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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마지막 시선은 도대체 어디를 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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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마지막 시선은 도대체 어디를 향했을까" [화제의 책] 故 문순홍 박사의 두 권의 유고선집
2005년 2월에 두 개의 부고가 거의 동시에 전달됐다. 오랫동안 암으로 투병하시던 문순홍 박사와 먼 타지에서 불의의 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신 임길진(前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교수의 문상을 동시에 가게 되었다. 젊은 시절에 겪었던 나의 대인기피증이 남긴 상처 때문인지 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기피하고,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강박증에 가깝도록 꺼리는 편이다. 더군다나 문상은 거의 가지 않는 편이지만 이 두 분의 마지막 길에 잠깐 얼굴이라도 비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되어 아주 조용히 인사를 드리러 갔었다.

문순홍 박사의 마지막 길은 조용하고 간결하였고, 평소의 정갈함이 왠지 마지막 길에서도 보이는 것 같았다. 어느 문상이든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문상 길에서 허전함과 아쉬움이 지워지지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이론가의 길을 걸어가고자 했던 한 학자가 눈을 들어 어딘가의 길을 찾고자 했는데, 미처 그 눈길이 '파라다이스'나 '종착지' 혹은 '위안지'를 찾지 못한 마당에 갑자기 병마가 찾아든 상황을 생각해보면 지금도 마음이 편치 않다.

도대체 그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던, 이론가로서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생전의 선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던 그 시선의 끝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그 어느 종결점을 향하고 있던 것인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생태주의를 다양한 사회적 담론체계와 접목시키고자 했던 한 학자의 이론적 꿈은 그렇게 미처 꽃 피지 못하고 질문만을 남겨놓은 채 미궁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학자에게 육체적 나이가 뭐가 중요하겠느냐 하겠지만 그래도 50줄을 넘기지 못하고 그야말로 병마에 의해서 붓을 꺾어야 했던 생태여성주의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등 본격적인 생태주의 이론가의 길을 걸었던 한 학자의 뒤안길은 너무 쓸쓸했다. 한국 사회가 앞으로 큰일이라는 목소리를 들었던 게 불과 한 달 전 같이 생생한 임길진 교수의 부고와 겹쳐서 2005년 2월은 앞으로 닥쳐올 변화를 예견케 하는 것 같아 무겁기만 했다.

***'생태', '환경' 강조하면서도 사회는 더 '반생태적'이 되는 역설**

그리고 1년여가 지나 '문순홍 유고선집'이 후학들의 정성으로 두 권으로 묶여 나왔다. 〈생태학의 담론〉(아르케 펴냄)과 〈정치생태학과 녹색국가〉(아르케 펴냄)의 두 권의 책은 문순홍 박사의 미발표 논문과 유고들을 재구성한 것인데, 책을 받아 집에 돌아와서 한 자리에서 두 권을 모두 읽어 내려갔다. 참고로 문순홍 박사의 필체는 많은 정치학 관련 국내 저술들이 그렇듯이 매력적인 문체를 가지고 있거나 수려한 본인의 주장을 가지고 있는 책들은 아니다.

평소 같았으면 약간은 따분하게 읽어 내려갔을지도 모르는 문순홍 박사의 논문들을 한 번에 읽은 것은 도대체 '인간 문순홍'의 시선이 어디에 마지막으로 꽂혀 있었을까, 하는 1년 전의 궁금증을 풀어보기 위해서였다. 만약 지금 문순홍 박사가 우리에게 한 마디를 할 기회가 생긴다면 어떤 한 마디를 할 것인가? 혹은 남아 있는 후학들에게 당부를 한다면 어떤 당부를 할 것인가?

21세기가 시작된 지도 이미 6년째인 지금에 와서 '생태'와 '환경' 담론의 의미를 꼼꼼히 따져보는 것은 한국 사회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러 글에서 문순홍 박사가 공들여 지적하고 있듯이 생태적인 사유와 사회체계에 대한 질문과 반성 그리고 그에 기반을 둔 사회로의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채 '환경'만이 강조된다면 '환경산업'이 창궐해 결과적으로 오히려 '반생태적 사회'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지적은 이미 우리 주위에서 충분히 징후가 드러나고 그 형태를 드러내고 있다.

새만금 간척 사업에 붙은 '세계적 친환경 간척지'라는 타이틀이나 '복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청계천 도시 조경 사업의 경우가 그 대표적 예일 것이다. 산업화된 폐기물 소각장이 오히려 자원의 재생과 순환을 가로막게 되는 여러 사업들은 이미 익숙한 사례가 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문순홍 박사의 지적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들에 대한 단초가 되는 최초의 질문들이 이미 1990년대 초기에 문순홍 박사에 의해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90년대 생태주의 이론화 틀 닦는 데 기여하다**

유고선집 1권인 〈생태학의 담론〉은 '근본 생태주의(Deep Ecology)'라는 말을 대중화시킨 안 네스에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로 유명해진 슈마허, 그리고 사회생태학의 머레이 북친 등 초기 생태주의 담론의 여러 갈래들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김지하의 생명론의 기본 특징과 구성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생태주의의 질문이 민주주의나 시민사회의 의사결정 문제 혹은 생태사회주의나 생태마르크스주의와 어떠한 방식으로 접목되고 분화하게 되는지에 대한 사상사적 흐름을 이해하고 싶다면 이 1권을 읽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일 것 같다.

유고선집 2권인 〈정치생태학과 녹색국가〉는 문순홍 박사의 대표 브랜드라고 할 수 있는 "녹색국가와 국가의 녹색화"에 대한 질문과 함께 민주주의 담론 속에서 어떻게 생태주의가 상호결합 혹은 보완되는가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을 담고 있다.

1권이 사상사에 해당한다고 한다면 2권은 문순홍식 '정치생태학'의 이론적 전개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한국에서 꽃을 피우게 된 '시민사회의 담론'에 생태주의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고, 이 속에서 소위 정치생태학이라는 분과가 어떠한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아나가게 되는지에 대한 보다 생생한 논리 전개가 2권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마지막 시선은 어디를 향했을까?**

이 두 권의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다시 질문했다. 자 그렇다면 문순홍 박사의 마지막 시선은 과연 어디를 향하였을까? 생태주의적 시각을 결여한 한국 사회에 대한 경고일까, 아니면 대한민국이 새롭게 진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녹색국가'라는 개념 속에서 제시하고자 한 것일까, 아니면 전혀 알 수 없는 또 다른 이론적 길을 미처 전제하지 못한 것일까?

분명히 문순홍 박사는 생태주의의 한 주축인 무정부주의 혹은 극단적 자율주의보다는 다양한 토론과 협의과정을 통해서 시민사회가 민주주의적 거버넌스(협치)를 통해 소위 "녹색국가"로 가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떤 힘 혹은 주체에 의해서 그리고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 이러한 이상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

2권의 마지막은 여성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온 세상'이라는 지구생태계의 상징적 기대감을 표시한 두 개의 글로 마감되어 있다. 이건 새로운 길을 찾아나갈 수 있는 단초일 것이다. 나는 두 권을 읽고 나서 마치 한 권이 더 뒤에 따라붙어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왠지 자본론 3권을 읽고 나서 예언서 같은 4권이 있을 것 같은 아쉬움에 빠졌던 것과 비슷한 느낌인 것 같다.

그러나 마치 있을 것 같은 3권은 세상에는 없다. 그래서 문순홍 박사가 우리 곁에 더 이상 없다는 것이 새삼 더 아쉬워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여성운동의 이론에서 제시하듯이 '끼어들기'와 '새판 짜기'라는 익숙한 용어로 생각해본다면 '새판은 무엇인가' 혹은 '어떻게 짜여야 한다'는 아직 우리나라의 생태주의 이론이 가보지 않은 그 영역 어디엔가 문순홍 박사의 시선이 닿았던 것은 아닐까라는 아쉬운 생각으로 있지 않은 3권을 자꾸 더듬어보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생태주의에 대한 논의는 분명 1990년대 문순홍 박사의 선구자적인 걸음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책 두 권을 덮고 나서 새로운 질문이 생겼다. 이 비어 있는 듯한 세 번째 책을 채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기다림은 설렘이라, 젊은 10대나 20대가 행동으로 그 세 번째 책을 채울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을 가져본다.

이론과 행동에 무슨 나이가 필요 있으랴! 짧고 깊게 활동하고 우리를 떠난 문순홍 박사의 삶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 채워지지 않은 마지막 질문에 답할 새로운 세대와 새로운 형태의 영웅의 도래, 그 대목이 어쩌면 문순홍 박사의 시선이 정말로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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