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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가만큼은 사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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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가만큼은 사수하자!" [발언] '사회적 대타협론'을 위한 변 ⑤
① 왜 진보는 사회-재벌 타협론을 수용하지 못하는가
② "민족경제론은 난센스다"
③ 마오쩌둥의 민족경제론과 스웨덴 사민주의
④ "신좌파는 신자유주의에 봉사한다"

국가와 개인은 양립불가능한가

필자는 지금까지 국가와 체제, 집단주의를 부정하는 국내외의 논리들을 비판해왔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국가와 집단이 얼마나 억압적일 수 있는지 몸서리치게 경험해온 민족이다. 한국 좌우파의 역사를 보면 경제성장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개인과 국가(체제) 간의 상충 관계는 경험적으로 너무도 뚜렷했다.

더욱이 한국의 반(反)국가주의 르네상스의 중심엔 1990년대 말 독일에서 귀국한 평론가 진중권 교수가 있었다. 그의 귀국 보고서나 마찬가지였던 시사평론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조갑제 월간조선 전 대표의 박정희 전기인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정면으로 맞선 작품이었다.

조갑제 씨 같은 우파 국가주의자와의 첫 대결에서 눈부시게 활약했던 진중권 교수는 2000년대 들어서도 황우석 사태, 디워 논란 등 애국주의가 '오버'하는 현장의 최전선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는 진중권의 '국가주의 비판'은 그가 긴 세월을 보낸 독일의 특수한 역사적, 지정학적 상황에 묶여 뚜렷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독일은 나치가 수백만 명의 유태인을 대량 학살한 국가 범죄를 경험한 국가이다. 그래서 독일의 좌파들에게 '건강한 국가주의', '건강한 민족주의'는 '뜨거운 얼음'처럼 성립될 수 없는 개념이라고 한다.

독일의 좌파들은 심지어 복지국가의 결과로 국가의 권력이 강화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 나라의 대표적 지식인인 하버마스(Jurgen Habermas)가 복지국가를 '국가의 생활세계(시민사회)에 대한 식민지화'로 간주할 정도다.

국가에 대한 독일 좌파의 강박관념을, 늦어도 통일신라 이후엔 다른 나라를 침략한 역사적 기억을 가지지 않은 한국의 진보세력이 답습할 필요가 있을까. 예컨대, 독일 좌파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개인과 국가는 반드시 '불구대천의 원수'이어야만 하는가. 독일의 끔찍한 경험과 달리 개인과 국가가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와 관련해 좋은 모델을 소개할 수 있다. 또 스웨덴이다. (자꾸 스웨덴 이야기만 해서 죄송하다. 그러나 필자의 공부가 워낙 과문한 탓이니 양해 바란다.)

'강한 국가'가 '강한 개인'으로 조화로운 나라

스웨덴 복지국가를 가능하게 만든 자본과 노동 간 대타협의 배후엔 무엇이 있었을까. 스웨덴의 노사는 그야말로 냉정한 이해타산에만 기반해서 상호 간에 필요한 것을 바꿨을까. 그렇지 않다. 그 배후엔 국가, 민족이라는 집단적 주체 의식이 있었다. 자본과 노동을 매개한 것은 국가(민족)였고, 스웨덴 사민주의는 본질적으로 국가(민족)주의이다.

스웨덴의 국가(민족)주의는 자작농과 왕이 연합해서 귀족 및 외세에 대항해온 전통 위에서 형성되었다. 이는 '애국', 즉 스웨덴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사랑이 '반(反)귀족주의를 통한 자유의 수호'란 의제와 행복하게 일치한 경험이었다.

스웨덴의 소장학자인 랄스 트라갈디(Lars Tragardh)에 따르면, 스웨덴의 민족 담론은 민주주의와 태생적으로 연결돼 있다. 이 때문에 스웨덴에서는 반민주적 민족주의, 즉 우파 국가주의가 성장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좌파 국가주의도 국가주의니만큼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을까. 트라갈디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스웨덴 사민주의자들은, 한국의 진보 지식인들과는 달리, 제2인터내셔널이 붕괴하던 1930년대 말 스웨덴 고유의 민족 담론을 사회주의적 정치 의제와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즉, 스웨덴 좌파는 민족과 민주주의를 동일시하던 전통에 사회적 평등과 연대, 개인적 자율성, 강력한 국가 등 사회주의적 이념을 결합시킨다.

그렇다면 개인적 자율성과 강력한 국가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메커니즘은 이렇다. 예컨대, 인간들 간의 교통(사랑과 우정)은 자주적이고 평등한, 자율적 인간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국가는 강력한 힘으로 이를 보장해준다. 국가는 강력한 복지 프로그램 등을 통해 개인이 가족, 교회, 자선기관 등 시민사회 영역에 의존하면서 자율성을 잃는 상태를 방지한다. 그 대신 개인은 국가의 권력을 승인한다. 국가와 개인이 사회적 계약을 맺은 것이다.

독일과 영미권에서 국가는 시민사회와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되지만, 스웨덴에서 국가의 이미지는 '개인적 자율성의 수호자'이다. 트라갈디는 스웨덴인들에게 국가는 위협이라기보다 해방의 도구로 인식되고 있으며, 스웨덴인들은 심지어 미국인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 같은 개인과 국가 간의 관계를 '국가주의적 개인주의(statist individualism)'라고 명명한다.

'국가로부터의 탈퇴'를 주장하던 어떤 진보적 지식인이 쓴 스웨덴 예찬론을 읽은 바 있다. 전형적 자가당착이다. 다른 좌파 지식인은 얼마 전 국익과 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대립적인 것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의 노동자들이 계급적 단결을 이루지 못하는 바람에 국가에서 많은 것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웨덴의 국가 개념을 진리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법은 다양하며, 따라서 국가와 개인이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명제 역시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는 것만큼은 인정되었으면 좋겠다.

국가를 지켜라
▲ 2002년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시민이 한 마음으로 펼쳐보였던 태극기(위)는 평상시에는 보수극우단체들의 시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아래)이다. ⓒ프레시안

한국의 사회운동은 민족의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노동해방, 인권, 자유를 의제화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1987년 6월 항쟁의 상징은 대한민국 국가를 상징하는 태극기였다. "민족통일은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는 민족통일"이라는 문익환 목사의 경구가 존경을 받았다. 한국은 영미나 독일보다 스웨덴과 유사하다.

한국의 진보세력이 자신들의 주요한 지적 전통 가운데 하나인 국가 이데올로기에 진보의 중요한 가치들을 결합, 발전시키기는커녕 서구의 일부 지식인들에 휘둘리고 있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만큼 '80년대'의 사상이 천박하고 얕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더 비극적인 사태는 진보세력이 국가 혹은 국익이라는 가치를 애써 무시하다 보니, 그들의 가장 주요한 변혁 수단이었던 국가를 그대로 수구세력에 헌납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제 국가 담론은 극우세력의 전유물이 되어버렸고, 극우세력은 자신들을 애국세력이라고 부른다.

극단적 시장주의자들이 집권할 가능성이 농후해지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 생산-분배-소비 순환의 주요 조절자인 국가를 이토록 경시하는 것은 '모든 권력을 시장으로 넘겨주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편으로 지금은 지식인들이 국가를 깔보는 수고로움을 감수할 필요도 없는 시기이기도 하다. 민족국가를 초토화시키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한미 FTA 비준까지 앞두고 있지 않은가.

한국의 민족국가가 세계시장 속으로 사라질 때 가장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은 노동자와 서민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국가만큼은 사수하자!

글을 맺으며

사회-재벌 대타협론 혹은 사회적 대타협론에 대한 변명으로 시작한 글이 지나치게 길어졌다. 다시 읽어보니 감정도 적잖이 섞여 있는 것 같아 당황스럽다.

필자가 이 글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사회-재벌 대타협론은 이미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대타협론은 당초 국민경제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재벌의 기업그룹들이 금융화를 통해 '텅 빈 강정'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제기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간 재벌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금융화 정책과 유력 시민운동의 반면교사적 공격 속에서 '신자유주의 시스템에서도 지배권을 박탈당하지 않을 수 있는 구조'를 준비해왔다.

최근 SK의 지주회사 전환에서 볼 수 있듯이, 이는 재벌 가문이 지분을 높여 기업그룹에 대한 지배권을 이전보다 더욱 굳히는 결과로 이어졌다. 재벌이 산하 기업들을 금융화에 적응시켜 버린 것이다. 더욱이 최근엔 금산분리 철폐를 통해 본격적으로 금융권력에 접근하려는 태세를 갖추고 있다.

금융화된 재벌들은 한국경제를 '텅 빈 강정'으로 만들 수 있다. 한국의 국민경제가 새로운 고비를 맞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지금의 한국은 참고할 대상도 없다. 한국이 겪고 있는 고실업, 빈부격차 등은 거의 모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해결은 모방이 아니라 오직 새로운 발상과 창조로만 가능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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