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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책연구기관들의 '수치'와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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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책연구기관들의 '수치'와 '비애' [한미FTA 뜯어보기 527 : 릴레이 기고] FTA로 GDP 6%↑?…찬란한 실수 혹은 의도적 조작
학자들은 무엇이든 주장할 수 있다. 단, 그 주장의 근거가 합리적이고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정부 차원의 공식 보고서는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가 최대한의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 일부의 주장에 의존하지 않아야 하고, 과장하지 말아야 하며, 공인된 근거에 기초한 분석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정부라는 '국가'기관의 책임이며, 이것이 무시될 때 정부의 공신력과 국가라는 공동체의 자존심은 훼손되고 만다.

지난 4월 30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을 포함한 10여 개 국책연구기관들의 공동명의로 작성된 정부 보고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경제효과 분석'은 한국인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은 보고서다. 게다가 학문적 주장의 근거조차 없어 '조작'이라 해야 마땅한 보고서다.

이 보고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한미 FTA로 생산성이 증가한다'는 가정에 있다. '한미 FTA'라는 외부쇼크에다가 '생산성 증가'라는 또 한 번의 외부쇼크를 가해, 원래는 0.32%(표준분석 결과)였던 경제성장률 증가분이 6%로 뻥튀기했다. 고용도 33만 명 증가하는 것으로 뻥튀기됐다.

이뿐만 아니라 '대미 무역수지가 42억~73억 달러 악화된다'는 작년의 CGE(연산가능일반균형) 분석결과는 '매년 4.63억 달러 개선'으로 완벽하게 탈바꿈하기까지 했다.

한미 '생산성증대' 협정으로 탈바꿈된 한미 '자유무역' 협정

'한미 FTA로 생산성이 증대한다'는 가정이 과연 타당할까? 백번 양보하더라도 이는 △인과관계의 혼동 △근거의 부재 △계산의 중복 △수치의 조작 등과 같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국책연구기관들이 사용하는 분석 모델은 CGE라는 모델이고, 이는 GTAP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계산된다. 굉장히 어렵고 생소해 보이지만, 보통 사람도 1시간 정도만 공부하면 한미 FTA 효과를 대충 분석할 수 있게 설계된 프로그램이다. 단, 비싸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국책연구기관들을 중심으로 사용됐다.

간단히 이 프로그램의 작동원리를 설명하면, 먼저 분석자는 한미 FTA로 인한 정책변화, 즉 '관세 감축' 데이터를 집어넣는다. 그러면 그에 따른 무역, 생산, GDP, 후생 등의 변화 결과가 자동으로 계산돼 나온다.

그래서 첫 번째 할 일은 한미 FTA에 따른 정책 변화, 즉 정책 변수를 주입하는 것이다. 한미 FTA가 '자유무역' 협정이니 이 협정으로 일어나는 주요한 정책 변화는 당연히 '관세감축'이다.

그런데 국책연구기관들은 한미 FTA를 '자유무역' 협정인 동시에 '생산성증대' 협정으로 탈바꿈시켜, 관세감축에 따른 효과에 더해 또 하나의 정책변화로 '1% 정도의 생산성 증가'를 주입했다. 한미 FTA가 한국과 미국의 생산성 1% 증대를 확정하는 협정이 된 것이다.

물론 한미 FTA에는 그런 내용은 전혀 없고, 생산성을 인위적으로 증가시키는 협정은 가능하지도 않다. 관세감축을 통해 생산성이 증가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는 정책'변화'가 아니라 정책'효과'(과정이나 결과)다.

한미 FTA에 따라 다양한 법령이 개정되기 때문에 그 변화에 따라 생산성이 증대할 것이라고 주장하더라도, 생산성 증대는 법령 개정이라는 정책변화에 따른 정책효과에 불과한 것은 마찬가지다.

생산성 증대를 한미 FTA 경제효과 분석의 '원인'으로 계산하는 것은 무지막지한 일이다. 물론 그렇게 계산한 이유는 간단하다. 어마어마하게 좋은 수치가 튀어 나오기 때문이다.

근거도 없이 중복 계산한 효과

보다 합리적인 계산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미 FTA로 인한 관세감축 효과와 법령 개정에 따라 발생하는 생산성 변화를 '과정'으로 내생화하는 방법이 있다. 이 경우, 생산성 증대는 '정책변수'가 아니라 '중간경과'로 포착된다.

이를 위해서는 개선된 모델이 필요한데 현재 우리 국책연구기관들의 능력으로는 이런 모델을 만들 수 없다. 혹여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국책연구기관들이 '한미 FTA로 생산성이 증대한다'는 가정을 집어넣은 근거는 한미 FTA로 수입이 증가하거나 외국인투자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수입이 1% 증가하면 생산성이 0.19% 증가한다'는 것이 이들의 가정이다.

언뜻 봐도 무리한 가정이다. 수입 증가가 생산성을 증가시키기만 한다면야, 대한민국 경제가 나아갈 길은 확실하다. 모든 나라에 대한 관세를 즉시 철폐해 수입을 대폭 확대하는 것이 경제성장의 지름길이다. 그러면 즉각 생산성이 증가해 최소 10% 이상의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으니 말이다.

외국인투자가 증가하면 생산성이 증대한다는 가정은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실증분석은 여러 가지 상반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학계에서는 수입 증가와 외국인투자 증가가 생산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쟁이 한창 진행 중이고, 어느 쪽이 우위를 점했다고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렇다는 실증분석과 그렇지 않다는 실증분석이 나란히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학자'들은 한 쪽의 실증분석에 기대 한미 FTA로 생산성이 증대하고, 그 결과 GDP가 엄청나게 상승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의 공식 보고서가 그래서는 안 된다. 적어도 양쪽의 주장을 모두 소개하고, 각각의 가정에 따라 상반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 정부는 최대한의 객관성과 공신력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표준적 분석에 의해 계산된 '0.32% GDP 상승'에 이미 생산성 증가 효과가 반영돼 있다는 사실이다. 0.32%라는 수치는 수입 증가에 따라 부품 등 수입재 가격 하락, 경제구조의 효율화 등 생산성 증대 효과를 이미 반영해 계산된 것이다. 이 수치에 다시 생산성 증가라는 외부쇼크를 가하는 것은 명백하게 생산성을 중복 계산한 것이다.

"제조업 1.2% 생산성 증대"라는 '찬란한' 실수 혹은 조작

이 모든 이론적 문제점을 차치하더라도, 국책연구원들은 또 다른 큰 오류를 범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한미 FTA로 제조업 부문의 생산성이 1.2% 증가할 것이라고 가정했는데 이 수치를 도출한 근거 자체가, 실수든 조작이든, 왜곡된 것이다.

이번에 적용된 '제조업 부문의 생산성 1.2% 증가'가 어떻게 나온 수치인지는 작년 3월 KIEP의 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KIEP는 산업연구원(KIET)의 2000년 자료를 원용해, 수입이 1% 증가할 때 생산성이 0.19% 증가하고, 한미 FTA로 수입이 6.2% 증가하니까 총 생산성 증가분은 1.2%(0.19×6.2%)라고 계산했다.

그런데 이번 정부 보고서에는 한미 FTA로 수입이 1.6%만큼만 증가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작년 보고서에 비해 수입이 4.6% 줄어든 것이다. (수입 증가율을 되도록 적게 잡아야, 무역수지 악화를 숨길 수 있다.) 그렇다면 생산성 증가분은 1.2%(0.19×6.2%)가 아니라 0.3%(0.19×1.6%)가 돼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이번 보고서에서 0.3%의 생산성 증가분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는 엉뚱하게도 1.2%라는 '죽은' 수치가 그대로 들어갔다.

도대체 왜 이런 무리를 한 것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GDP 3%(20조 원이 넘는다)까지 좌지우지하는 생산성 증가분 0.9%(1.2%-0.3%)가 잘못 계산된 채 11개의 국책연구기관들의 공동명의로 보고서가 나온 것이다.

"서비스업 생산성 1% 증대" 가정은 더욱 가관

서비스업 부문의 생산성이 1% 증대할 것이라는 가정은 더욱 가관이다.

KIEP는 이런 가정을 집어넣은 근거에 대해 "미국 노동통계국의 공식통계에 의하면 1990~98년에 서비스업의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은 연평균 0.88%였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의 서비스업 생산성이 미국 연평균 생산성 증가율의 4분의 1로 증가한다고 가정하면 5년 동안 약 1%의 생산성 증대를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미 FTA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미국의 연평균 서비스업 생산성 증가율을 한미 FTA로 인한 한국 서비스업의 생산성 증가분으로 계산한 것이다. 도대체 미국의 연평균 생산성 증가분과 한미 FTA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또한 이들의 억지를 받아들여 '저 신비스러운 자유무역'으로 인해 한국 서비스업 부문의 생산성이 증가한다면, 한미 FTA의 또 다른 당사자인 미국 서비스업 부문의 생산성도 증가한다고 추론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번 보고서에서는 독야청청 한국의 생산성만 증가한다.

뚜렷한 '목표'를 먼저 세워놓고 이 목표를 맞춰 자료를 만들지 않고서야, 이렇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엉터리 보고서를 만들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대미 무역수지 개선과 GDP 6% 증가는 양립 불가능한 자가당착

한편, 작년 보고서와 달리, 이번에 대미 무역수지가 개선되는 것으로 결과가 나온 이유는 국책연구기관들이 무역수지를 계산하는 데에 있어서만큼은 CGE 분석 방법을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정부가 GDP, 고용 등의 효과는 CGE 분석 방법으로 계산하고, 무역수지만 다른 방식으로 계산한 것이다. "무역수지에 미치는 영향은 실물경제 모형인 CGE 모형으로 분석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하나의 FTA가 발효되면 그 경제효과는 '관세철폐→수출입 증감→생산 증감→GDP, 고용 증감 등의 경제적 효과가 동시에 또는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따라서 CGE 분석에 있어 첫 번째 경로인 수출입 효과를 신뢰할 수 없다면, 이와 맞물려 있는 GDP(6%), 고용(33만 명) 효과도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즉, CGE 분석에 따른 무역효과를 인정해야만 다른 효과 역시 인정될 수 있는데, 국책연구원들은 그만 자기부정을 하고 만 것이다.

만일 정부 보고대로 대미 무역수지와 대세계 무역수지가 각각 6.3억 달러와 195.7억 달러만큼 개선된다면, 무역수지와 연계돼 있는 생산-GDP-고용도 그 무역 효과에 기초해 다시 계산돼야 한다. 그런데도 무역수지와 GDP 등을 각각 따로 계산한 것은 '통계의 일관성'이라는 초보적인 연구 자세조차 저버린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책연구기관들이 이런 엉터리 보고서를 내는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부의 명시적인 또는 암묵적인 압력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국책연구기관들은 독립적이지 않다. 정부가 원하는 결과를 내놓기 위해 서로 양립시킬 수 없는 내용을 억지로 끼워 맞추고, 그 중에서도 좋은 결과만 골라 보고해야 한다.

이번에 나온 '한미 FTA의 경제효과 분석' 보고서에는 이같은 국책연구기관들의 비애가 배어 있다. 이 보고서를 보면서 국책연구기관들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보장하는 정책이 절실하다는 것을 또 한 번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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