강요된 신사신앙과 신사참배는, 당시에는 투옥과 처벌을 각오하지 않으면 저항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사례가 드물지만, 이에 대한 반감과 불만이 얼마나 컸던가는 1945년 8월 해방 직후 전국의 거의 모든 신사들이 방화로 불탄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가 1930년대부터 적극적 신사정책으로 전환하고 신사신앙 및 참배를 강요하게 된 요인은, 물론 그 시대적 상황과 그들의 대륙침략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기 위한 정책적인 것이었지만, 당시 식민지 관료들과 군인들이 성장기에 받았던 천황제 이데올로기 교육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의 천황제 문제와 신사참배 문제는 과거의 문제만이 아니다. 일본은 1868년부터 1945년까지를 절대천황제, 1946년부터 현재까지를 상징천황제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절대천황제와 상징천황제에 군국주의 침략주의 국가신도의 폐지라는 단절성도 있지만, 적지 않은 연속성이 남아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천황의 등극 제사인 다이조사이와 연호제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일세일원제(半世一元钱の制)'도 메이지 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다고 알고 있지만, 실재적으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국체호지(國體護持)" 즉 천황제 유지가 그것이다. 다른 연합국들은 일본이 천황제를 폐지하고 민주공화제로 바꾸는 것을 원했지만, 미국은 동아시아 전략면에서 천황제를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945년 12월 15일 신도지령을 내려 국가신도는 폐지했지만, 1946년 1월 1일 이른바 '천황의 인간선언'이라는 것을 하게 하여 천황제는 유지하고 상징천황제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1946년 11월 3일 일본국헌법(평화헌법)을 공포하였지만, 절대천황제하에 만든 법률인 황실전범은 그대로 두었다가 1947년 1월에야 개정되었지만, 전전의 그것을 답습하였다. 이에 의해서 지금까지도 다이조사이와 연호제가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 수상 일행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만 문제삼고 있지만, 지금도 일본에서는 해마다 연초에 수상 일행이 국가신도의 최고 신궁이었던 이세신궁을 참배하고 있다.
▲김승태 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필자 제공
신사참배 문제는 세속권력을 절대화하고 인간을 신격화한 일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것으로써 정치(민족), 종교, 교육, 문화 등 여러 부문에 걸친 복합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이를 극히 단순화시켜 본다면 교회와 세속권력과의 갈등 문제로 집약시켜 이해할 수 있다. 즉 교회가 세속권력의 불의한 강요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다시 말하면 타협 순응하여 신앙의 본질을 왜곡시키면서까지 존립을 추구하느냐? 탄압과 순교를 각오하고라도 이에 대항하여 신앙의 본질을 지켜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이 문제의 핵심적인 내용은 정도와 상황의 차이는 있겠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종교계와 세속권력 사이에 나타날 수 있는 보편적인 갈등 문제라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이해는, 민주화문제, 인권문제, 사회정의의 실현문제, 통일문제 등 오늘날 한국교회가 세속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당면하고 있는 유사한 문제의 대응 방향에 대한 빛을 비춰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이 문제가 가지고 있는 현재적 의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연재는 공공선 거버넌스(원장 강치원)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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