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서민경제 회생'의 전제는 한미FTA 저지입니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서민경제 회생'의 전제는 한미FTA 저지입니다

[한미FTA 뜯어보기 40] 열린우리당 김근태 당의장께 보내는 공개편지

FTA라는 환상

당의장이라는 공식 직함을 갖다 붙이니 영 딱딱하군요. 하지만 많은 분들과 함께 읽는 편지라 생각하고 사적인 얘긴 되도록 삼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정부의 한미 FTA 추진이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결국은 국민이 한미 FTA를 막아내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민초가 받을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게 정치지도자의 의무가 아닐까요? 특히 김 의장께서 경제학을 전공한 분이라는 데 또 한 번 희망을 걸어봅니다.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매체에서 얘기를 했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한마디로 수출과 투자에 대한 효과는 미미하거나 나쁜 쪽으로 나타날 것이고, 양극화는 극단으로 진행되리라는 겁니다. 이 점은 나프타 12년 동안 멕시코에서 마킬라도라 효과에 힘입어 그나마 수출과 외국인투자가 급증했지만, 살리나스 전 대통령의 약속과 달리 오히려 양극화가 심화한 것과도 대비되는 것이죠. 지난 6월 3일 KBS 스페셜을 보셨다면 눈으로, 또 가슴으로 확인하셨겠지만 양극화의 실태는 다음 그림으로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 제조업 생산성과 노동비용(연간 누적변화율, %, 1993~2002.6). 자료: J.W.Foster and J.Dillon, "NAFTA in Canada : The Era of a Supra-Constitution", KAIROS, p3.

나프타를 맺은 세 나라 모두 제조업 생산성은 올라갔지만 실질임금은 오히려 하락했습니다. 경제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나프타 이후에 관련 국가의 전체 국민소득은 증가했겠지만 노동자들에게 돌아간 분배 몫은 줄어들었다는 걸 금방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생산성 향상이 많은 나라일수록 실질임금 하락이 더 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고용 없는 성장'이 이뤄졌고, 그나마 증가한 고용도 '질이 낮은 고용, 예컨대 비정규 노동'으로 채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라 안의 지역 간 격차, 수출산업과 내수산업 간 격차는 더욱 심각합니다.

이런 현상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겪고 있는 일과 같기 때문이고, 또 김 의장께서 강조한 '서민경제'의 어려움도 바로 이 때문이니까요. 그런데도 명백한 사실을 호도하고 나프타가 성공적이었다고 강변하는 청와대와 정부 부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의 재경부 관리 중 일부는 '결과적으로' 1997년 금융위기는 보약이었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몇 가지 이데올로기적 주장들

한미 FTA에 관한 한 청와대의 국정브리핑과 이른바 '조중동(그리고 한나라당)'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라는 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대통령께서 그토록 원하던 '대연정'이 실질적으로 이뤄진 셈이죠.

우선 한미 FTA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구한말의 쇄국론자로 모는 주장부터 기가 막힙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우리의 무역의존도는 70%에 달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럽의 몇몇 소국을 제외하곤 최고 수준입니다. 미국, 그리고 무역의존도가 높을 것으로 그들이 지레 짐작하는 일본은 10% 후반대에서 20% 초반대를 오르내리는 것에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높은 숫자입니다. 또한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에서 공무원들이 외자유치를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자는 것이 쇄국이라뇨? 쇄국이란 말의 뜻을 알고나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김 의장께서도 경제학을 공부하셨으니 잘 아실 겁니다. 무역의존도가 저렇게 높다는 것은 곧 내수가 지나치게 적다는 것, 따라서 국민의 삶의 질이 낮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제대로 된 경제학자라면 당연히 내수를 늘려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할 법합니다. 그런데 경제학 박사인 우리의 부총리는 오히려 더 개방을 해서 무역의존도를 더 높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FTA를 맺지 않으면 영원히 후진국으로 남을 것이라는, 박병원 재경부 차관의 대국민 위협은 더욱 가관입니다. 세계의 FTA 체결 현황을 볼 때 중남미 나라들은 평균 7개, 아프리카 나라들은 평균 5~6개, EU가 평균 3~4개, 동아시아 나라들이 평균 2개의 FTA를 맺고 있습니다. 1인당 경제성장률이 낮을수록 FTA를 많이 맺고 있다고 주장해도 무방합니다. 적어도 FTA의 갯수와 경제성장률은 전혀 무관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1개의 FTA를 맺은 선두주자 멕시코가 무역수지 적자와 낮은 성장률에 시달리다 결국 FTA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걸 박 차관이나 경제보좌관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까요?
▲ 자료: Penn World Tables, EPI Issue Brief (2005년 10월 25일).

심지어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낡은 일본형 시스템을 버리고 미국형으로 우리 경제를 개조하자고 무지에 찬 신념을 국민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미국과 가까운 덕에, IMF가 요구한 개방화/자유화를 통해, 그리고 그 완성태로 미국과의 FTA를 통해 미국형 경제시스템을 백분 받아들인 라틴아메리카와 동아시아 국가들 간 성장률 격차의 확대를 그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까요?

미국 FTA의 특징 - 상대 나라의 제도와 법을 다 바꿔라

사실 우리 국민은 물론, 정치권이나 심지어 경제학자들도 FTA에 관해 잘 모르고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에 약 200여 개의 FTA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실제로 WTO규정("실질적으로 모든 교역의 개방")을 만족시키는 것은 10분의 1도 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FTA는 우리도 수없이 맺고 있는, 특정 분야에서의 경제협력 협정에 불과하고 따라서 구속력도 약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겁니다. 그러니 이런 숫자에 현혹되어 초조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과의 FTA는 다릅니다. 미국이 양자 간 FTA에 적극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입니다. 우루과이라운드로부터 시작된 다자간 협정이 지지부진하고 한편으로는 EU 등 선진국, 다른 한편으로는 개도국들의 반대로 자신들의 주장이 쉽사리 관철되지 않는 가운데 야심적으로 밀어붙인 FTAA(전미자유무역협정, 나프타를 중남미 국가들에게까지 확대하려던 것)가 수포로 돌아가자 당시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였던 로버트 죌릭(현 국무부 부장관)은 "경쟁적 자유주의(competitive liberalism)"를 들고 나옵니다.

그는 아주 명석하고 직설어법을 구사하는 사람입니다(제가 보기에 미 정부 내에서 가장 지적인 이 사람의 말은 외교안보 면에서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나프타 공식문건에서도 애매하게 표현하거나 부정했던 미국의 의도를 명시적으로 밝혔습니다. 미국은 나프타를 통해 '상대방 나라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지지'하고, '각종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겁니다. 즉 미국 FTA는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개방화, 민영화, 금융긴축)를 상대국에 압박하는 수단이기도 한 것입니다.

앞에서 IMF 구제금융과 나프타의 효과가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만, 죌릭은 그게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죠. 아니나 다를까 최근에 발표된 미 의회 조사국(CRS)의 보고서(5.24)는 한국과의 FTA가 '경쟁적 자유주의'의 시범 케이스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p6).

또한 미국의 FTA 정책은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FTA, 즉 나프타보다도 더 포괄적이고 강한 FTA를 하는 겁니다. CRS 보고서 역시 솔직해졌습니다. 미국의 FTA에서 관세나 쿼터는 가장 덜 중요한 이슈에 속합니다, 오히려 미국 FTA는 경제행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규제, 정책, 그리고 관행에 초점을 맞춘다고 공언합니다(p5). 즉 관세 등 국경 상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 나라 국경 안의 제도와 법률, 관행을 바꾸겠다는 겁니다.

이들은 한미 FTA에서 최초의 요소들(generic elements)을 도입하겠다, 즉 여태 구경도 못한 혁신적 조항을 담겠다고 강조합니다. 미국이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이른바 신이슈로 알려진 무역관련 지적재산권(TRIPS), 무역관련 투자(TRIMS), 서비스교역(GATS)입니다.

미국이 신이슈에 집중하는 것은 물론 미국 산업이 이 세 분야에서 압도적 경쟁력 우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알려져 있는 것만 해도 서비스 교역에 WTO의 포지티브 리스트(명시한 분야만 개방)가 아니라 네거티브 리스트(명시하지 않은 분야는 모두 개방)를 적용한다든가, 무역관련 투자 조항을 나프타 이상으로 강화하는 것, 지적재산권의 보호 연한을 20년 더 연장하는 것 등 가히 충격적인데 이 외에 뭔가 '혁신적인 것'이 더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투자에 관한 장은 민주주의를 말살합니다

이들 항목을 낱낱이 지적하는 건 이미 다른 분들이 많이 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투자에 관한 장(chapter)에 관해서만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 '나프타 플러스'로 알려진 한미 FTA의 투자에 관한 장은 공개되지 않았으니 여기서는 나프타를 예로 들 수밖에 없습니다.

단도직입으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투자에 관한 장은 '주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치명적인 위협'입니다. 방금 작은 따옴표로 묶은 주장은 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가해 당사자라고 할 수도 있는 미국의 시민단체인 퍼블릭 시티즌(Public Citizen, 저 유명한 랄프 네이더가 시작한 단체입니다)이 만든 보고서의 제목입니다.

시민운동이라면 혀를 내두를 사람들을 위해서 다른 '온건한' 미국 사람들 얘기도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의회가 나프타의 11장(투자에 관한 장)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그들은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애브너 미크바, 전 미 연방법원 패널리스트, 뢰벤(Loewen) 케이스 나프타 패널리스트). 미국조차도 이 장이 어떻게 활용될지 충분히 짐작하지는 못했다는 얘깁니다.

"우리의 헌법 3조는 연방법원에 각 사건과 논란에 관한 결론을 내릴 권력을 부여하고 있다. 미국 의회는 이러한 법률적 권력의 '핵심(essential attributes)'을 다른 심판위원회(tribunal; ISCID나 UNCITRAL를 지칭)에 넘기지 않을 것이다." (산드라 오코너 미 연방대법원 판사)

이런 얘기는 미국 미시시피 주정부가 1994년 캐나다의 장례회사 로우언이 불법적, 반경쟁적 행위로 지역의 장례회사를 퇴출시키려 한다고 로우언을 고소하여 승소한 뒤, 로우언이 연방대법원에 제소했다 기각당하자 1998년에 다시 나프타의 기업-정부 제소권을 이용하여 반캐나다, 인종차별 등의 혐의로(나프타 1102조, 1110조 위반) 미국 정부를 제소한 사건(로우언 케이스) 때문에 나왔습니다.

결국은 우습게도 로우언이 외국인기업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다 하여 기각됐지만, 어쨌든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의 판결을 제3의 민간기구인 ISCID나 UNCITRAL의 심판위원회에서 내리는 건 위헌적이라고 하여 미국의 두 법률가가 반발하고 있는 겁니다.

나프타 11장은 온갖 독소조항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돈 되는 대상이라면 공기업이든 공공서비스든, 아니면 '투기'든 광범위하게 규정되는 투자의 정의에 따라 투자계획 때부터 내국민 대우를 해야 한다는 조항, 수용(expropriation), 나아가 수용에 해당하는 행위(measures tantamount to expropriation)를 현존하는 어느 법률보다도 관대하게 정의한 조항,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업이 정부를 제소할 수 있는 권리 등이 대표적인 독소조항입니다.

기업은 언제나 정부에 불만이 많기 마련입니다. 물론 국내 기업은 대부분 불만에 그치고 말겠지만 이제 외국인 대기업은 나프타라는 국제협정에 근거해서 그 나라 정부를 제소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초국적기업에 대한 투자 보장을 넘어 이윤 보장을 꾀하는 이러한 조항을 다자간 투자협정(MAI)에서 관철시키려다 프랑스 등 EU 나라들의 반대로 좌절되자, 이것을 FTA에 적용하여 전범을 만들어 다른 나라에도 전파하려는 것이 바로 나프타로 시작한 미국 정책의 핵심입니다.

캐나다의 위헌소송

2001년 캐나다의 시에라 법률구조기금은 캐나다 공공노동조합(CUPE)을 대표하여 나프타에 대한 위헌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나프타 11장 심판위원회의 비밀유지 조항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혐의였습니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그러나 심각한 문제점을 의식했던 이 제소는 2005년 1월 24일 캐나다 위원회(Council of Canadians)와 캐나다 우체노동조합(Canadian Union of Postal Workers)이 온타리오 대법원에 제기한 위헌소송으로 이어졌습니다. 세계적인 특송업체 UPS가 공기업인 캐나다 우체국(Canada Post)을 상대로 나프타 11장 및 15장 2조 및 3조(국가독점기업 및 국영기업은 나프타 11장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조항), 12장 2조 위반으로 소송을 제기한 데서 문제는 비롯됐습니다.

UPS는 캐나다 우체국이 소포와 택배 서비스에서 자신의 인프라를 교차보조(cross -subsidize)하는 데 이용함으로써 특별한 독점적 지위를 남용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편, 철도, 전기와 같은 망 산업에서 교차보조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경제학 교과서는 그러므로 공기업의 형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이 소송에서 UPS가 이긴다면 똑같은 논리가 거의 모든 공공 서비스에 적용되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통상교섭본부는 교육이나 의료 부문의 개방을 미국이 요구하지 않았다고 자못 자랑스럽게 선전하고 있습니다만, 언제든 시장이 성숙해서 돈이 될 때 미국의 어떤 영리법인도 정부를 제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겁니다. 예컨대 미국 보험회사나 병원은 한국의 건강보험 또는 당연지정제를 제소대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캐나다의 경우 신경독성 물질인 MMT의 반입 금지, 유독 쓰레기의 수출 금지, 수자원 보호가 모두 차별적 조항으로 제소됐고, 멕시코 정부도 쓰레기장 설치에 관한 인허가, 농업보조금 등의 이유로 제소를 당했습니다. 제소의 대부분이 환경, 건강, 공공서비스에 집중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제학에서 당연한 것으로 가르치는 바, 공공성의 파괴자가 벌금 등으로 그 비용을 치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정부를 제소하여 보상금을 받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그야말로 주권과 공공성의 침해이고, 이를 보장하고 있는 헌법의 위반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통상교섭본부와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마치 나프타 11장과 같은 내용이 누구나 받아들이는 국제기준인 것처럼 반박하고 있으니 정말 기가 찰 노릇입니다. 더욱이 판결문 자체는 11장, 12장, 또는 15장의 어느 조항의 위반 여부로 나올 수밖에 없음에도 마치 그렇기 때문에 환경권 등의 침해는 없었던 것처럼 주장하는 데 이르러서는 과연 우리 정부가 이 문제를 이해하고 있기나 한 건지 어안이 벙벙할 따름입니다.

심지어 이들은 한국기업도 정당한 권리를 가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훈계조의 지적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든 반덤핑 제소를 하고 상계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미국정부를 제소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겁니다. 나프타 협상 때 캐나다 정부는 만사를 제쳐놓고 반덤핑 제소, 상계관세 등 이른바 무역구제 조치의 기준을 엄격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나프타 이후에도 이런 무역분쟁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정부의 안이한 태도는 미국 정부/기업과 한국 정부/기업 간의 힘의 불균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얘깁니다. 실제로 2004년 말까지 한미 간 제소 42건 중 11건이 해결됐고 이 중 5건은 기업이 승소했고 6건은 기각됐습니다. 이긴 다섯 개의 기업이 모두 미국계이고 미국 정부가 아직 한 번도 패소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아직 표본이 너무 적으니 그냥 더 두고 봐야 알 수 있다고 뒷짐 지고 있는 게 과연 능사일까요?

진정 '서민경제'의 회생 원한다면 한미FTA부터 막고 볼 일

한미 FTA는 명백하게 양극화를 심화시킬 겁니다.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자며 사회권 등의 규제를 완화하고 공기업을 민영화한다면, 또 가뜩이나 심각한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극까지 추구된다면 사회적 약자들에게 피해가 집중되는 건 불을 보듯 뻔합니다. 더구나 기업이 정부의 제도를 대상으로 제소를 하고 그 판결을 제3의 민간기구가 비밀로 처리한다면 우리 국민의 주권은 산산조각나고 말 겁니다. 김 의장이 말하고 있는 서민경제의 회생이란 결국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실질적 민주주의의 심화일 겁니다. 그런데 한미 FTA는 바로 그 민주주의 자체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어떤 무엇보다도 한미 FTA를 저지하거나, 천보 만보 양보해도 투자에 관한 장 전체를 삭제하거나 최소한 기업의 정부 제소권은 삭제해서 EU처럼 정부와 정부가 분쟁을 처리해야 합니다. 한껏 양극화를 조장하고 나서 이를 다시 증세로 치유하겠다는 건 정말 바보짓입니다. 선조들은 이럴 때 쓰라고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는다'는 말을 만든 모양입니다.

양극화를 막고 동반성장을 촉진하는 정책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면상 정책목표와 정책의 원리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세계화, 금융화 시대에 성장과 분배가 맞물리면서 선순환이 일어나도록 하려면 자산에 대한 서민의 접근 기회를 높이고 동시에 현재 소유하고 있는 자산의 형태전환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선 부동산 가격의 상승은 서민의 자산접근 기회를 결정적으로 봉쇄합니다. 투기수요가 없어질 때까지 보유세를 강화하는 현 정부의 정책은 올바릅니다. 오히려 경제부처와 당 일부의 고질적인 '공급확대론'이 정책을 혼미에 빠지게 했을 뿐입니다. 공급곡선의 이동보다 더 빨리 수요곡선이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투기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한 어정쩡한 공급확대는 오히려 가격의 폭등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교육, 즉 인적 자산의 기초에 접근할 기회를 확대하는 정책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좋은 정책입니다. 현재처럼 특정 지역이 그런 기회를 독점하게 되면 그 나라는 머지않아 두 조각으로 갈라지고 맙니다. 실업자에 대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역시 양극화를 해소하는 정책입니다. 마이크로 크레디트 등 금융에 대한 접근기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산업의 클러스터화도 근접성에 의한 기회의 확대라는 점에서 같은 범주에 속하는 좋은 정책입니다.

이 모두 당의장께서 복지부 장관일 때 드린 '동반성장의 길'이라는 글에 들어 있습니다. 멀리 해밀튼 보고서를 뒤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하면 실행계획도 언제든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도 지금처럼 졸속으로 한미 FTA를 추진하는 한 제대로 시행할 기회조차 잡지 못할 겁니다. 100% 확실하게 정권이 넘어갈 테니까요.

모든 걸 시장에 맡기면 해결된다는 시장만능론은 잘 아시다시피 원래 한나라당의 전유물입니다. 특히 한미 FTA는 재벌-고급 경제관료-조중동 등 보수언론이라는 3각동맹이 자신의 사익을 위해 적극 추진하는 정책입니다. 재벌들은 한미 FTA로 기존의 규제가 풀어질 것이라 기대하고 경제관료들은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맹신에 빠져 있습니다. 보수언론은 이번이 다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일 뿐 아니라 방송을 손아귀에 넣을 기회로 보고 있습니다.

한미 FTA는 단순한 하나의 정책이 아니라 시스템 개조를 부르는 정책기조입니다. 엄청난 부작용을 몰고 올 외부쇼크 요법을 노무현 대통령이 대신 써준다 하니 한나라당 처지에서 이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열린우리당을 포함해서 이른바 '개혁세력'이 살려면 단호하게 한미 FTA를 저지해야 합니다. 물론 조중동 등 보수언론이 가만 있을 리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한나라당도 뒷짐 지고 침묵할 수만은 없을 겁니다. 한미 FTA를 명시적으로 지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겠죠. 다음 대선의 구도가 한미 FTA 찬반의 정책 논쟁, 그리고 그 외에 서민경제의 회복 방향을 둘러싼 논쟁으로 짜일 때 비로소 한나라당이 거저 정권을 줍는 불행의 길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김 의장 등 당 지도부, 이보다 훨씬 외연이 넓은 범개혁세력이 살 길입니다.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이 궁지에서 벗어날 길이기도 합니다. 한미 FTA의 부작용은 다음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할 겁니다. 그럴 때마다 전 대통령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고 급기야 청문회에 서야 할 지도 모릅니다.

모두 살 길을 놓아두고 왜 죽을 길을 찾아드는지 저는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추가성장이 필요하다, 한국형 신자유주의를 모색한다는 의장의 말씀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는 건 제가 지금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기 때문이겠죠.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보기에 의장께서는 근년에 항상 두 박자쯤 뒤늦은 결정을 해 왔습니다. 이번에도 이미 한 박자는 놓쳤습니다. 이제 결심을 할 시기입니다. 좌고우면하며, 더 이상 미룰 시간이 없습니다. 연말까지 한미 FTA를 졸속으로 해치우려는 세력, 더구나 EU 등과의 FTA까지 도박에 가까운 '동시다발적 FTA'를 추진하려는 세력이 엄연히 정부 안팎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한미 FTA가 체결되면 개혁세력이라 부르든, 아니면 민주화세력이라 하든 기나긴 동면을 하면서 추억 속의 훈장만 만지작거려야 할 겁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