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서로 다른 과거를 지닌 개인들을 '공통의 현재'로 내몰았다.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인공지능 로봇은 지구상의 거의 모든 인류를 '공통의 현재'에 존재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현재는 너무 불평등하며, 기술혁명은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새로운 계급질서가 만들어지고 '상대적 박탈감'을 일상화한다.
사회학자 판카지 미슈라는 책 <분노의 시대>(강주헌 옮김, 열린책들 펴냄)에서 "공통의 현재 속에서 전혀 다른 과거를 가진 개인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이 근접성, 혹은 한나 아렌트가 '부정적 연대'라고 부른 이 같은 현실은 디지털 통신, 시기와 분노를 자아내는 비교 능력의 향상, 그리고 개인에게 차별성과 독자성을 갖출 것을 끊임없이 닦달하는, 그래서 좀처럼 적응하기 힘든 요구로 인해 밀실에 갇힌 것 같은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기술혁명과 미디어의 변화, 이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분노와 사회적 모순을 독특한 상상력으로 그린 드라마 <블랙미러>는 '근(近) 미래' 상상력의 상징이 되었다. 2011년 12월 시즌1 첫 편 <공주와 돼지(The National Anthem)>가 공개됐을 때 세계는 이에 대한 논쟁으로 뜨거웠다. 영국의 공주를 납치한 범인이 협상 조건으로 총리에게 돼지와의 수간(獸姦)을 생중계할 것을 요구하고, 이 장면이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에 공유된다는 설정은 당시로써 파격 그 자체였다. 이 시리즈의 기획자이자 각본가 찰리 브루커는 "21세기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텔레비전과 휴대폰, 모니터를 보며 지낸다. 하지만 전원이 꺼지면 그것들은 모두 우리를 비추고 있는 어두운 거울에 불과하다"고 <블랙미러> 시리즈 제작 배경을 밝힌 바 있다.
지난 6월 5일 <블랙미러> 시즌5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다. 지난 해 말 인터랙티브 필름 <블랙미러: 밴더스내치>가 공개된 이후 반 년 만이다. 시즌5는 시리즈의 상상력을 이어가면서도 한층 소프트하고 대중적인 에피소드로 구성됐다. 그 동안 <블랙미러> 시리즈에 약간의 거부감을 가졌던 사람들도 기꺼이 즐길 수 있는 수준이다. <블랙미러> 마니아들 사이에서 '약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시즌5를 소프트하게 만든 것은 넷플릭스와 VR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사전 포석일 수도 있다. <블랙미러>는 각각의 작품이 독립적으로 완결되는 옴니버스 형식이어서 어떤 시리즈의 어떤 에피소드를 먼저 봐도 상관없다. 따라서 <블랙미러> 시리즈에 입문하고 싶은 독자라면, 시즌 5부터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시즌5 첫 편은 VR 게임을 다룬 <스트라이킹 바이퍼스>. 대학동창이자 둘도 없는 친구인 대니와 칼은 격투 게임 '스트라이킹 바이퍼스' 마니아다.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은 대니의 생일날, 두 사람은 11년 만에 재회한다. 칼은 이때 스트라이킹 바이퍼의 VR 버전을 선물하고,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집에서 게임에 접속한다. 예전처럼 대니는 남자 캐릭터를, 칼은 여자 캐릭터를….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게임 속에 빠진 두 사람, 이들은 이내 사랑을 나누게 된다.
이렇듯 첫 에피소드는 주인공들이 현실과 게임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이야기다. 다소 밋밋할 수도 있지만, 찰리 브루커는 2019년에 현재에 일어날 법한 '최근 미래'라는 설정을 들고 왔다. 더 많은 대중을 만나기 위해 현실 속에 일어날 법한 개연성 혹은 핍진성(Verisimilitude, 사실적이거나 진실해 보이는 정도나 질)에 방점을 찍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즌5 두 번째는 소셜미디어를 다룬 <스미더린>(※스포일러 있음). 소셜미디어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룬 시즌 3의 <추락>과는 사뭇 다른 관점에서 소셜미디어 문제를 다룬다. <추락>이 소셜미디어 평점으로 인간의 등급이 매겨지는 근미래 사회의 위선을 그렸다면, <스미더린>에서는 소셜미디어 트라우마를 가진 한 남자의 납치극을 소재로 했다.
영국 최고의 소셜미디어 회사 스미더린('트위터'와 유사) 앞에서 고객을 기다리고 있는 콜택시 운전기사 크리스. 그는 스미더린 직원인 제이든을 납치한다. 고급 양복 때문에 임원인 줄 알고 납치했으나, 알고 보니 제이든은 인턴사원. 스미더린은 지역경찰과 연방경찰보다 빨리 크리스의 신상을 알아내 상황에 대처한다. 그러나 돈을 요구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크리스는 스미더린 창업자 빌리 바우어와 통화하게 해 달라고 한다.
IT 교사 출신 엘리트인 크리스는 음주운전 사고로 약혼녀를 잃었다. 약혼녀와 함께 어머니를 봽고 돌아가는 길에 스미더린 반응을 체크하다 사고가 난 것. 상대방 운전자가 음주운전 상태라 음주 사고로 처리되었지만, 크리스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이 스미더린에 중독된 나머지 약혼녀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것. 그는 애초부터 인질을 죽일 생각도, 돈을 요구할 생각도 없었다. 오직 스미더린 CEO 빌리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고 싶을 뿐이었다.
납치라는 설정과 예상치 못한 요구는 시즌1의 첫 번째 에피소드 <공주와 돼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시즌5의 두 번째 에피소드는 훨씬 소프트하며 더 개인적이고 인간적이다. 특히 스미더린 창업자가 크리스와 통화를 하면서 "스미더린이 내가 의도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나도 이제 그것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고 고백하는 대목은 소셜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여백을 남긴다.
크리스 역은 영국 드라마 <셜록>의 악당 모리어티로 유명한 앤드류 스콧이 맡았으며, 영화 <스파이더맨 3>에서 베놈으로 출연했던 토퍼 그레이스가 빌리 역을 맡았다.
시즌5 세 번째는 인기 팝가수 마일리 사이러스가 주연을 맡은 <레이철, 잭, 애슐리 투(Rachel, Jack and Ashley Too)>이다. 팝스타 '애슐리 O'를 동경하는 레이철이 애슐리의 인격을 모방해 만든 인공지능 인형 '애슐리 투'와 함께 애슐리를 코마 상태에 빠뜨린 고모의 음모를 파헤친다는 설정. 애슐리는 고모에 의해 만들어진 캐릭터와 틀에 박힌 음악을 싫어한다. 댄스 음악이 아니라 록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애슐리의 모습은 다양성이 사라지고 획일화돼 가는 인스턴트 사회, 혹은 조작된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읽힌다.
<블랙미러> 시즌 5는 이처럼 대중적인 눈높이에서 기술과 인간의 문제를 다룬다. 기술이 복제하는 획일성, 가짜 현실에 대한 소극적 저항이 주제이며, 그런 점에서 부드럽지만 깊이가 없다는 비판도 수긍이 간다.
하지만 언제나 심오할 필요가 있을까? <블랙미러> 시즌5는 서로 다른 과거를 가진 개인들이 살아가는 공통의 현재, 그 참을 수 없는 상대 비교와 근접성의 공포 속에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진짜는 무엇이고 어디에 존재하는가?
애슐리 O가 '퍽킨 O'로 개명하고 부른 로큰롤 '헤드 라이크 어 홀(Head Like A Hole)'의 가사는 시즌5의 주제를 집약한다.
God money I'll do anything for you
돈이시여, 당신을 위해선 무엇이든 하겠나이다
God money just tell me what you want me to
돈이시여, 뭐든 말씀만 하시옵소서
God money nail me up against the wall.
돈이시여, 절 속박하여 주소서
God money don't want everything he wants it all.
그 모든 것을 원하시는 돈이시여
No you can't take it
가져갈 수 없어
No you can't take it
가져갈 수 없어
No you can't take that away from me
내게서 그걸 가져갈 수 없어
Head like a hole, Black as your soul.
텅 빈 머리, 시커먼 영혼
I'd rather die than give you control.
네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어
추신 : <블랙미러> 시즌3의 <샌 주니페로>와 시즌4의
<블랙미러> 관람등급은 모두 청소년 관람 불가다. 넷플릭스 등 OTT 채널 등장 이후 영상물등급심의위원회는 심의 물량 폭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래서 시리즈 전체에서 한 장면만 도드라져도 관람 불가 판정을 내리는 것 같다. <블랙미러> 시즌5의 경우 1화 <스트라이킹 바이퍼스>는 게임 속 섹스 장면 때문에 청소년관람 불가 등급이 불가피하다고 해도, 2화 <스미더린>과 3화 <레이철, 잭, 애슐리 투>는 청소년들이 보기에 전혀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이며 청소년 토론 소재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 위 글은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428호(2019.07)와 공동 게재합니다. (☞ 바로 가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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