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통신 31- 내가 만난 하마스 지도자 란티시
"지금은 힘들지만, 역사는 하마스 편이다"**
중동 유혈사태는 극한적인 투쟁과 살육으로 치닫는가. 이미 보도된 바와 같이, 하마스 가자지구 지도자 압둘 아지즈 란티시가 4월17일 이스라엘 군의 헬기 미사일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지난 3월22일 하마스 '정신적 지도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이 사망한지 한 달도 채 지나기 전에 벌어진 유혈사건이다. 이스라엘은 지난 2000년 9월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인티파다(봉기)가 일어난 이래 팔레스타인 저항운동가들을 잇달아 암살, 국제사회로부터 '국제법 위반'이란 비난을 받아왔다. 필자는 중동현지 취재과정에서 두 차례에 걸쳐 란티시를 인터뷰한 바 있다. 아래 글은 <한겨레신문> 4월20일자에 실린 필자의 글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자살 폭탄은 순교작전"**
압둘 아지즈 란티시는 특히 눈빛이 강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필자는 란티시를 가자 시내 자택에서 만나 하마스의 투쟁논리와 전망을 물어 보았다.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봉기)가 8개월째 접어들어 숱한 사상자를 내고 있던 2001년 5월, 그리고 1년 뒤인 2002년5월 두 차례에 걸쳐서였다. 당시 그는 하마스 5인 정치위원의 한사람으로, 하마스 '정신적 지도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의 오른팔이자 몸이 불편했던 야신을 대신해 사실상 하마스를 이끌고 있었다. 지난 3월23일 야신이 암살한 뒤 하마스 지도자에 추대된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1947년생인 란티시는 이집트에서 의학을 공부한 소아과 의사다. 1차 인티파다(1987-1993년)가 일어난 1987년 야신과 더불어 하마스 창립을 이끌었던 7인 가운데 하나다. 1989년 이스라엘에 체포돼 2년 반 넘게 감옥에서 지냈다. 1992년 다른 4백명의 팔레스타인 정치범들과 함께 레바논으로 추방됐다가, 오슬로 평화회담(1993년) 뒤 다시 고향인 가자로 돌아왔다. 야세르 아라파트를 타협적이라 비난하다가, 1998년엔 팔레스타인 당국에 붙잡혀 2개월 동안 갇힌 적도 있다.
가자 시내에 있는 그의 집은 이웃건물들과 다닥다닥 붙은 데다 복잡한 내부구조를 지닌 4층 건물 가운데 2층이었다. 이스라엘 군이 그의 집을 미사일로 공격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란티시 자신도 그가 이스라엘 군의 '표적 사살'(targeted killing)에 희생당하지 않으려 조심하고 있었다. 자동차도 수시로 바꿔 탄다고 밝혔다. 팔레스타인 '배반자'들이 그가 타고 다니는 차량을 이스라엘 군에 알려, 헬기로부터 미사일 공격을 가해올 가능성에 대비해서였다. 2000년9월이래 지금껏 이스라엘 군이 아파치 헬기 미사일 등으로 암살한 팔레스타인 저항운동가는 최소한 150명, 길 가던 행인 60명쯤이 덩달아 미사일에 맞아 희생됐다.
란티시는 자살폭탄을 '순교작전'(martyrdom operation)이라 주장했다. 자살폭탄 공격이 억압자이자 중동의 군사강국인 이스라엘에 대한 '약자의 저항수단'이라는 논리였다. "샤론과 유대인들은 우리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목 조르고 (봉쇄정책으로 경제적으로) 매말려 죽이려 들고 있다. 자살폭탄 공격은 우리가 지닌 유일한 저항 수단이다. 이스라엘 군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하는 잔혹 행위를 보라. 탱크와 아파치 헬기를 앞세워 팔레스타인 난민촌들을 파괴하고 부녀자들을 포함한 비무장 민간인들을 거의 날마다 죽이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예루살렘이나 텔아비브에서 벌이는 폭탄공격은 이스라엘이 벌이는 잔혹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대응일 뿐이다"
비전투원인 일반시민들이 폭탄공격의 희생이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지적하자, 란티시는 손을 내저으며 반론을 폈다. "우리의 순교작전은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점에서 원시적인 것으로 비쳐질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시민들은 모두 군인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남녀 할 것 없이 3년 군복무를 하고, 다시 예비군으로 1년에 1개월씩 총을 쥐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이는데 나서고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쪽 어린이들이 하마스의 폭탄공격에 죽고 다치는 부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 란티시를 만나기 앞서 인터뷰했던 하마스 '정신적 지도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은 이 물음에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유대인 어린이들이 인티파다에 희생당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 부분은 나로서도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군의 무차별 폭격에 우리 팔레스타인 어린이와 여인들도 많이 죽고 다쳤다. 희생자 숫자만 놓고 말한다면, 팔레스타인 쪽이 훨씬 많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자와드 알-티비 팔레스타인 보건장관이 밝힌 바에 따르면, 2000년9월 팔레스타인 인티파다가 시작된 뒤 올해 3월까지 42개월 동안 이스라엘군의 전투기 폭격, 탱크 포격 등으로 숨진 팔레스타인 인은 모두 3천45명. 이 가운데 18세 이하는 6백51명이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 정부 발표에 따르면, 이스라엘 희생자는 2000년 9월부터 지난 2월까지 41개월 동안 9백34명. 이 가운데 5백84명이 자살폭탄공격에 숨졌다. 지금까지 희생자 비율은 이스라엘 희생자 1명에 팔레스타인 희생자 3.25명 꼴이다.)
란티시는 "우리의 대(對)이스라엘 투쟁은 테러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가하는 테러에 대한 저항일 뿐"이라 거듭 주장했다. 란티시의 이같은 말은 야신의 '테러 균형론'을 떠올렸다. 야신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저항이 테러라 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국가테러에 대한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란 논리를 폈다(필자의 <뉴욕통신> 제29회 '내가 만난 야신에 바치는 弔辭' 참조 바람).
하마스의 조직은 정치부문과 군사부문으로 나뉘어 2원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하마스 군사부문은 '에제딘 알 카삼' 여단으로 일컬어진다. 란티시의 설명에 따르면, 5인 정치위원회 간부들은 '에제딘 알 카삼' 여단의 자살폭탄공격 세부계획에 개입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공격시점을 언제로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위원회라 밝혔다. 란티시는 "폭탄공격을 지원하는 젊은이들이 인티파다 뒤 줄을 서있을 정도로 많다"고 밝혔다.
***역사발전 믿는 란티시의 낙관론**
1년 뒤인 2002년5월 두 번째로 란티시를 만났을 때, 하마스 정치집회 장면을 찍은 사진을 몇 장 건네자 그는 매우 기뻐했다. 인티파다 기간 중 이스라엘의 봉쇄정책으로 가자지구의 경제상황이 어려워지고 갈수록 희생자가 늘어난 탓인지, 그는 "우리는 힘겹게 투쟁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하마스의 무장력은 강력한 이스라엘 군에 비하면 매우 제한적이다. 하마스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이 이스라엘과의 유혈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 하마스 정치위원 란티시는 뜻밖에도 낙관적이었다.
란티시를 인터뷰하기 바로 앞서 만났던 또 다른 하마스 정치위원이자 직업이 의사인 무하메드 알-자헤르와 마찬가지로, 란티시는 역사적 경험들을 희망의 근거로 꼽았다. "비록 군사력이 약해도 독립의지가 강한 민족이 끝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20세기 현대사가 잘 보여 준다. 1973년 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 1962년 알제리에서의 프랑스군 철수, 그리고 2000년 남부 레바논에서의 이스라엘군 철수가 그러하다. 마찬가지로 하마스의 투쟁은 지금은 힘들더라도 언젠가는 결국 승리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역사는 발전한다"
란티시는 그가 그토록 바라던 '승리의 날'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는 요르단 아카바 3자 중동 평화회담 바로 뒤인 2003년 6월10일 이스라엘 군 헬기가 쏜 미사일에 부상을 입은 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었다. 그러나 이번엔 피하지 못했다. 민족자존의 횃불을 밝히며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염원하던 한 팔레스타인 저항운동가는 그렇게 갔다. 2000년9월이래 타오른 중동 유혈투쟁의 불길은 하마스 지도자 야신과 란티시의 잇단 죽음을 계기로 '대폭발'로 가는 모습이다. 앞으로도 많은 희생이 따르겠지만, 그 유혈투쟁의 과정은 앞서 란티시가 믿었던 것처럼 '역사 발전' 과정의 진통일 것으로 여겨진다.
*필자 연락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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