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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운이 감도는 외환시장, 980선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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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전운이 감도는 외환시장, 980선 공방 [이봉현의 경제스케치] 일전불사 외치는 외환당국과 환투기세력
외환시장에 일대 전운이 감돌고 있다. 전투가 벌어질 전장은 980고지. 달러 당 980원 아래로 뚫리느냐 막느냐를 놓고 격전이 예상된다. 이것이 올해 상반기 환율 움직임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맞서는 상대는 외환 당국과 환투기 세력. 아직 투기세력의 실체와 의도는 안개 속에 있다. 다만 지난해 12월 중순부터 외국 투자은행 등 역외세력이 집중적인 달러 매도(원화 매수)로 환율 급락에 시동을 걸고 연초에는 국내 수출기업과 은행들이 가세하고 있어, 그만큼 투기세력의 기세가 만만치 않게 불어나 있다.

***"980선이 무너지면 950원까지 바로 밀릴 수 있다"**

왜 하필 980원에서 맞붙으려 하는 것일까? 이유는 980원이 무너지면 950원으로 바로 밀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엔 기업들이 환위험 헤지를 위해 사들인 녹아웃(knock-out) 달러 매도 옵션이 작용하고 있다. 지난해 말 수출기업들은 장래에 환율이 하락하더라도 손해를 덜 볼 수 있도록 1030원 등 일정한 가격에 달러를 팔기로 하는 헤지계약(풋옵션)을 은행들과 맺었다. 그런데 헤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환율이 어떤 가격으로 한번만 오르거나 떨어지면 자동으로 계약이 무효가 되는 녹아웃 조건을 넣었다.

그런데 이 옵션의 하단 가격이 980~985원에 대거 몰려 있다. 환율이 이 선을 한 번이라도 건드리면 옵션은 사라지고, 기업과 은행들은 새로 달러 매도 헤지에 나서야 한다. 연초에 환율 하락이 가속화된 것도 각 가격대에 포진한 이 녹아웃 옵션의 영향이 적지 않았는데, 환율이 985원에서 980원을 훑고 내려가면 최대 수십억 달러의 매물이 추가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단기에 이렇게 많은 달러가 시장에 쏟아지면 막아낼 장사가 없다.

통화옵션 전문가인 강건호 한국씨티은행 옵션팀장은 6일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980~985원이 무너질 경우 환율 하락세가 급격해져 950원까지 하락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950원이 되는 것은 환율이 확실히 세 자릿수에 안착한 것을 의미하며, 단기에 이렇게 급락한 환율이 성장이나 국제수지에 미치는 영향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이런 점에서 980~985원은 한국전쟁 당시 철원평야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두고 열흘 사이에 주인이 24번이나 바뀌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백마고지와도 같은 지점인 셈이다.

***역외세력, 당국이 쳐놓은 부비트랩 확인 후 공격**

전투는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주에 환율은 이미 8년 만의 최저인 987원대(종가기준)까지 내려왔다. 장중에 985원도 찍었다. 녹아웃 옵션 가격대까지는 10원도 채 남지 않은 것이다. 한 국책은행 딜러는 "당국이 980원을 막으려면 미리 막아야지 981~982원에 가면 못 막는다"고 말했다. 이번주에는 대외여건까지 환율 하락에 힘을 싣고 있다. 6일(현지시각) 발표된 미국의 비농업 고용지표가 경기둔화의 징조를 보여줌에 따라 엔/달러 환율이 114엔대로 하락했다. 아시아권 통화가 지난주에 이어 달러에 대해 강세를 이어가는 가운데 원/달러 환율도 주초부터 강한 하락 압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980원을 사이에 둔 전투에서 역외가 어떻게 나올지가 관건이다. 최근 환율이 1000원과 990원을 잇따라 깨고 내려선 데는 역외뿐 아니라 국내 수출기업, 은행들이 함께 달러 약세에 배팅했기 때문이란 게 대체적인 의견이다. 역외가 3일 6억5000만 달러를 대거 순매도하며 하락의 불을 댕겼다면 급락의 추진력을 제공한 것은 서둘러 매도에 나선 기업과 은행들이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역외세력이 지난해 12월 이후 긴 호흡을 갖고 원화 강세에 배팅을 했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고, 이것이 맞는다면 980원에 쳐진 방어선 앞에서 쉽게 물러나지는 않을 것으로 봐야 한다. 국내 은행은 10원만 예상을 빗나가도 바로 포지션을 되감지만, 한번 공세를 취한 역외는 목표한 가격대에 이를 때까지 계속 밀어붙인다는 것이다. 즉 이번 전투에서 당국이 맞서야 할 가장 힘든 상대는 역외라는 얘기다.

한 시중은행 딜러는 "최근의 환율 급락은 역외가 사실상 주도한 것"이라며 "외국계 투자은행에서 헤지펀드를 끼고 한 곳 당 수십억 달러씩 내다팔았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말 환율이 1030~1040원일 때부터 역외의 움직임이 시작됐다"고 덧붙였다. 한 선물회사 분석가는 "이들 역외의 1차 타킷은 980원 선이고 궁극적인 목표는 950원 선인 듯하다"며 "이들은 먼저 원화 강세에 투자하라며 보고서로 바람을 잡아놓고 나서 물량을 많이 가진 수출업체를 끌어들이는 방법을 쓰는데 지금 2단계까지 진행됐다"고 말했다.

그는 "환율이 980원을 치면 수출업체들의 매물이 쏟아져 나오고 그 밑에서 역외가 이익을 실현할 것"이라며 "당국이 용을 쓸수록 뼈가 부러지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시장에 쳐진 부비트랩을 확인한 뒤에 밀어붙이는 형국이라서, 지금 장세에는 이미 투기세력의 '기술'이 작용하고 있다는 게 이 분석가의 판단이다.

***당국, 실탄은 충분하지만 언제 쏠 건지는 고민**

수비를 맡은 당국은 때를 기다리는 듯하다. 지난 6일엔 재정경제부, 한국은행 등 관련 당국이 대책회의까지 열고 환투기 세력에 경고도 보냈지만, 정작 시장에 강하게 개입하지는 않았다. 내놓은 대책도 해외 부동산투자 한도 철폐와 같이 장기적으로나 효과를 낼 수 있는 것뿐이었다. 당국이 섣불리 개입하지 못하는 것은 현재 시장상황이 원화의 강세라기보다는 달러의 약세라는 성격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화뿐 아니라 대만 달러, 타이 바트, 싱가포르 달러 등 아시아 통화들이 모두 강세인 상황에서 원화의 흐름만 돌리겠다고 시장에 들어가면 투기세력에 매도의 기회만 줄 수 있다. 당국은 역외가 원화를 주 베팅 대상으로 삼은 것도 인정하기를 꺼리는 모습이다.

하지만 대내외 여건이 환율 상승에 유리하게 조성되거나 환율이 임계점에 이르면 당국도 어쩔 수 없이 강력한 대응을 하고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광주 한국은행 국제국장은 평소에 "시장은 자율에 맡기되 투기적 움직임에는 단호하고 결정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한번 시장에 들어가면 스무딩오퍼레이션(미세조정)이 아니라 가격수준을 바꿔놓음으로써 투기세력의 씨를 말리겠다는 뜻이다. 외환위기 때와는 정반대인 달러 매수 개입에서는 한은이 발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뒷돈(재원)이 무한하다는 게 당국의 얘기다.

당국은 그간 시장에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해왔다. 한 은행 딜러는 "시장에 겁도 줘야 하고 논리를 세워서 강력한 인상도 줘야 한다"며 "개입의 기대만 줬다가 밀리면 약발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다른 은행 딜러는 "개입을 한다면 손절매를 이끌어낼 만큼 강력한 언와인딩(환율 끌어올리기)이 있어야 한다"며 "국내은행과 달리 역외는 10~20원의 조정 갖고는 눈도 꿈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외환당국이 특정 환율수준을 정해 놓고 방어하는 것은 과거에 경험했듯이 성과도 없이 투기세력에게 이익만 안겨줄 공산이 크다. 또 우리 수출업체들의 비가격 경쟁력이 그동안 높아져, 환율 하락이 반드시 수출에 악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공감대도 넓어지고 있다. 그간의 환율정책은 수출을 위해 내수를 희생시키는 측면이 있었다. 또 달러 약세는 미국의 금리인상 사이클이 마감되고 쌍둥이 적자 문제가 다시 부각되면서 나타나는 세계적인 흐름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는 환율을 시장의 흐름에 맡겨 놓는 게 좋은 정책이다. 하지만 980원 선의 하향 돌파가 낳을 여파는 그냥 지켜보기엔 너무 커 보인다. 당국과 외환시장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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