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30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등 11개 국책연구원이 합동으로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 분석"을 발표했다. 이에 민주노동당 '한미 FTA 영향력 평가팀'(경기대 신범철, 건국대 한상희, 성공회대 정태인교수 및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위원)에서 그 발표내용에 대한 분석 결과를 보내왔다. 또한 이 글은 한미FTA 협상 졸속체결에 반대하는 국회의원 비상시국회의 측의 회람을 거쳤음을 밝혀 둔다. 이번 글은 총론에 해당하며, 각 국책연구원 등 정부 측의 반론을 기대한다. <편집자>
제1막 프롤로그 - 10년이 지나도 1인당 국민소득은 6만원 증가할 뿐이다
통계는 과학의 영역에 속하고 개그는 예술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국책연구원이 모두 개그 프로그램 작가 양성소로 신분을 상승시켰다. 일부러 저작권을 20년간 연장시키지 않아도 이미 창작의 수준이 개그의 범위를 훨씬 뛰어 넘었다. 누가 학자들을 개그 작가로 변신시켰는가? 바로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우리 나라의 앞날을 희극적 비극으로 물들이고 있다.
총량 지표부터 살펴 보자. 이들은 CGE 모델을 사용했다. 우리의 국책연구기관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모델은 정태모델이다. CGE 모델은 현재를 균형 상태로 규정하고 일정한 쇼크(여기서는 한미 FTA의 효과)를 가한 후 다시 완전고용 균형에 이르렀다고 가정했을 때의 변화를 대략 살펴 보는 모델이다. 그 한계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각국간 상대적 비교나 변화의 상대적 크기를 전체적으로 알아 보기 위해 널리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의 국책연구원들은 이 모델을 이 세상 어느 나라도 상상하지 못하는 개그로 만들었다. CGE 모델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수치는 0.3%로 나왔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또 어떤 경로를 거칠지는 모르지만 다시 완전고용 균형에 이르렀을 때 한미 FTA로 인해 0.3%의 GDP 상승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KIEP의 자의적 설정을 따르더라도 약 10년 후 0.3% GDP를 늘리려고 이 난리를 친다는 것이다. 이 수치는 조작이 아니다. 시국회의의 영향력분석팀의 CGE 모델에서도 0.22%가 나왔다.
광개토대왕이 큰 칼을 옆에 차고 미국 시장을 정벌하러 가는 광고를 익히 보아 온 국민에게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적은 수치다. 100여 개의 법률을 바꿔 우리의 사회경제를 미국형으로 바꾸는 호들갑을 떤 결과 10년쯤 지나면 1인당 6만 원의 소득이 증가한다는 것이니 어찌 이대로 발표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이른바 자본축적 모형이다. 여기에 장기니 동태니 하는 무식한 수식어를 다는 것은 그저 어리광쯤으로 볼 수 있다. 1인당 6만 원의 소득 중 일부는 저축이 되어 투자될 것이니 성장률이 더 높아질 터이다. 그래서 나온 수치는 1.28%이다. 이제 1인당 24만 원의 소득이 늘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그저 웃어 넘길만 하다.
제2막 쇼크 요법 - 그래도 100만 원은 넘어야지
본격 개그는 이제 시작된다. 이미 자본축적까지 모두 고려했는데 여기에 다시 1.2%의 생산성 향상이라는 외부쇼크를 다시 모델에 가한다. 한국의 CGE 모델은 너무 자주 충격을 받아 제대로 돌아갈지 의심스럽다. 사실 KIEP는 동태적 효과를 파악하기 위해 동태 CGE 모델(투자 및 기업행동의 내생화 모델)을 사용하려 했지만 불행하게도 그 연구를 할 능력이 없었다. 이것이 한국 최고 국책연구원들의 수준이다. 능력이 없으면 거기서 그쳐야지 대 국민 보고를 개그로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슬그머니 전혀 별개인 KIET의 연구를 자의적으로 인용하여 1.2%p 생산성 향상이라는 경이로운 수치를 끄집어냈다.
세계의 경제학자들이 모두 웃을 것이다. 추가로 벼라별 수법이 다 동원됐다. 수입이나 FTA가 과연 생산성을 향상시키느냐를 둘러싼 세계적 논쟁을 아예 무시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스스로 인용한 연구조차 왜곡했고, 심지어 생뚱맞게도 미국의 생산성 통계를 한국에 적용하기도 했다.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사기가 다 동원됐으니 세계의 다른 연구기관이 들여다 볼까 두렵다. 그러니 제발 영문으로 번역하지는 말기 바란다. 분명 말하건대 이번 보고서는 황우석 사건보다도 더한 치졸한 사기극이다.
이제 정부의 계산대로 하면 10여 년 후부터 우리 경제는 6%나 추가 성장을 한다. 기존 성장률 4-5%를 더하면 매년 10-11%를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멋진 신세계다. 미국이 맺은 FTA를 모두 검토해 보라. FTA 하나의 효과로 10년쯤 지난 뒤 6%의 추가 성장을 한 나라가 있는가? 정상적인 수치를 20배나 뻥튀기하는 이런 사람들이 학자인가, 개그 작가도 차마 못할 일이다.
그냥 한미 FTA는 별 효과가 없으니 국민들에게 5분만 더 열심히 일하자고 호소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겠는가? 하루 8시간 노동(480분)을 하는 우리 국민이 모두 5분만 더 열심히 일하면 1% 이상 생산성이 향상될 것이다. 국민 모두에게 사기를 치는 것보다는 훨씬 '참여정부' 답지 않은가?
이왕 몸을 버렸으니 대통령 표현대로 '막 가자는 것'인가? 이미 1년 전에 우리는 이런 짓거리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누누히 지적했다. 개그는 영원하다. 이번에는 새로운 코너가 등장했다. 무역수지 항목이다.
제3막 새 술은 새 부대에 - 무역수지는 개선되어야 한다
CGE 모델은 계수를 대입하면 모든 결과가 주루룩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무역수지 항목에서는 CGE 모델을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의 관세 수준이 미국의 3배 정도이고 제조업의 평균노동생산성 역시 형편없이 떨어지니 FTA로 무역수지가 악화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작년에 KIEP가 이리 저리 수치를 바꿔 봐도 무역수지는 약 40억 달러에서 70억 달러 가량 악화되는 것으로 일관되게 나왔다. 시국회의 영향력 분석팀의 결과 역시 마찬가지로 50억 달러 이상 무역수지가 악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출을 해서 먹고 사는 나라'이므로 FTA를 추진해야 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는데 오히려 대미 무역수지가 악화된다니 이런 기막힌 '사실'을 어찌 그대로 전할 수 있는가? GDP 뻥튀기에는 신주단지처럼 애지중지하던 CGE 모델은 이제 '한계를 감안하여' 간단하게 폐기 처분되었다.
새 코너에는 새로운 개그 형식을 도입하자, 이것이 11개 합동 개그팀의 결론이다. 통계의 일관성과 같은 기준은 학계에나 통용되는 것이지 개그계에서는 오히려 금물이다. 11개 연구원이 '산업별 미시 분석'을 통해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축소하는 데 일로매진했다. 그 결과 드디어 우리는 매년 4억 달러 이상 무역수지를 개선하게 됐다. 가히 과학에 대한 개그의 승리다. 특히 제조업 부분의 수출 증가가 눈이 부시니, KIET는 연말에 방송대상 개그부문 수상이 확실하다.
2.5% 관세 철폐, 대당 50만 원 가량의 가격 인하로 혼다 아코드나 도요타 캠리와 같은 미국산 일본차와 경쟁해야 하는 자동차의 수출은 매년 무려 10억 달러씩 증가하고 얀포워드(원사기준)의 엄존으로 거의 관세혜택을 보지 못하는 섬유가 2억 달러씩, 그리고 이미 무관세나 다름없는 전자분야에서는 6억 달러의 수출이 증가한다니 이것이 개그인지 아닌지 몇 년 참고 기다려 보자.
우리나라의 제조업 평균 노동생산성이 미국의 40%에 불과하다는 객관적 수치를 무시하고 '압도적인 우위를 보인다'고 믿는 한덕수 총리, '농업과 제약을 제외하곤 피해가 없다'고 강변하는 대통령의 뜻대로 모든 수치는 개그 수준으로 조작되었다. 피해를 제대로 보고하면 장관조차 '잘리는' 분위기이니 통계가 개그로 격상되는 것은 당연하다. 농업에도 생산성 증가의 마술을 걸어 흑자가 난다는 초절정 개그에 이르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지적재산권이나 문화 분야에는 기초 통계조차 없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이런 초보적인 준비도 하지 않고 우리 정부는 한미 FTA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황당 개그로 만들었다.
제4막 에필로그 - 한미 FTA라는 개그쇼는 중지되어야 한다
시국회의는 정부에 엄중 경고한다. 더 이상의 개그를 중단하고 국민에게 과학을 제시하라고 요구한다. 이러한 개그를 그저 보고만 있는 국회 역시 대오각성해야 한다. '사실'을 중시한다면 언론이 이제 깨어나야 한다.
개그 수준의 총량지표만 문제가 아니다. 미국식 사회경제로 재편되면서 일어날 전방위적 구조조정에 시달릴 힘없는 서민들의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이들의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 과연 개그쇼로 감춰질 수 있다고 믿는가? 신약 특허권의 연장, 저작권 연장, 미국 차에 유리한 세제 개편, 광우병 수입 기준의 무시, LMO 수입규제 완화…. 하나 하나 열거하기도 어려운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개그에서는 '제도개선'으로 둔갑했다. 국내 기업이 고사하고 국민들의 사회권과 건강권 마저 위협받도록 법을 개정하는 것이 과연 제도개선이란 말인가? 미국 기업을 위해 미국식으로 법과 제도를 바꾸면 그것은 곧 '개혁'이라니 이제 우리 국책연구원들의 개그 수준은 상상을 초월하여 신앙에 도달했다.
우선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 분석"에 참여한 11개 국책연구기관의 원 자료를 모두 공개해서 국회와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나는 각 국책연구원의 양식있는 연구원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이 어마어마한 개그쇼에 적극 가담하거나 방조하면서 학자로서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는가? 이들의 양심선언을 기대하는 것은 단지 희망일까?
한미 FTA는 원점에서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최소한 객관적 지표를 내 놓고 국민의 의견을 물어야 한다. 이것이 시국회의를 비롯한 국회, 그리고 우리의 학계가 해야 할 당연한 역사적 의무이다. 이를 소홀히 한다면 우리 모두 이 엄청난 역사적 범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 이 글의 의도는 결코 개그계를 희화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본의 아니게 개그계에 무례를 범하게 된다면 미리 사과를 드린다. 우리의 유일한 웃음 보따리마저 강탈하는 국책연구원들에 분노를 느낀다.
우리는 국책연구기관 전체와 언제나 토론할 용의가 있다. 발표에 자신이 있고 또한 학자로서 일말의 양심을 아직도 지니고 있다면 당당히 공개토론에 나오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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