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들은 큰 지진이나 해일을 미리 알아채고 이상행동을 보인다고 한다. 인간에게는 이런 감각이 없지만, 돈이 오가는 금융시장이나 상품시장에서는 다른 모양이다. 경제의 국면이 바뀌는 희미한 신호를 포착해 기민하게 움직이는 시장의 감각은 동물의 지진 예지 능력에 비견할 만하다.
롤러코스터 탄 듯한 시장
지난주 세계의 금융ㆍ상품ㆍ자산시장은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에 탄 듯 멀미를 겪어야 했다. 국내 코스피지수는 전주 말에 비해 72.91포인트(5%)나 하락했다. 미국 다우지수는 한 주 동안 2.1%, 나스닥은 2.2% 하락했다. 코스피지수는 11일 고점(1464.7) 대비 100포인트 가까이 빠졌고, 다우지수는 하루 낙폭으로는 3년 만의 최대폭 하락을 기록하기도 했다.
상품시장에서 금값은 23년 만에 주간 낙폭으로는 최대폭으로 떨어졌고, 19개 상품(1차산품)으로 구성된 로이터CRB 지수의 낙폭은 25년 반 만에 가장 컸다. 원/달러 환율이 하루는 10원 오르고 하루는 8원 내리는 등 요동을 쳤고, 국제 외환시장에서 달러에 대한 유로, 엔, 위안화의 환율 변동도 두드러졌다. 오르기 시작하던 미국의 장기금리는 지난주에는 작년 9월 이후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미국 주택경기가 냉각되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부동산 '버블' 붕괴에 대한 발언들이 부쩍 늘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18일 '안전벨트를 매라'는 사설에서 "우리는 예측하지 못했던 혼돈에 직면해 있다"며 "오랜 동안의 이례적인(unnatural) 고요함이 가고 광범위한 자산분야에서 변동성이 다시 찾아왔다"고 밝혔다. 이 신문은 "유일하게 안전한 가정은 변동성이 한동안 지속될 것이란 점"이라고 덧붙였다. 변동성이 확대되는 것은 무엇인가 불확실한 것이 부각되고 시장 참가자들의 생각이 갈리면서 시장심리가 불안해졌음을 보여준다.
경기둔화의 유령
그럼 시장의 눈에 어른거린 검은 그림자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경기둔화라는 유령이다. 전 세계적인 저금리-금융완화 정책의 효과로 2003년 이후 이어진 경기호조 국면이 정점에 다다랐고, 이젠 내려가는 길뿐이란 두려움인 것이다. 그렇지만 지난 1분기에 미국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전기 대비 연율로 4.8%의 고속성장을 했고 중국도 예상을 뛰어넘는 10.1% 성장률을 보였다. 일본과 유로지역도 회복의 흐름에 변화가 없는데 경기둔화를 걱정하다니 좀 성급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시장은 인플레이션이란 '박쥐'를 보고 경기가 어둑어둑해질 것으로 예감하고 있다. 미국 4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0.6% 오른 것으로 나온 18일 시장이 보인 '쇼크'는 이 점을 말해 준다. 그간 에너지나 상품의 가격이 사상최고치를 경신해도 중국ㆍ인도의 저가품 덕분에 잘 버티던 물가가 이젠 한계에 이른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이런 시장의 의구심은 금리의 움직임에 반영되고 있다. 미국 장기금리(10년물 국채)가 지난달에는 0.25%p나 올랐다. 단기금리를 올려도 별 반응이 없어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이 '수수께끼'라고 했던 장기금리가 인플레이션 우려가 나오자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장기금리가 최근 다시 낮아진 것은 연준의 대응과 그에 따른 경기침체라는 몇 수 앞 상황을 미리 보고 움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금리인상, 아직 안 끝났다
인플레이션이 염려될 때 연준의 선택은 사실상 금리를 올리는 '외길'뿐이다. 지난 10일 16번째로 금리를 올린 연준이 시장의 기대와 달리 '금리인상 기조가 끝나가고 있다'는 힌트를 주지 않은 것도 인플레이션 우려 때문이었다. '매파'로 분류되는 제프리 래커 리치먼드 연방 은행 총재는 18일 "지금 상황에서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것이 FRB의 주된 초점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시장은 6월 말 연준 정책회의(FOMC)를 포함해 한두 차례 더 금리를 올릴 가능성이 높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지난 3월 양적완화 정책을 폐지한 일본도 올해 하반기에는 금리를 올릴 것으로 보이고, 유로권이나 중국의 추가 긴축조처도 예상된다. 지난 몇 년 간 모든 상품의 가격을 부풀어 오르게 했던 풍부하던 국제 유동성이 빠르게 말라갈 수 있다는 얘기다. 미래에셋증권의 류승선 이코노미스트는 "그간 누적된 금리인상이 주택경기나 개인소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며 "현재 금리수준도 부담스러운데 연준이 물가를 잡겠다고 나설 경우 이는 명백한 '긴축'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지구촌의 숙제인 국제경제의 불균형과도 맥이 닿아 있다. 미국의 쌍둥이 적자와 아시아 국가들의 엄청난 외환보유액 누적이라는 불균형을 더 이상 방치하기 어렵다는 게 지난달 선진7개국(G7) 재무장관 성명에서 확인되면서 달러는 약세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달러 약세는 대체 투자상품인 원자재 가격을 밀어올리고, 미국인이 수입해 쓰는 물품의 가격을 올린다. 현재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구조적이라기보다는 달러약세에 따른 '순환적' 인플레라는 시각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금융연구원 이윤석 연구위원은 "중국 위안화가 절상되면 내수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한 중국 기업은 결국 수출단가를 올릴 수밖에 없다"며 "이는 그간 세계가 누리던 '중국발 디스인플레'의 혜택이 줄어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몇달 간은 민감한 시기
연준이 금리를 올리더라도 공세적인 인상은 어려울 것이란 게 시장의 대체적인 예상이다. 하지만 '인플레이션 파이터' 역할을 자임하는 중앙은행이 경기의 고점 부근에서 물가에 과잉 대응해 경기를 급랭시킨 적이 많았다는 것을 시장은 잊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금리에 민감한 주택경기가 추가 금리인상으로 한층 빠르게 가라앉을 가능성이 있다. 주택경기는 2000년 정보기술(IT) 거품이 꺼진 뒤 미국 경기를 살린 주역이었다. GDP에서 주택관련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5%에 이른다. 주택경기가 '경착륙'하면 미국의 소비는 급격히 줄게 된다. 이럴 경우 미국에 수출해 먹고 사는 동아시아 국가들 역시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다. 세계가 동반침체의 늪에 빠지는 것이다.
세계경제는 앞으로 몇 달 간 변수가 많고 민감한 시기를 지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성장과 인플레이션, 금리와 환율, 자산가격 등 여러 요인들이 맞물려서 변동성을 크게 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연준이 협곡을 비행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정책당국의 운신 폭은 좁다. 국내에서도 5%인 올해 성장률 예상치를 하향조정해야 할지, 콜금리를 올릴지 말지에 대한 논의가 한층 더 분분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번주에는 25일 미국의 1분기 GDP 잠정치가 발표되고, 26일에는 연준이 인플레이션 측정지표 중 가장 유심히 본다는 근원 개인소비지출(PCE) 물가지수 4월치가 발표된다. 환절기에는 일기예보를 잘 들어야 하듯이, 요즘은 경제지표 하나하나를 중요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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